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레이는 의자에 앉아 떠오르는 해를 창문 너머로 가만히 바라봤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울트. 그의 존재가 레이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난리를 쳐도 제국 쪽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황제의 삶이 곧 다한다는 사실을 레이는 알고 있었다.
황위가 계승되면 에른스트는 곧바로 제국의 신검을 새로운 황제에게 바치겠다고 레이에게 언질했다.
레이가 알리모 왕국에서 돌아왔든 돌아오지 못했든 말이다.
'여기서 웬만큼 난리를 쳐도 그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황실에 들어갈 때쯤이면... 황위가 계승된 후겠지.'
포이보스가 황위에 오르는데 레이가 세운 공적이 적지 않았다.
사도가 된 1황자를 제거했고 제국에 큰 혼란을 일으킬 뻔했던 워프게이트 습격을 막아냈다.
모로스를 찾아낸 공로도 있으니, 왕국에서 말썽 좀 피웠다고 해서 그 죗값은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더군다나 에른스트가 뒤를 봐주고 있으니 제국 쪽은 크게 걱정할 게 없었다.
결국 문제는 울트였다.
대체 그는 무슨 상황에 부닥쳐있는 걸까.
'나 때문에 역사가 바뀌어 정말 객지에서 개죽음을 당하기라도 했을까?'
아니면 이곳이 바로 울트가 타락하게 된 시발점인 걸까.
뭐가 되었든 레이는 빠르게 울트의 신병을 확보하고 싶었다.
레이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도의 씨앗이 울트였기에 더욱 그랬다.
허나 매우 과격하게 움직여봤음에도 건진 게 별로 없었다.
그게 레이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울트가 죽지는 않았을 거야. 아마도... 금지된 숲의 악마 숭배자 놈들의 근거지를 찾아냈다가 들켜서 쫓기고 있지 않을까?'
레이는 자기 추측을 어느 정도 확신했다.
울트가 단지 객사했을 뿐이라면, 울트를 찾는 레이를 굳이 대단한 함정까지 만들어 죽이려 한 게 설명이 잘 되지 않았다.
레이는 일단 자기 추측을 믿고 악마 숭배자 놈들의 본거지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고민했다.
'은십자 기사단이 과연 뭘 좀 알고 있을지...'
"레온."
침대에 앉아있던 루나가 레이를 불렀다.
레이가 눈을 돌리자 루나가 침대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좀 자요."
"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
레이는 침대에 눕는 대신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넌 안 힘들어? 이렇게 멀리까지... 오래 나와 있는 건 처음이잖아. 한 곳에서 가만히 머무는 것도 아니고."
"나도 괜찮아요."
언제나 차분함을 유지하는 루나의 목소리에 레이는 약간의 착잡함을 느꼈다.
잠시 침묵한 레이가 감정을 숨긴 채 담담하게 웃어주었다.
그때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레이가 스태프를 쥐었다.
"나가봐야겠네."
과연 은십자 기사단이란 녀석들과 얼마나 말이 통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
새벽 아침부터 여관 앞에 일련의 무리가 찾아왔다.
질렌할 백작을 중심으로 용병, 위병, 그리고 은십자 기사단까지 합류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주민들은 그들을 보고 괜히 문제에 휘말릴까 두려워 멀찌감치 몸을 피했다.
은십자 기사단의 단장, 길란트가 선두에서 말을 몰아 여관 건물로 다가갔다.
길란트가 큰소리를 내기 전에 목을 가다듬었다.
헌데 길란트가 여관 안의 투숙객들에게 경고를 전하기도 전에 여관 문이 벌컥 열렸다.
"은십자 기사단인가?"
문을 열고 일행들과 여관을 나온 레이가 다짜고짜 물었다.
선수를 뺏긴 길란트가 레이를 위아래로 살피고는 답했다.
"그렇다. 난 은십자 기사단의 단장직을 맡고 있는 에르빈 길란트다. 네가 와이번의 둥지에서 용병을 폭행했다는 마법사인가?"
"용병놈들이 비싸게 굴길래 본보기를 보이긴 했지. 그래도 보상은 충분히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쨌든 잘 됐군. 안 그래도 기사단을 찾아가려고 했는데, 이리 직접 와 주고."
"...용병 길드의 길드장이 실종되었다."
길란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에 관해 아는 것이 있나?"
길란트가 기사단을 이끌고 곧장 레이가 머물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온 것은 용병 길드 길드장의 실종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길드장 실종 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레이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고작 용병과 싸움 좀 붙은 외지인을 잡겠다고 이리 우르르 찾아오진 않았을 것이다.
"대답해라."
길란트가 대놓고 기세를 내뿜었다.
막강한 기세를 느낀 용병과 위병들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길란트의 기세는 강맹했으나, 레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린 채 길란트를 향해 나아갔다.
"새벽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시는군."
"왕국민에게 피해를 끼쳤다면 그에 합당한 죄를 묻도록 하겠다."
"내게 죄를 묻겠다고?"
레이는 기 싸움에서 져줄 생각이 없었기에 길란트와 마찬가지로 기세를 뿜어내며 거리를 좁혔다.
헌데, 길란트의 코앞까지 다가갔던 레이가 얼마 못 가 슬그머니 뒷걸음질쳤다.
누가 봐도 꼬리를 마는 모양새였다.
뱅과 제트가 상황을 이해 못 하고 눈을 깜박였다.
"왜 저러시지?"
"글쎄...?"
상대가 소드마스터도 아닌데 대체 왜 레이가 꼬리를 만단 말인가.
뱅과 제트는 혼란에 빠져서 저들끼리 수군댔다.
물론 레이가 기세 싸움에서 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길란트는... 체격이 굉장히 좋았다.
거의 2 m에 달하는 장신이었는데, 레이와 키 차이가 20 cm 이상 났다.
때문에 길란트와 코앞에서 마주 선 레이는 길란트를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정말이지, 자존심이 박박 깎여나가는 구도였다.
"..."
턱을 하늘로 향해 잔뜩 치켜들어야 했던 레이는 짙은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물러섰다.
내가 환생해서 이딴 수모를 겪으려고 그 고생을 했나 곱씹어본 레이가 부들거리다 뒤를 돌아봤다.
레이를 바라보는 루나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
레이가 정색한 채 경고하듯 자기 뺨을 툭툭 두드렸다.
치익- 소리와 함께 루나의 뺨에 차있던 공기가 빠져나왔다.
레이는 콧잔등을 꾹꾹 누르다 뱅과 제트에게 명령했다.
"가져와 봐."
명령을 알아들은 뱅과 제트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여관 건물로 들어갔다.
잠시 뒤.
피떡이 된 베렛과 라스커가 제트의 양손에 잡혀 질질 끌려나왔다.
누가봐도 베렛과 라스커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카가강!!
은십자 기사단원들이 곧장 검을 뽑아들었다.
길란트가 손을 들어 단원들을 제지한 후 입을 열었다.
"해명할 기회를 주겠다."
"길란트 경! 무슨 해명이오! 당장 포박하시오!"
질렌할 백작이 그리 주장했으나 길란트는 듣지 않았다.
레이가 어깨를 으쓱이는 사이 뱅이 무언가를 여관에서 질질 끌고 나왔다.
결계에 막혀있었던 악취가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비위가 약한 위병 몇 명은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 구역질을 했다.
"가져왔습니다."
뱅이 거대한 마물의 사체를 질질 끌고 와 길란트 앞에 놓았다.
레이의 일행을 습격한 수십의 마물들 중 타들어 가지 않고 보존된 몇 안 되는 사체였다.
길란트가 차갑게 굳은 눈으로 극심히 변형되어 있는 마물의 사체를 응시했다.
길란트가 손짓하자 성기사 두 명이 마물을 향해 다가왔다.
마물의 사체로부터 흘러넘치는 부정한 기운을 확인한 성기사가 엘-람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짧게 기도했다.
짧게라도 기도를 올려야 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성기사가 아니더라도 다들 충격을 받았기는 마찬가지였다.
레이는 모두에게 꽤 상세하게 일의 내막을 설명해주었다.
사건을 하나하나 되짚어준 레이가 베렛을 가리켰다.
"...해서 저놈에게 물으니 질렌할 백작이 시킨대로 했을 뿐이라 진술하더군."
"네놈이 지금 나를 모함하는 것이냐!!"
질렌할 백작이 격분했다.
질렌할은 당장 저놈의 혀를 자르라고 소리칠 생각이었으나, 그보다 길란트의 명령이 빨랐다.
"질렌할 백작을 포박해라."
"길, 길란트 경?!"
질렌할이 기겁했다.
고작 용병 길드 길드장 놈의 진술만으로 포박을 명하다니.
물론 악마 숭배자와 연관된 일이라면 물증 없이도 포박과 심문 따위를 진행할 수 있었으나, 귀족을 상대로 그리 강경하게 나서는 자는 없었다.
더군다나 금지된 숲의 흑마법사와 왕국의 고위층이 간간이 거래를 진행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니었던가.
"이, 이거 놓아라!!"
질렌할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며 몸부림쳤지만 기사단원들은 단장의 명령에 따라 질렌할을 포박한 채 입을 막았다.
포박당한 질렌할이 뒤로 끌려가는 사이 길란트가 검을 뽑아 레이를 겨누었다.
츠즈즈즉!!
검 위로 검강이 발현된다.
길란트가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왕국민을 납치하고 고문하여 상해를 입힌 것은 중죄에 해당한다."
"내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악마 숭배자의 조력자를 색출했을 뿐이다. 이 마물의 사체를 제대로 보았다면 사안의 중대함은 인지했을 텐데?"
"사안의 중대함은 인정하나, 그것과 별개로 네게 왕국민을 심문할 권한은 없다. 무기를 버려라."
다 옳은 말이었다.
악마 숭배자를 쫓다가 벌어진 일이라 해도 레이가 벌인 일은 기사로서 용납할 수 있는 수위를 많이 넘어서 있었다.
레이 또한 애초에 상황이 잘 풀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은 힘의 논리로 끌고 가야 했다.
"..은십자 기사단은 금지된 숲의 조사 임무를 부여받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나? 나를 상대로 힘을 뺄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군."
트드드드득!!
레이의 서클과 코어가 동시에 회전했다.
마나의 기류가 터져 나오며 주변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공간을 뒤틀어낼 만큼 강렬한 마나의 기류에 기사단원들이 당혹스러워하며 주춤거렸다.
"...!"
길란트는 상대를 우습게 봤음을 자각하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상대는 중죄를 저지른 범죄자였다.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잡아야 했다. 그게 길란트의 의무이자 신념이었다.
"..."
레이는 길란트가 자세를 다잡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기사단을 때려눕히고 가지고 있는 정보를 빼앗는다? 그걸로 울트를 찾아낸다?
절대 현명하지 못한 무모한 선택이었다. 은십자 기사단이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알 수 없었고 말이다.
허나 레이에겐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허송세월 보내며 시간을 낭비하느니, 일단 들이받고 답 안 나오면 도주할 생각이었다.
레이가 깝깝한 심정을 감추고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때.
은십자 기사단 부단장 레오니가 뛰어나와 빽 소리쳤다.
"그만!! 그만!! 다들 무기 치워!!"
레오니의 돌발적인 행동에 길란트가 분노했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
"일단 무기 좀 치우라고요!!"
"지금 항명하는...!!"
길란트가 평소처럼 정색하며 레오니를 제지했다.
다음 순간, 그동안 참고 참고 또 참았던 레오니가 결국 폭발했다.
"아니!! 좀!! 말 좀 들어요 제발!! 마을도 없는 산기슭에 처박힐뻔한 걸 구해줬더니!! 응?! 진짜 산기슭으로 좌천되어 볼래요?! 응?! 혼자 풀이나 뜯으며 지내볼래액!!!"
도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