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슈코 (2)
182화
해가 거의 다 기울어 사방이 어둑하게 변했을 때쯤.
여관에 돌아온 레이의 일행은 한 층을 전부 빌려놓고도 방 한 칸에 모여 있었다.
레이는 의자에 앉은 채 휴식을 취하다가 감고 있던 눈을 반쯤 떴다.
열어 놓았던 창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홀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뱅이었다.
뱅이 아티펙트로 전개했던 은폐장을 해제하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 라스커를 추적해봤는데... 우리와 접촉한 직후 리오슈코 용병 길드 본부로 향했습니다."
'라스커'는, 레이에게 울트와 동행한 길잡이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한 용병의 이름이었다.
레이는 라스커를 있는 그대로 신뢰하지 않았기에 뱅을 붙여 두었었다.
"거기서 누구와 접촉했지?"
"길드장과 접촉한 것 같습니다."
"대화는 듣지 못했나?"
"예상보다 방비가 꼼꼼했습니다."
"음..."
리오슈코 용병 길드의 길드장이라면 이 근방의 권력자들과는 전부 연줄이 닿아있다고 봐야 했다.
단순히 길드장과 접촉한 것으로 무언가를 유추할 수는 없었다.
'일단 울트와 동행했다는 길잡이를 먼저 만나보고 판단할까...'
레이가 고민하고 있는데 뱅이 입을 열었다.
"레온."
"더 보고할 게 남았나?"
"그건 아닙니다만... 지금 정황을 보면 호프가 홀로 금지된 숲을 누비다 객사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 않겠습니까?"
"호프가 객사?"
"예,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던 제트가 거들었다.
"금지된 숲은 위험한 장소입니다. 동료 없이 심부까지 들어갔다가 마물에게 당했거나, 용병들의 미움을 사 함정에 빠져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솔직히 흔적을 찾기 힘들 겁니다."
둘의 주장을 들은 레이가 작게 웃었다.
뱅과 제트의 주장은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다.
금지된 숲을 홀로 돌아다니다 실종됐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종자가 마물에게 먹혔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울트의 실력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주장이었다.
'설마 마물 따위에 당했으려고.'
울트는 강자였다.
무식하게 전투만 잘하는 유형도 아니었다.
이 근방의 용병들을 전부 뒤져봐도 울트보다 노련한 자는 찾을 수 없을 터였다.
더군다나 울트는 대륙 전역의 미궁에서 확보한 온갖 아티펙트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아티펙트는 발레리우스가 남긴 유산이었다.
레이는 세리아의 진술을 통해 울트의 강함에 대해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뱅과 제트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했다.
울트는 마물이나 용병 따위의 기습에 객사할만한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어지간한 수준의 기사단이 통째로 몰려온다고 해도 울트라면 따돌리고 도주할 수 있을 거야.'
헌데도 울트는 모습을 감췄고 아직까지 소식이 끊겨 있었다.
이 주변에 울트를 살해하거나 울트를 붙잡아둘 만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레이는 최악의 경우, 고위 마족에 비견되는 존재의 출현까지 상정하고 있었다.
'접근이 차단된 마경화 된 땅에서 악마숭배자나 고위 마족이 개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어.'
대륙 전역에 악의가 번성하는 이때.
'금지된 숲' 정도의 환경이 갖추어진 공간을 뒤가 구린 놈들이 가만히 방치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금지된 숲은 레이에게 있어서도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위험한 공간이었다.
'...그래도 너무 쫄아있을 필요는 없지.'
만약 레이가 혼자 이곳에 왔다면 지금보다 훨씬 몸을 사렸을 것이다.
허나 지금 레이 곁에는 루나가 있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루나는 현재 어지간한 고위 마법사의 수준을 뛰어넘어 있었다.
레이는 루나의 보조가 있다면, 설령 에리다누스 급의 마족을 마주한다 해도 상대를 찢어죽일 자신이 있었다.
휘익!
레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다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열려 있던 창문을 지나친 누군가가 바닥에 안착했다.
방음 결계를 다시 펼친 레이가 거친 인상의 남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버즐인가?"
"그렇소... 아니, 그렇습니다."
버즐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레이가 버즐이란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왠지 얼굴이 좀 익숙했는데, 찬찬히 기억을 돌려보니 저녁 시간대에 와이번의 둥지에서 스치듯 보았던 용병이었다.
"아까 와이번의 둥지에서 용병들이랑 같이 있었지? 첩보대 소속이었군."
"어어... 아닙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
"그, 나는 그쪽 소속이 아닙니다. 서로 필요할 때 거래...같은 걸 하는 사이지."
"아, 현지 협력자였군."
제국이 훈련시켜 파견한 첩보대가 아니라, 첩보대가 현지에서 포섭한 협력자란 뜻이었다.
레이는 리오슈코에서 협력자를 부를 수 있는 방법만 코멧에게 들었던 탓에 협력자의 정확한 신원을 이제야 알아챘다.
레이가 버즐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현지 협력자라면 맨입으론 안 되겠군. 이번 일에 충실히 협조하면 사례는 톡톡히 하지."
레이가 왕국 은화를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버즐은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일단 은화를 챙겨 품 안에 넣었다.
"어떤 일 때문에 부르신 겁니까?"
"와이번의 둥지에 있던 용병 놈들의 동태는 어떻지?"
"무슨 의미신지..."
"호프가 값비싼 아티펙트를 지니고 있다고 떠들어 놨으니, 딴생각 품고 눈독 들이는 놈들도 꽤 생겼을 텐데."
"...!"
버즐은 그제야 레이가 운운한 '값비싼 아티펙트'가 일종의 미끼였다는 걸 깨달았다.
울트가 실제로도 귀중한 아티펙트를 다수 보유하고 있긴 했지만 버즐이 거기까지 알 수는 없었다.
레이가 버즐을 재촉했다.
"자꾸 머리 굴리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 굳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야겠나?"
"아, 죄송합니다. 어... 용병들 중 여럿이 모여 호프를 찾아보자고 의논하는 자들은 꽤 있었습니다."
"대놓고 떠드는 놈들이야 무시해도 상관 없어. 정말 호프의 행적을 알고 있는 자가 있다면 은밀히 움직이겠지. 수상한 행동을 하는 놈들이 있으면 따로 추적해서 보고해."
버즐이 레이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마, 마법사님, 저 혼자 수상한 용병들을 전부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알아. 첩보대에 추가 인원을 이곳으로 파견하라고 명령했으니 곧 널 도울 사람들이 올 거야. 그전까지는 여기 이 친구와 같이 일하도록 해."
뱅이 어둠 속에서 걸어나와 버즐과 거리를 좁혔다.
버즐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데 뱅이 아티펙트의 은폐장을 전개했다.
로얄가드 급이 사용하는 값비싼 아티펙트인 만큼 성능은 탁월했다.
눈앞에서 귀신처럼 모습을 감추는 뱅을 보며 버즐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레이가 정신을 못 차리는 버즐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이번 사안은 꽤 중요한 건이야. 잘 협력한다면 만족할 만큼 챙겨줄게. 근데..."
레이의 심장 주변에 위치한 코어와 서클이 동시에 회전했다.
강대한 힘을 품은 냉기가 주변을 잠식하며 마나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괴이한 압박감에 버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레이가 버즐을 똑바로 노려보며 경고했다.
"뒤통수를 쳤다간 사지를 찢어놓을 거야."
"...그,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잘해보자고."
레이가 표정을 풀고 버즐의 어깨를 쳐주었다.
*
다음 날 새벽.
뱅과 버즐, 그리고 추가로 파견된 첩보대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용병들의 감시와 추적을 위해 움직였다.
레이는 루나와 제트와 함께 길잡이란 자를 만나기 위해 와이번의 둥지로 향했다.
어느 쪽이든 걸리기만 해라. 그게 레이의 생각이었다.
와이번의 둥지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어제 대화를 나누었던 용병, 라스커가 레이의 일행을 마중했다.
와이번의 둥지의 입구는 아직 정문이 수리되지 않아 뻥 뚫려있었다.
이번엔 경비원의 제지 없이 와이번의 둥지에 입장한 레이가 빵을 주문해 집어먹었다.
생각보다 빵 맛이 나쁘지 않다고 레이가 중얼거리고 있자니 밖에 나갔던 라스커가 다시 돌아왔다.
"이 친구입니다."
레이가 고개를 들어 라스커가 소개해준 길잡이를 보았다.
길잡이라기에 나이가 지긋할 줄 알았는데, 상대는 기껏해야 20대 청년처럼 보였다.
레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자 라스커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이 친구가 이곳 토박이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숲을 돌아다녀 지리는 훤히 꿰고 있죠."
"...둘이서만 말 좀 나누고 싶으니까 자리 좀 비켜봐."
"네, 알겠습니다."
라스커가 곧장 물러났다.
레이가 길잡이라는 청년을 보고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올다라고 합니다."
"와서 앉아봐."
올다가 자리에 앉자 레이가 빵 바구니를 건네며 물었다.
"호프와는 언제 만났지?"
"어... 몇 개월은 넘었죠. 사실 오래 같이 다니진 않았어요. 그분은 혼자 움직이는 걸 좋아했거든요."
"호프를 찾는데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있다면 얘기해봐."
레이는 역시나 왕국 은화를 올다 앞으로 튕겨주었다.
은화를 챙긴 올다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도망자처럼 보이진 않았어요. 유적에 관심이 있는 듯 했죠. 근데 탐사가 덜 된 유적들은 대부분 숲 심부에 위치해 있거든요. 그렇다 보니 제가 안내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죠. 다른 길잡이도 마찬가지였고요."
"숲 심부까지 안내도 못 하는데 어째서 호프가 널 길잡이로 고용한 거지?"
"숲 외각의 지형은 제가 빠삭하니까요. 마물이 사는 곳이나 그런 것도 잘 알고 있고요. 소문 같은 것도 잘 알고 있고요."
"소문?"
"어느 방향으로 숲 깊숙이 들어가면 커다란 사원이 존재한다든가, 미궁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든가 그런 소문들요. 엄청 옛날엔 저 숲에도 사람이 사는 도시가 있었대요. 그거 때문인지 이런저런 소문들이 많아요."
"신빙성 있는 소문인가?"
"하하하... 다들 뜬소문으로 생각하지만 호프는 꽤 관심이 많아 보였어요."
"..."
울트야 당연히 미궁과 유물에 큰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자기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숲을 헤맸겠지.
레이는 잠시 고민하다 질문을 바꿨다.
"네가 길 안내를 했다면, 호프가 숲의 심부로 들어갈 때 어떤 길을 주로 사용했는지 알고 있겠군."
"네, 맞아요."
"설명해봐."
레이가 그다지 정확하지 않은 숲의 지도를 펼치자 올다가 난색을 표했다.
"저는 지도를 잘 볼 줄 몰라요. 직접 가서 지형을 보면서 설명해야 돼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고아였던 올다가 지도를 보면서 길을 배웠을 리는 없으니, 결국 목숨 걸고 용병들을 쫓아다니며 눈으로 익혔다는 소리였다.
"..."
레이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리더니 올다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권능이 발현되며 레이의 눈동자에서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약간의 두통을 느낀 레이가 잠시 눈을 비비며 침묵했다.
"...그래, 좋아. 직접 가보도록 하지. 호프가 주로 다닌 길을 안내해봐. 가는 길에 호프가 관심을 가졌던 뜬소문들도 말해보고."
"그 말씀은 마법사님께서 저를 길잡이로 고용하시겠다는...?"
레이가 은화를 하나 더 올다 앞으로 튕겨주었다.
올다가 히죽히죽 웃으며 은화를 받아챙겼다.
해가 떠 있는 사이 숲을 돌아다녀야 했으므로 레이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출발하지."
그리 말하는 레이의 얼굴은 누가 봐도 담담해 보였다.
레이는 이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레이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은 의심이 가는 자들이 꼭꼭 숨어버리는 것이었다.
허나 이렇게 먼저 나서서 수작을 부려준다면, 레이 입장에서 정말로 편했다.
수작을 부린 놈을 역순으로 밟아서 올라가면 뭐라도 나올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