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슈코 (3)
183화
레이, 루나, 그리고 제트가 올다의 안내를 받아 금지된 숲을 찾았다.
말을 이용하기 적합한 지형이 아니었기에 걸어서 숲에 진입해야 했다.
금지된 숲 초입에 발을 들인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기가 탁한데...'
정확히는, 공기 중의 마나가 기이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원리 자체는 신성력과 유사한 건가...'
초월적인 존재의 영향력에 의해 변질된 마나들. 신성력 또한 그 범주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숲 외곽의 마나가 변질된 정도는 심각하지 않았으나, 심부까지 진입하면 상황이 달라질 게 분명했다.
표정이 굳은 레이의 일행을 향해 올다가 입을 열었다.
"좀 불쾌하죠? 숲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
레이가 침묵하자 올다는 머쓱해하며 앞서 걸었다.
길잡이답게 기척을 숨기는 솜씨는 괜찮아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직은 비교적 안전한 구역이었기에 올다는 레이의 눈치를 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마법사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숲은 조심해야 합니다."
레이가 되물었다.
"뭘 조심해야 되는데."
"당연히 마물들이죠. 그놈들이 사람을 가려가며 습격하진 않으니까요. 흐흐... 그래도 마법사님이 계시니 든든하네요."
"호프를 안내할 때는 어땠지?"
"호프는 좋은 고용주였어요. 실력이 좋았으니까요."
길잡이는 고용주 실력에 따라 목숨이 왔다갔다했다.
당연히, 성격이 좀 더럽더라도 실력 좋은 용병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호프라는 이름을 쓰는 용병은 실력도 좋았고, 다른 용병들에 비해서 언행도 신사적인 자였다.
"길 안내를 할 때마다 매번 너무 깊게 들어가서 무섭긴 했지만요."
올다는 호프, 그러니까 울트와 다녔던 이야기를 하며 전진하는 뱡향을 조금씩 꺾었다.
올다가 슬슬 긴장 어린 기색을 내비치며 낮게 말했다.
"제 뒤를 잘 따라오세요. 이 숲의 마물들은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경우도 많아서 조심해야 해요."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마물들을 어떻게 피하지?"
"마물이 무리를 짓게 되면 활동하는 영역이 생겨요. 각 무리들의 영역 사이를 잘 파악해서 지나가야 해요."
이 영역이란 건 영구적으로 유지되지 않고 시시각각 변했다.
때문에 길잡이들은 마물이 남긴 흔적을 통해 영역의 변동을 파악하고 서로의 정보를 공유했다.
이게 지도만 있다고 금지된 숲을 탐사할 수 없는 이유였고, 또한 길잡이인 올다가 지도를 경시하는 이유였다.
"일직선으로 걸으면 거리는 짧아지겠지만 마물들의 무리와 계속 마주쳐야 해요. 아무리 마법사님이 강해도 그건 비... 비..."
"비효율?"
"네! 비효율적이지 않을까...요?"
상식선에서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레이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올다가 조금 신난 얼굴로 마물들의 영역이 어떻게 나누어져 있는지 설명하다가, 문득 몸을 굳혔다.
저 앞에서 그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와일드호그였다.
"헉...!"
와일드호그는 두 마리가 짝을 이루고 있었다.
무리에서 잠시 떨어져 영역의 경계까지 온듯싶었다.
와일드호그가 아주 대단한 마물은 아니었다.
허나 올다는 레이의 실력을 두 눈으로 본 적이 없었기에 불안한 눈빛으로 레이를 쳐다봤다.
올다가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와일드호그가 레이의 일행을 향해 돌진했다.
"크르륵!!"
"하아..."
귀찮다는듯 한숨을 내쉰 레이가 지팡이를 대충 휘둘렀다.
지면을 타고 번진 냉기가 와일드호그에 이르러서 얼음 기둥으로 변해 치솟았다.
퍼억!
얼음기둥에 얻어맞아 공중에 떠오른 와일드호그를 루나의 바람 정령이 붙잡았다.
제트가 곧장 허공에 포박된 와일드호그를 향해 검기를 쏘아냈다.
비교적 연약한 와일드호그의 뱃가죽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쫘아악!!!
"크르르륵!!!"
와일드호그가 거품을 물고 허공에서 발악했다.
마물의 생명이 꽤나 끈질기다는 것을 오랜만에 확인한 레이가 스태프를 빙그르 돌렸다.
쩌저적!
지면에 남아있던 냉기가 와일드호그의 내장으로 파고들어 붉은 얼음꽃을 피웠다.
곧장 축 처지는 와일드호그를 보고 올다가 감탄했다.
"오오...!"
올다는 용병들 중에서 이리 쉽게 와일드호그를 잡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역시 마법사는 마법사라며 중얼거린 올다가 다시 앞서 걸었다.
레이는 숲을 거닐며 간간이 울트에 대해 질문했고 올다는 그럭저럭 잘 답했다.
"여기서 동쪽으로 더 가면 옛날에 숲에 존재했다는 도시의 흔적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요."
"다 발굴된 건가?"
"대부분은요. 가치가 없거나 옮기기 힘든 건 버려졌다고도 하고..."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곳은 울트가 관심을 가질만한 장소였다. 레이가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나아가는 길에 몇 번 더 마물과 마주쳤다.
긴 손톱을 무기로 사용하는 원숭이 형상의 마물은 꽤 위협적이었다.
허나 어떤 마물이든 레이의 일행에게 부상조차 입힐 수 없었다.
올다도 이제는 마물이 나타나도 여유롭게 마물이 반토막 나는 걸 지켜본 후 숲을 걸었다.
"후욱! 후욱!"
올다의 호흡이 많이 가빠졌다.
체력은 아직 한참 남아있었지만 변질된 마나의 밀도가 가파르게 상승하며 호흡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주변의 풍경 또한 숲의 초입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괴이하게 변형된 나무가 서로를 옭아맨 채 말라가는 모습이 쉽사리 눈에 비쳤다.
레이가 스태프를 매만지며 물었다.
"여기가 호프가 자주 이용한 길인가?"
"네네, 그렇습니다. 이쪽에 발굴되지 않은 유물이 있다는 소문이 여럿 있거든요. 제 고용이 끝난 후에도... 호프가 이 근방을 왔다갔다 한다는 소식을 간간이 들을 수 있었어요."
"너는 얼마나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지?"
"어... 길어도 10분 정도 걸으면 한계일 것 같네요. 더 깊이 들어가자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저 정말로 죽어요."
올다가 웃는 얼굴로 양해를 구했다.
받은 돈이 많지 않았으면 진즉 몸을 돌렸을 만큼 숲 깊숙이 들어왔다.
레이가, 올다를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누가 시켰지?"
"...네?"
"이번 일을 누가 시켰냐고."
"그...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우리 안내를 맡으라고 누가 시킨 거야."
"아...! 길드장님이 부탁하시더라고요. 귀한 손님이니까 잘 안내해달라고."
올다의 말은 사실이었다.
물론, 길드장이 몇 가지 말을 덧붙이긴 했다.
반드시 네가 직접 레이의 일행을 금지된 숲 안으로 모셔라. 호프와 함께 방문했던 숲의 가장 깊은 곳까지 그들을 안내해라.
올다는 길드장의 요구가 좀 구린 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올다가 금지된 숲으로 레이의 일행을 안내하는 사이.
누군가 레이 일행의 짐을 털거나, 레이 일행이 숲에서 귀환했을 때 습격할 준비를 마쳤을 수도 있었다.
허나 거기까지 올다가 걱정해줄 필요는 없었다.
만약 숲 내부에서 용병들이 레이 일행을 기습한다면 올다도 굉장히 위험해지겠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마물이 드글거리는 숲에서 인간끼리 전투를 벌였다간 양쪽 모두 목숨을 잃기 딱 좋았으니까.
하여튼 올다는 스스로에게 떳떳했다.
"무슨 문제 있나요?"
"길드장이 너에게 길안내를 부탁했다고?"
"근데... 제가 알기로는 마법사님이 먼저 호프가 고용했던 길잡이를 요구했다고..."
"길드장이 그리 말하던가?"
"네."
"그건 사실이지. 헌데, 네 머릿속의 그 괴상한 것도 길드장이 심었나?"
"네? 제 머리요?"
올다가 레이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얼을 탔다.
레이는 잠시 권능을 발현해 올다의 신체를 살피고는 고개를 저었다.
올다는 부모 없이 이곳에서 자라 험난한 삶을 살아온 청년이었다.
험한 곳에서 아득바득 살았던 만큼 선인(善人)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악인이라 매도할 수 있는 자도 아니었다.
레이가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마물의 기척이 가까이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금지된 숲의 상당히 깊은 곳까지 들어온 만큼 마물들 또한 훨씬 흉폭해져 있었다.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마물의 숫자가 이내 스물을 넘었다.
올다가 당황해서 뒷걸음질쳤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마물 무리가 돌아다니는 영역을 잘 우회해서 이곳에 도착했다.
헌데 너무나 갑자기 서로 종도 다른 다수의 마물이 레이 일행을 포위하듯 집결했다.
패닉에 빠져 비틀거리는 올다를 레이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올다, 죽기 싫으면 움직이지 말고 제자리서 가만히 서 있어."
"아... 네네!"
어쨌든 올다의 목숨줄은 레이였다.
올다가 두통을 느끼며 제자리서 몸을 낮췄다.
쿠웅!!
수십이 넘는 마물 사이로 체장이 10 m가 넘어가는 마물 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돌로 된 가죽을 두른 악어 같은 생김새의 마물이었는데, 루나는 그 마물을 보자마자 더는 기다리지 않고 화염구를 쏘아냈다.
사람 주먹 만한 크기의 화염구가 허공을 날아가-
콰아아아앙!!!!!!!!!!
마물의 머리 위로 안착하자마자 부채꼴 형태로 터져나갔다.
삽시간에 숲 일부가 불구덩이로 변하며 악어 같은 생김새를 한 마물이 검게 변색돼 바스러졌다.
예상을 한참 상회한 마법의 위력에 마물들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제트조차 한순간 식겁해서 루나를 돌아보았다.
루나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억지로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하는 시늉을 했다.
비장의 수라도 사용한듯한 반응에 그제야 제트는 상황을 납득하고 다시 마물에게 검을 겨누었다.
직후.
사방을 점했던 수십의 마물이 동시에 쏟아져 들어왔다.
레이가 스태프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지면을 쿵 찍었다.
그러자 얼음이 지면에서 솟구쳐 마물들의 진로를 방해하거나 허공으로 쳐냈다.
제트가 가장 가까이 다가온 와일드호그를 향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촤아악!!
날카로운 검기가 둘러진 검이 와일드호그를 거의 양단했다.
마물의 내장이 갈라진 가죽 사이로 주르륵 쏟아지다... 뚝 멈추었다.
"?!"
제트는 일순 소름이 돋았다.
뚝 멈춘 마물의 내장이 움찔 떨리더니 제트를 향해 내리꽂혔다.
"무슨!!"
콰가각!!!
제트가 직전까지 발을 디디고 있었던 지면이 깊게 파였다.
꾸드득...
내장을 쏟아낸 와일드호그의 형태가 기괴하게 변형되기 시작했다.
제트는 일단 뒤로 물러서며 와일드호그를 향해 검기를 방출한 후 주변을 살폈다.
사방에서 마물들이 마법에 상처를 입고도 달려들고 있었다.
그 귀기가 서린 돌진은 마물이라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공격성이었다.
자연스레 레이 일행의 진형이 전투력이 거의 없는 올다를 셋이 둘러싸는 형태가 되었다.
내장을 질질 흘리면서도 죽지도 않는 마물을 밀어내기 위해 셋이 분투하는 사이.
올다는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올다는 머리가 깨질것만 같은 두통을 어떻게든 참아보려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통증이 올다의 이성을 급격히 집어삼켰다.
'아, 아파...!!'
두통이 너무 심해지자 속까지 배배 꼬이며 구역질이 나왔다.
올다는 지금 얼마나 심각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지도 망각한 채 레이를 뒤에서 붙잡고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
'마, 마법사님, 도, 도와주...!!'
퉁!
올다가 손을 뻗은 방향으로 레이가 실드를 생성했다.
그 위로 루나가 올다를 감싸듯이 배리어를 전개했다.
상황을 이해 못 한 올다가 주먹이 타들어 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드를 쾅쾅 내려쳤다.
두통이, 두통이 너무 심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톱과 망치로 두개골을 으깨도 이리 고통스럽진 않을 거라고 올다가 되뇌는 순간 이마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콰아앙!!!!!
폭발이 일어났다.
레이의 실드가 벗겨지고, 루나가 전개한 배리어에 산산이 쪼개진 올다의 육편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을 예기치 못했던 제트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루나의 배리어가 해제되고, 루나의 배리어에 달라붙었던 육편이 지면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눈치채고 있었나. 감이 좋군."
마물들 사이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가 천천히 상대를 돌아봤다.
시푸른 핏줄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는 빼빼 마른 남자가 레이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래도 변할 것은 없다."
쿠구궁-!
지면이 진동하더니 거무스름한 장막 같은 것이 일대를 뒤덮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던 마물의 무리가 괴이하게 변형되며 괴성을 토해냈다.
"나는 리폴이라고 한다."
짧게 자기소개를 한 빼빼마른 남자가 손가락을 들었다.
"위대한 분의 대행자지."
콰가가가가각!!
무언가 신호라도 내린 듯, 변형된 마물들이 일시에 레이의 일행을 향해 짓쳐 들었다.
레이가 차갑게 굳은 눈으로 마물 너머의 리폴을 응시했다.
"제트."
"하명하십시오."
"신호하면 나한테 검 좀 던져줘."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