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슈코 (1)
181화
리오슈코.
용병들의 도시라 불리는 만큼 꽤나 거친 기류가 흐르는 곳이었다.
도시의 규모가 거대해지며 이제는 나름대로의 규율이 만들어져 질서가 잡혔으나 그 근본은 어디 가지 않았다.
용병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리오슈코에는 몸을 파는 여자와 고아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도시에 돌아다니는 고아들이 전부 창녀의 태생은 아니었다.
용병이 멀쩡한 살림을 차렸다가 금지된 숲에서 죽어버리면 어미가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여튼 간에 고아가 된 아이들은 잡일을 하거나 용병들의 시다바리를 하거나 혹은 구걸을 해가며 삶을 이어갔다.
리오슈코에 진입한 후 별로 유쾌하지 못한 광경을 자주 접한 레이가 중얼거렸다.
"여긴 고아들이 넘쳐나는군..."
레이는 옛날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정도면 가히 꿀파밍 지대라 부를만했다. 레어 이상 확률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루나가 두리번거리는 레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리오슈코 산."
"..."
"레어 고아 찾아요?"
"...아니 잠깐만, 루나야."
레이가 너무 당황한 탓에 루나의 본명을 불렀다.
"루나야, 어, 어디서 그으런 나쁜 말을 배웠어? 어? 그런 나쁜 말은 쓰면 안 돼요."
"..."
루나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레이를 바라봤다.
물론 레이가 애들 앞에서 대놓고 노말 고아 레어 고아 운운하며 다니지는 않았다.
허나 루나는 완전기억에 가까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레이가 무심코 중얼거린 파편 같은 말들을 조합해 충분히 그 완성본을 유추할 수 있었다.
레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앞으로 아가리 좀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일단 말부터 맡기자."
레이가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나름 구색을 갖춘 여관에 말을 맡긴 레이의 일행은 용병들의 집결지이자 울트 또한 활용했다고 진술된 술집, '와이번의 둥지'를 찾아 걸었다.
허나 생각보다 도시가 넓어 길을 조금 헤매게 됐다.
레이가 길 한가운데서 애를 패고 있는 용병에게 물었다.
"이봐, 와이번의 둥지가 어디지?"
"이런 씨, 나 지금 바쁜 거 안 보..."
버럭 짜증을 내려던 용병이 레이 일행의 숫자와 기세를 살피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저기까지 걸어가서 왼쪽으로 꺾으면..."
용병이 나름 친절하게 길을 설명해주는데, 그 틈에 얻어맞고 엎어져 있던 아이가 벌떡 일어나 도망갔다.
용병은 아이에게 욕설을 토해내면서도 굳이 쫓아가진 않았다.
레이는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용병에게 물었다.
"애는 왜 패고 있었지?"
"소매치기요. 한눈파는 사이 내 돈주머니를 털어가려 했지."
"꽤 자비롭군그래."
레이는 정말로 그리 생각했다.
성격 괄괄한 용병을 잘못 건드리면 아이라고 해도 손목 날아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레이의 칭찬 아닌 칭찬에 용병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자비로운 게 아니라 이곳의 규율 때문이오."
아이를 죽이거나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치명적인 해를 가하면 안 된다.
그게 이곳의 룰이었다.
물론 아이라고 무조건 보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매치기 좀 했다고 마음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용병이 레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초행길인 것 같은데, 규율을 어기면 골치 아파질 거요. 그, 특히 와이번의 둥지에선 소란 일으키지 마시오."
"충고 고맙군."
레이가 금이 소량 섞인 동전을 하나 튕겨서 건네주고는 다시 길을 걸었다.
레이는 일단 얌전하게 와이번의 둥지를 살펴볼 생각이었다.
막무가내로 문제를 일으키면 괜히 더 일이 복잡해질 수 있다는 걸 레이도 모르지는 않았다.
"아, 여기네."
와이번의 둥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간판이 보였다.
굉장히 커다란 술집이었는데, 용병들의 시끌시끌한 소리가 밖까지 새어나오고 있었다.
레이가 정문으로 걸어가는데 거대한 덩치를 지닌 경비원이 레이의 일행을 가로막았다.
"넌 뭐야."
경비원이 레이의 얼굴을 훑었다.
레이의 얼굴은 마법으로 모습이 약간 변형되어 있었는데, 마법에 의한 위장을 감안해도 많이 어려 보였다.
경비원이 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용병패."
"용병패는 없고, 여기 신분증은 있다."
경비원이 피식 웃었다.
"이곳은 용병패를 가진 자만 입장 가능하다."
정확히는 리오슈코 용병 길드가 발행한 용병패를 가진 자만 입장 가능했다.
용병패를 얻기 위해선 리오슈코 용병 길드에 신분을 증명한 후 고참 용병들의 뒤치다꺼리를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해야 했다.
그 기간을 거치고 용병패를 얻어야만 경험 많은 용병들의 커뮤니티에 소속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레이는 그 절차를 밟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호프라는 이름을 가진 용병에 대해서 알고 있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경비원의 미간이 콱 구겨졌다.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아니면 용병패를 들고 오든가."
"호프라는 이름을 가진 용병에 대해서 알고 있냐고 묻잖아."
"이 새끼가 진짜..."
경비원이 덩치에 걸맞은 육중한 철퇴를 들어 올리며 레이를 위협했다.
그 꼴을 본 레이가 뒤에 서 있던 뱅과 제트를 돌아보며 낄낄 웃었다.
명백한 모멸이었다.
평소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던 경비원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레이의 어깨를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쩌억!
"?!"
나무로 된 스태프가 경비원의 철퇴를 막아섰다.
경비원은 단단한 바닥을 내려친 것 같은 반발력이 철퇴로부터 전해지자 크게 당황했다.
스태프를 들어 올린 레이가 까먹었던 주문을 뒤늦게 외웠다.
"하드 스틱(Hard Stick)."
"?"
뻐억!!
레이가 스태프로 경비원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후려쳤다.
경비 노릇을 하던 또 다른 용병이 달려왔으나 레이에게 닿기도 전에 제트가 뒷머리를 잡아 바닥에 찍어버렸다.
쿠웅!!
"에휴..."
한숨을 한 번 내쉰 레이가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조용히 볼일을 보기엔 글렀으니, 차라리 일을 키우는 게 빠르고 편했다.
스태프 위로 커다란 불구덩이가 생성됐다.
상황을 지켜보며 슬금슬금 다가오던 용병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레이가 망설임 없이 불구덩이를 건물의 정문을 향해 쏘아냈다.
콰앙!!
입구를 막고 있던 정문이 통째로 부서졌다.
레이가 쓰러져 있던 경비원의 멱살을 잡은 채 일행들에게 명했다.
"셋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뱅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도 아쉬운 얼굴로 입을 다셨다.
뱅은 이번 임무가 조금 더 비밀스러울 줄 알았다. 그렇기에 내심 기대를 가지고 준비를 단단히 했다.
예컨데 뱅은, 팔에 감고 있는 질긴 실로 언제든 사람을 은밀히 기절시키거나 살해할 수 있었다.
기사답지 못한 일이었지만 뱅은 음지에서의 활동에 대해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레이는 뱅의 기대와 다르게 은밀히 움직이긴커녕 대놓고 깽판을 치는 중이었다.
레이의 판단은 이해가 갔지만 뱅은 자기 실력을 선보일 기회가 없어 내심 아쉬웠다.
한편.
와이번의 둥지에 들어선 레이가 기절한 경비원을 집어 던지며 입을 열었다.
"자, 모두 주목."
레이가 그리 말한 직후 뒤에서 기습이 들어왔다.
레이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뒤꿈치로 땅을 쿵 찍었다.
화아악!!
냉기가 응축된 바람이 휘몰아치며 레이의 뒤를 기습한 용병을 벽 끝까지 날려보냈다.
쾅!!
몸이 반쯤 얼어붙은 용병이 기절한 채 바닥을 굴렀다.
레이에게 무기를 들이대려던 다른 용병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방금 바닥을 구른 용병은 엑스퍼트에 근접한 실력을 지닌, 용병 중에선 상당한 강자였다.
그만한 강자가 검도 한 번 못 휘두르고 쓰러졌으니 다들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꼴을 보고 레이가 피식 웃었다.
어깨에 힘 좀 주고 사는 용병들이라 해봤자 결국 이 수준이었다.
여기서 술이나 축내고 있는 놈들은, 과거 용병 일을 하던 지미와 비교해도 실력이 한참 아래였다.
지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용병이라면 이미 한 자리 차지했거나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귀족 엉덩이나 닦아주고 있을 터였다.
레이가 스태프로 바닥을 가볍게 찍었다.
"모두, 주목."
수근거림이 훅 가라앉았다.
레이는 로브 안을 뒤적거리더니 주머니를 하나 꺼내 뒤집었다.
촤르륵!
왕국 은화가 주머니로부터 쏟아져 바닥을 굴렀다.
레이가 코멧으로부터 뜯어낸 자금이었다.
"먼저, 소란을 부려서 미안하군. 사과의 의미를 담아 오늘 술은 내가 사도록 하지."
레이는 당근과 채찍을 둘 다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닥에 쏟아진 은화를 본 용병들이 적대감을 누그러뜨렸다. 용병 중 돈 싫어하는 자들은 없었다.
레이가 조금은 산뜻하게 변한 분위기를 느끼며 말했다.
"호프라는 이름을 쓰는 용병을 찾고 있다. 활을 귀신 같이 쓰는 남자야. 근데 그 새끼가 귀중한 아티펙트를 하나 들고 도망쳤거든. 그래서 내가 추적 중이다."
뚜벅뚜벅 걷다가 와이번의 둥지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춘 레이가 용병들을 둘러봤다.
"그 새끼를 추적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실종됐다더군. 내가 그놈을 반드시 잡아야 하는데... 혹시 호프의 행방을 알고 있거나, 호프와 최근까지 함께한 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 정보 값은 확실히 지불하도록 하지."
레이가 돈주머니를 하나 더 꺼내서 흔들었다.
용병들을 돈으로 꾀는 것은 꽤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호프에 대해 알고 있는 용병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허나 생각보다 도움이 되는 정보는 없었다.
호프가 대개 혼자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 이 근방에서 호프를 못 본 지는 시간이 꽤 됐습니다, 마법사 님."
"실력이 좋다기에 우리 파티에 합류를 권했는데 퇴짜 맞았다."
"야영을 하다가 마주친 적이 있긴 한데, 호프는 노련한 용병들도 발은 안 들이는 숲의 심부로 들어가곤 했소. 그러다 마물에게 잡아먹히지 않았겠소?"
"..."
레이가 미간을 긁적였다.
울트가 이곳에서 활동한 건 사실인 것 같지만 어쩌다 실종되었는지 명확한 정보가 없었다.
'하다못해 금지된 숲 중 정확히 어느 구간을 탐사했는지라도 알아야 되는데.'
레이가 고민하고 있는데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용병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마법사 님, 호프와 잠깐 함께 다녔던 길잡이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레이가 방금 소리친 용병을 향해 은화를 튕겨주며 물었다.
"그 길잡이는 어디 있어?"
*
사방이 가로막힌 넓은 광장 한가운데.
마주봤다간 두 눈이 타오를 것처럼 밝게 빛나는 빛의 기둥들을 향해 다가간 그림자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그 용병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
인간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빛의 기둥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수하에게 입을 열었다.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찾아내기 힘들 것이다."
"송구합니다."
"그만한 아티펙트를 지닌 자가 일개 용병일 리 없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되니,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감시하라."
"알겠습니다. 헌데... 그 용병을 찾는 마법사가 리오슈코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마법사?"
"예. 그 용병이 아티펙트를 훔쳐갔다고 주장하며 리오슈코를 뒤지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 보낸 거지?"
"청색 마탑 출신이라 하는데, 위장일 수도 있습니다. 일행은 총 넷이며, 다들 평기사 급 이상입니다. 어찌 처리할까요?"
"죽여라."
빼빼 말라 검붉게 퇴색된 손아귀가 앞으로 뻗어나와 무릎을 꿇고 있던 수하에게 푸른 구슬을 떨어뜨렸다.
"합일이 멀지 않았다."
만약 합일까지의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면 조금 더 신중한 대응이 필요했을 것이다.
허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 용병 놈의 정체가 무엇이든.
용병 놈을 찾아온 마법사가 누구의 명을 받고 움직이든.
목숨을 끊어 잠시만 입을 막아둘 수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곧 고대의 파멸이 다시 강림할 것이다."
알리모의 멸망이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