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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88화 (188/446)

188화

그림자가 드넓은 복도를 나아갔다.

복도에는 거대한 관들이 무수히 많이 자리 잡고 있었다.

관 내부엔 서로 다른 색상과 형태를 지닌 흉측한 생물들이 결합하여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합일을 위한 위대한 여정이었음을 알기에 그림자는 끔찍한 광경을 보고도 환희의 감정을 느꼈다.

계속해서 나아가던 그림자는 이내 벽에 가로막혔다.

그림자는 흐르듯이 벽을 통과해 광장 안으로 진입했다.

광장 한가운데, 두 눈이 타오를 것처럼 밝게 빛나는 빛의 기둥이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열흘 전까지만 해도 다섯으로 나누어져 있던 빛의 기둥은 이제 하나가 되어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그림자에겐 빛의 기둥 안에 자리 잡은 고대의 존재들이 느껴졌다.

아득한 과거.

드래곤조차 상회하는 강대함으로 대륙을 파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고대의 사도와 마족들.

그들이 남긴 사체 일부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마침내 위대한 분의 축복 아래 합일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 형태는 조각조각 기운 키메라에 가까웠지만, 저것은 위대한 분의 의지가 깃들 최상의 육체였다.

이제 곧 고대의 파멸이 더욱 끔찍한 형태를 갖추고 강림한다.

그림자가 환희를 참지 못하고 들썩이던 찰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그림자가 곧장 무릎을 꿇었다.

"기사단이 지하도시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금지된 숲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웃음소리가 잠시 광장을 울렸다.

"재미있구나. 올 수 있다 한다면 오게 두어라. 두려워할 게 있겠느냐."

금지된 숲은 마경이다.

비록 바다 건너 마경의 심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타락한 존재가 대부분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공간이 금지된 숲이었다.

로드 급이 직접 찾아온다 해도 소수의 병력으로 이곳의 중심부를 뚫어낼 수는 없었다.

"기다림이 끝나 간다."

"...!!"

그림자가 전율했다.

왕국을 단숨에 집어삼키고 제국조차 파멸시킬 존재가 곧 강림한다.

은십자 기사단이 단숨에 전멸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면, 눈을 뜬 파멸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

레오니는 레이와 잠깐 더 대화를 나눈 후 단장을 설득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레이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니 레오니가 길란트에게 질러대는 괴성이 여관 안까지 흘러들어와 귀를 괴롭게 만들었다.

저걸 과연 설득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레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탁자 위의 도면을 다시 살폈다.

레오니의 설득은 꽤 길게 이어졌다.

그래도 어찌저찌 설득은 성공했는지, 길란트가 초췌한 얼굴로 여관방 안으로 들어왔다.

길란트가 반대편에 앉자 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길란트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있었기에 레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표정이 무섭군. 일이 다 끝나면 날 다시 잡아가기라도 할 생각인가?"

"합의에 따른 약조를 어기진 않을 것이다. 다만 더 이상의 범법 행위는 좌시하지 않겠다."

레이는 잠시 고민하다, 어차피 손을 잡았으니 길란트의 비위를 좀 맞춰주기로 했다.

"...리오슈코에서 과격하게 행동한 것은 사과하도록 하지. 근데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그놈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빠르게 정보를 수집하고 대응해야 했거든.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늦기 전에 살려서 데려가야지."

"용병이 훔쳐간 아티펙트를 회수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나?"

"단장님께서 순진한 말씀을 하시는군.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욕심 많은 용병 놈들 앞에서 내가 왜 굳이 아티펙트를 운운했겠어? 어디 수상한 놈 없나 미끼나 던져본 거지."

"그럼 네 진짜 목적은 뭐지?"

"말했잖아. 그놈을 구출해오는 것."

"흠..."

길란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레이의 말을 완전히 신뢰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레이를 향한 시선이 조금은 덜 적대적으로 변했다.

레이는 분위기가 약간이나마 풀린 것을 느끼며 탁자 위의 도면을 툭툭 두들겼다.

"구체적인 합의에 들어가기 전에... 금지된 숲 아래에 지하도시가 정말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진입할 방법이 따로 있나?"

길란트가 침묵했다.

레이가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다시 물었다.

"설마 삽질해서 파고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다."

"그럼 됐어. 그쪽을 믿어보지."

"상황의 여의치 않을 시 물리적으로 지반을 뚫어야 할 수도 있다."

은십자 기사단이 준비한 '어떤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삽질이라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레이가 고개를 대충 끄덕이곤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쪽의 작전 목표가 정확히 어떻게 되지? 단순히 지하도시의 존재만 확인하려는 건가? 아니면 지하도시에 진입한 후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는 건가?"

"해당 장소에 진입 후 탐색을 진행할 거다. 정보를 최대한 확보한 후 탈출하는 게 목표이다."

"한 번 진입하면 탈출하기 쉽지 않을걸. 악마숭배자들이 거기서 얌전히 차만 마시고 있지는 않을 텐데."

레이가 조소하며 말을 이었다.

"썩어있는 왕국 놈들이 거래를 해준 덕분에 다량의 물자가 금지된 숲 안으로 반입됐어. 그걸로 흑마법사 놈들이 여기 안에 무슨 짓거리를 해놨을지 알 수가 없다고."

"위험성은 인지하고 있다. 이제 너의 목표를 밝혀라."

"여기를 수색해서 호프 녀석의 흔적을 찾아내고, 호프가 이 지하도시 내부에 있다는 게 확인되면 구출 후 탈출해야지."

"지하도시에 진입 후 탐색과 수색을 진행하는 단계까지는 협력할 수 있겠군."

"둘중 한쪽이 목적을 달성하면 같이 탈출하거나 협력을 파기하고 서로 갈 길 가도록 하지."

"동의하겠다."

"뭐, 그럼 잘 부탁하지."

레이가 내민 손을 길란트가 잡았다.

악수를 끝낸 레이가 뒤늦게 요구해야 할 조건이 하나 더 떠올라 짧게 신음했다.

"아, 그 은십자 기사단이 고용한 마법사들, 이번 작전에서 배제해주길 바란다."

"불가하다. 마법사 전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봐, 용병 노릇이나 하는 출신 성분도 불명확한 마법사가 진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나?"

레이가 출신 성분으로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항변했다.

"그놈들은 상황이 위급해지면 가장 먼저 몸을 뺄 거야. 그러면서 누구보다 탐욕을 부리겠지. 마법사놈들 성격 지랄 맞은 걸 한두 번 겪나? 걔들을 어떻게 믿고 동행해?"

가만히 대화를 듣던 레오니가 불쑥 물었다.

"마법사 싫어해요?"

"마법사 중에 다른 마법사 좋아하는 놈 본 적 있나?"

"...없긴 하네요!"

납득한 레오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니가 고정관념을 더욱 확고히 하는 사이 혀를 찬 레이가 길란트를 바라봤다.

길란트 또한, 기밀 사항인 유적 돌입 작전에 출신도 모르는 마법사 용병을 동행시키는 게 내키지 않았기에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법사 용병의 배제는 고려해보도록 하지."

"좋아. 아... 헌데 질렌할 백작은 어찌 처리할 거지?"

"그건 네가 관계할 문제가 아니다."

"뭐, 그 말은 맞군."

"단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오겠다. 조율해야 할 사안이 남아있다면 그 뒤에 하도록 하겠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길란트가 방을 나갔다.

레오니가 탁자 위에 있던 도면을 챙긴 후 레이에게 눈을 한 번 찡긋 감았다가 뜨고는 길란트의 뒤를 따랐다.

한숨을 내쉰 레이가 주변에 방음 결계를 전개하고선 입을 열었다.

"다 들었지?"

뱅, 제트, 코멧이 옆 방에서 나와 레이 앞에 섰다.

레이가 새 종이를 탁자 위에 펼치자 루나가 다가와 마법을 전개했다.

허공에 열선 수백 가닥이 서로를 옭아매며 도면을 그려내더니 종이 위로 내려앉았다.

종이가 살짝 타들어 가며 레오니가 보여줬던 도면의 사본이 단숨에 완성됐다.

"..."

레이도 이게 진짜 가능하리라 생각치 못했던 탓에 루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큼, 보다시피... 사안이 심각해."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제트와 뱅은 에리다누스와의 전투에 참여했었기에 레이의 발언이 더욱 무겁게 와 닿았다.

레이가 루나에게 부탁해 도면을 몇 장 더 복사하고는 뱅, 제트, 코멧에게 건넸다.

"이번엔 나와 룬 둘만 은십자 기사단과 합류해서 지하도시로 진입할 거야."

"레온!!"

뱅이 곧장 목소리를 높이려 했다.

허나 레이가 고개를 저으며 뱅을 막았다.

"알고 있잖아. 너희 둘 다 무력적으론 내게 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저 안에서... 너희까지 신경써주기 힘들어."

"..."

"너희들은 이 사본을 되도록 빠르게 제국 상부에 전달해. 그게 너희들이 날 도울 수 있는 방법이야."

"그럼 레온 님은..."

"은십자 기사단과 함께 지하도시를 수색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빠져나올 거야. 다만... 혹시라도 내 복귀가 늦어진다면... 뭐, 어쨌든."

뱅과 제트가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라 여긴 레이가 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뒤를 부탁한다."

*

고위 마법사와 정령사와의 협력을 약속받았다.

그 소식이 퍼지자 은십자 기사단의 기사단원들은 가벼운 환호를 터뜨리며 좋아했다.

레오니가 이게 다 자기 공이라고 까불며 돌아다니자 기사단원들이 돌아가면서 박수를 쳐주었다.

다들 내색은 많이 안 했지만 목숨이 걸려 있던 일인지라 내심 초조해하고 있었었다.

헌데 고위 마법사와 정령사가 합류하게 됐으니,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단원들이 많았다.

길란트는 단원들의 웃음소리를 듣다가 홀로 떨어져 잠시 하늘을 보았다.

새벽이 지나 하늘로 완전히 떠오른 태양이 지면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길란트는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셨다.

강렬한 햇빛에 비해 차갑기 그지없는 공기가 폐에 들어차며... 마음을 무겁게 식혔다.

'죽어야 한다.'

반드시... 죽어야 했다.

왕국은 깊게 썩었다.

금지된 숲의 악마 숭배자들과 몇백 년 동안 거래를 하면서도 '아주 큰 문제'가 없었기에, 안이함이 왕국의 고위층을 잠식해버렸다.

쌓이고 쌓인 안이함이 그들의 눈과 귀를 막고 몸뚱이를 살찌워 제자리서 뒤척이게 만들었다.

누군가 위험을 경고해도 그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목끝까지 칼이 다가왔을 때쯤이야 간신히 버둥댈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도 어려울지 몰랐다.

은십자 기사단이 지하도시를 발견했다고 해도 왕국은 두루뭉술한 증언 따위는 덮고 무시해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길란트는 지하도시로 내려가 그곳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두 눈으로 확실하게 확인해야 했다.

허나 그걸로는 부족했다.

눈과 귀가 막힌 살찐 돼지 새끼들에게 너희 또한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자각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죽어야 했다.

차마 직시하기 힘든 끔찍한 죽음마저도 서류 위엔 숫자로 표기될 뿐이었지만, 하다못해 그렇게라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그렇기에...

'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왕실의 일곱 기사단 중 하나인 은십자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의 죽음.

거기서 더 나아가, 기사단의 반절 이상이 전사하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돼지 새끼들의 눈에 덮인 눈꺼풀을 찢어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만 알리모를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만 했다.

길란트가 가라앉은 눈으로 떠오른 태양을 바라봤다.

단원들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돌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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