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혼자 풀이나 뜯으며 지내볼래액!!!"
마지막은 삑사리가 나서 음이 확 높아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레오니의 폭언에 큰 충격을 받은 길란트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길란트에게 다가간 레오니가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여긴 나한테 맡겨요!! 고집 그만 부리고!! 이번 한 번만 나한테 양보하라고요!! 알겠어요?!"
평소 쌓이고 쌓아왔던 감정을 죄다 토해낸 레오니가 고개를 휙 돌렸다.
"거기 마법사!! 나랑 얘기해요!! 루코프 경은 나 좀 따라와서 도와주고!!"
기사 단원인 루코프가 길란트의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레오니에게 붙었다.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길란트가 떠듬거리며 레오니를 불렀다.
"레, 레오니...! 지금 이게 무슨...!"
"이번만! 나한테 맡겨요. 그동안 내 덕을 본 것도 많잖아요! 눈 한 번만 딱 감고 있어요!! 한 번만!!"
레오니는 검지를 하늘로 들어 올리며 꽥꽥 소리치고는 레이가 머물던 여관으로 먼저 들어갔다.
레이가 길란트를 쳐다보다 레오니를 따라 여관에 들어갔다.
길란트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검을 들고 서 있었다.
*
레오니는 길란트의 성격을 잘 알았다.
본래도 융통성이 없는 길란트였지만 악마 숭배자에 대한 태도는 더욱 강경했다.
길란트가 출세하기 힘들었던 가장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왕국의 고위층들은 더욱 큰 이익을 위해 심심찮게 금지된 숲의 흑마법사들과 거래했고, 그들에게 있어 길란트는 눈엣가시였다.
그 탓에 몇 번이고 낙후된 지역으로 좌천될 뻔한 길란트를 가문 힘을 빌려 막은 게 레오니였다.
헌데.
악마 숭배자에 관계된 일에 그토록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는 길란트가...
악마의 권능을 받아 변형된 마물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물증이 없었으면 모를까, 변형된 마물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길란트는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금지된 숲 깊숙이 진입할 게 뻔했다.
물론 휘하 기사단원은 뒤에서 길란트를 찌를 게 아니라면 그를 무조건 따라야 했다.
'진짜 다 죽는다.'
마탑을 비롯해 금지된 숲의 이권과 관계있는 자들이 사방에서 압박을 가한 탓에 제대로 된 마법사는 데려오지도 못했다.
이렇게 병종의 균형이 다 깨져있는 상태로 금지된 숲에 진입했다간 답이 없었다.
레오니가 여관 밖에서 발작하며 앞으로 나섰던 것도 거기까지 머리가 돌아갔기 때문이다.
"음, 만나서 반가워요."
여관방 안에서 레이와 마주 본 레오니가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아까 기세가 무시무시하던데, 고위 마법사시죵?"
죵?
과한 애교에 레이가 떫은 표정을 짓자 레오니가 헛기침을 했다.
레오니와 동행한 기사단원 루코프도 괜히 자기 얼굴이 화끈거려서 인상을 썼다.
잠시 침묵한 레오니가 다시 활짝 웃으며 레이에게 물었다.
"청색 마탑 출신이라고요?"
"그래."
"와, 대단하네요."
레오니는 레이가 건방을 떠는 것을 일단 머리로는 이해했다.
청색 마탑 출신의 고위 마법사라면 어지간한 귀족 앞에서도 꿀릴 게 없었다.
레오니가 레이 옆에 서 있는 루나를 흘깃거리며 물었다.
"저분도 마법사인가요?"
"..."
레이는 가진 패를 조금은 까야겠다고 생각하고 루나에게 손짓했다.
루나가 중급 정령과 중상급 정령들을 곁으로 소환했다.
다수의 정령을 확인한 레오니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오오...!! 정령사!!"
과연 기사단을 상대로도 뻗댈만한 실력을 가진 무리였다.
저 조합이면 솔직히 정면에서 작정하고 붙었어도 애 좀 먹을 게 뻔했다.
레오니가 흡족하게 웃으며 물었다.
"용병이 훔쳐간 아티펙트를 찾으러 왔다고요?"
"그래."
"솔직히 말해봐요. 아티펙트를 찾는 건가요, 아니면 사람을 찾는 건가요? 사람을 찾는다면 목적은? 보복? 구출?"
레오니는 꽤 핵심적인 부분을 파고들었다.
레이가 눈가를 좁히며 되물었다.
"그걸 그쪽이 알아야 되나?"
"그~렇긴 해요!"
한숨을 쉰 레이가 손을 휘휘 저었다.
"말장난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쪽은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음...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도 상황이 좀 곤란하거든요. 저 단장놈...!! 아니, 단장님이 금지된 숲을 뒤져야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어서!"
"그래서?"
"우리가 손을 잡자는 거죠. 금지된 숲을 뒤져야 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잖아요."
"내가 왜?"
레이는 일단 튕겨보았다.
그 시건방진 태도에 열을 받은 레오니는 몸을 배배 꼬면서도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같이 다니면 훨씬 안전해질 거예요. 이래 봬도 우리 왕실기사단이에요. 그리고 우리 도와주면... 여기서 사고 친 거 눈 감아줄게요."
"너희 단장님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우리- 단장은!! 내가 설득할게요. 날 믿어요!! 걔 내 말에 꼼짝 못해!!"
남 앞에서 단장을 까는 레오니를 보며 루코프가 결국 콧잔등을 말아쥐었다.
그럼에도 루코프가 레오니를 말리지 않은 건, 확실히 이대로 금지된 숲에 들어갔다간 다 죽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레오니는 뒤늦게 진정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단장이 융통성은 없지만! 그래도 일의 우선순위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리고 그 사람 악마 숭배자라면 아주 혐오를 하거든요. 물론 혐오하는 게 당연하지만... 어쨌든 내가 잘 설득해볼게요."
레이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거절한다."
"거어절? 거어절?!! 야!!! 너 진짜 잡혀들어가고 싶어?! 청탑 출신이고 뭐고 평생 지하에서 썩고 싶냐?!!"
되도 않는 겁박을 하는 레오니를 향해 레이가 덤덤하게 답했다.
"저 마경 속을 얼마나 오래 헤집고 다녀야 할지 모르는데, 그 기간 동안 우리가 안정적으로 협력을 유지할 수 있겠어? 마경 같은 곳에서 한번 불화가 생기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야."
"아니 진짜 답답하게 구네!!"
화를 버럭 낸 레오니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후 반대편에 앉아있던 레이에게 바짝 얼굴을 붙였다.
"사람 찾는다고 했지? 정황상 악마 숭배자 놈들의 근거지에 붙잡혀 있을 것 같고? 근데 근거지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고? 맞아?"
"맞아."
"잠-깐만 기다려봐!"
레오니가 자기 품을 뒤지기 시작하자 루코프가 경악했다.
"레오니 경!! 그거 특급 기밀입니다!!"
"아 좀 가만있어요!! 좀 보여준다고 지들이 날 어찌할 건데?! 제대로 된 마법사도 하나 안 붙여줘 놓고는! 응?!"
레이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레오니가 뒷배경 하나는 빵빵하겠구나 생각했다.
'근데 저 철 없는 아가씨조차 제대로 된 마법사를 고용하지 못할 만큼 위쪽의 압력이 강했다는 말인데...'
금지된 숲과 관련해 여러 이권 세력이 엮여있다는 게 확실히 체감됐다.
그때 레오니가 루코프의 방해를 이겨내고 커다란 종이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짠!"
"...뭔데?"
"궁금해?"
레이가 고민하다 한 번 져주었다.
"너무 궁금하네."
"그럼 특별히! 보여 드릴게."
레오니가 탁자 위에 종이 뭉치를 쫙 펼쳤다.
"금지된 숲 외곽의 유적에서 발굴된 문서가 꽤 많아. 대부분 훼손이 심각하긴 한데, 그중 일부를 최근 복구하는 데 성공했어. 이건 복구된 문서의 사본이야."
"..."
레이가 탁자를 완전히 덮어버릴 만큼 커다란 종이뭉치들을 보며 권능을 발현했다.
종이에 그려져 있는 것은 일종의 도면이었다.
자그마한 건축물의 도면도 아니었다.
이건...
"도시 설계 도면인가?"
"와...!! 고위 마법사는 다르네! 이걸 어떻게 한 번에 알아보지?"
솔직하게 감탄한 레오니가 마음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천 년도 훨~씬 더 된 도면들이에요."
"근데?"
"이 도면에 그려진 도시가 실제로 시공되었을지는 알 수 없어요. 흔적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레오니가 탁자 위를 덮은 도면 몇 개를 치웠다.
그러자 그나마 규모가 좀 작은 도시 계획이 그려진 도면이 드러났다.
"이거, 이거 말인데요."
"이게 뭐."
"있잖아요, 천년도 훨씬 전에는 뭐가 살았는지 알아요?"
"말장난할 생각 없어."
"아이씨, 드래곤 말이에요, 드래곤."
아직 인간이 나약했을 때.
제대로된 기술도 없이 안정적인 국가조차 이루지 못하고 악의를 마주해야 했을 때.
그 시기엔 드래곤이 번성하고 있었다.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근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레이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레오니가 도면을 하나 더 꺼냈다.
"자, 이거. 이게 요 도시의 옆면? 뭐 어쨌든 그런 방향에서 본 도면이라는데..."
레오니가 보여준 도면은 천장이 덮여있었다.
천장이.
덮여있었다.
"..."
도시 위에 대체 천장이 왜 덮여 있지?
레이가 의아함을 느낀 찰나.
레오니가 도면에서 높게 솟아 있는 기둥 하나를 가리켰다.
"이거 있잖아요, 이거."
"...이게 왜."
"금지된 숲에서 발견된 구조물 중 이거랑 형태가 비슷한 게 있거든요."
레이의 몸이 일순 덜컥 굳었다.
레오니가 레이의 반응이 기꺼웠던지 실실 웃으며 속삭였다.
"드래곤은 땅 파는 걸 좋아하잖아요."
지하도시.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레이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드래곤이 황금기를 맞이했을 때 건설되었을 고대의 지하도시.
그게 금지된 숲 아래 파묻혀 악마 숭배자들의 본거지 역할을 하고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진짜 개좆같네."
레이가 욕설을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레오니가 흠칫 놀라 따졌다.
"아니 왜 욕을 하고 그래요...?"
"이거 도면에 따르면 도시 규모가 어떻게 돼?"
레이는 그리 물어보면서 권능을 발현해 도면을 직접 살폈다.
결코 규모가 작지 않았다. 지하에 건설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말이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싶었지만.
발레리우스란 드래곤은 자기 혼자 수백 년 동안 땅을 파내서 세리아와 울트가 10년을 떠돌게 할 만큼 거대한 미궁을 만들었다.
드래곤이 수십 마리씩 돌아다니던 황금기 때라면 이런 형태의 지하 도시를 건설하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시기엔 이곳이 마경화 되어있지 않았겠지.'
허나 이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마경은 그 면적을 넓혀갔고, 드래곤은 멸종했으며, 지하 도시에 관한 기록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울트가 이곳에 숨어들었다가 탈출하지 못했나...? 악마 숭배자나... 마족이 이곳을 점유했고?'
쾅!
레이가 탁자를 내려쳤다.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진정시킨 레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10년 동안 드래곤이 만든 미궁에 갇혀 있었으면서, 이번엔 또 드래곤이 만든 지하도시로 기어들어가다니.
드래곤이 만들어낸 구조물과는 인연이 지긋지긋한 울트였다.
"알리모의 왕실과 귀족들은 제정신이냐? 이곳에서 악마 숭배자들이 무슨 짓을 꾸밀 줄 알고 방치하고 있어?"
"어... 이거 최근에 복구된 문서예요.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어요. 이 도면에 그려진 건축물 일부와 닮은 구조물이 금지된 숲 속에서 목격된 적이 있다... 말고는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죠. 그러니까 다들 설마 아니겠지~ 하며 쉬쉬하는 거고. 근데 우리 잘나신 단장이!! 그만 의기를 참지 못하고 자기가 확인하고 오겠다고 나서버린 거죠."
"이 도면에 그려진 것과 유사한 구조물이 발견된 위치... 알고 있어?"
레오니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레이가 마른 웃음을 흘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좋아, 협력하지."
"음! 잘 생각했어요. 그럼 이제 서로 원하는 걸 다시 조율해보자고요. 저 빌어먹을 금지된 숲에 들어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신뢰를 쌓을 수 있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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