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모 (4)
180화
코멧이 레이를 바라봤다.
레이의 일행이 방문했을 때, 아지트에 술잔을 늘어놓은 채 방탕함을 드러내며 일 얘기를 미룬 것은 기싸움의 일환이 맞았다.
다만 코멧이 단순히 꼬장을 부리고자 이죽댄 것은 아니었다.
레이의 일행은 제국 정보국 소속도 아닌 프리슬란 가문의 관계자였다.
비정보국 소속의 인물을 해외에 추가로 파견되는 경우는 전례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레이의 일행이 지닌 전력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3서클 둘과 엑스퍼트 급 둘이면 어딜 내놓든 도움은 되겠지만 극적인 반전을 꾀할 수 있는 전력은 아니었다.
때문에 코멧은 레이의 일행이 정확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알리모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을 좀 보려고 했다.
실력, 성향, 그리고 목적 등을 살살 긁어가며 파악해볼 생각이었다.
레이의 일행이 지닌 특성에 따라 코멧의 대처도 달라졌을 것이다.
허나 지금 레이가 보여주는 모습은 코멧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마법사...? 아니면 기사인가?'
방금 리첼을 제압한 레이의 움직임은 엑스퍼트 급을 넘어서 있었다.
아티펙트를 착용하고 마법사 흉내를 내고 있는 기사든가, 혹은 신체를 단련하고 마법으로 움직임을 보조하는 괴팍한 배틀메이지란 소리였다.
서클과 코어를 둘 다 생성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말 정신병자나 하는 짓이었다.
'뭐가 되었든 상부에서 완전히 왜곡된 정보를 우리에게 주었군.'
레이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심지어 그 옆의 마법사는 정령사였다.
소환된 중급 정령만 둘이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더욱 거대한 기운을 지닌 정령이 천천히 실체화되고 있었다.
코멧은 그 정체가 상급 정령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파견된 넷의 전력을 합하면 그래듀에이트 한 명 내지 두 명 분의 역할은 소화할 수 있겠어.'
코멧은 자신이 제대로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정보국 소속도 아닌데다 어설픈 수준의 실력을 지닌 자들을 대체 왜 추가로 지원했는지 의아했는데, 전제부터가 틀렸었다.
이만한 고급 전력을 투입한 것을 보니 제국은 울트 가디의 확보를 꽤 강하게 원하는 것 같았다.
까가강!
코멧이 술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잔에 담긴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가 코멧의 귓가에 경종처럼 울렸다.
"..."
코멧은 술을 입에 털어놓고는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더는 대놓고 장난질을 해봤자 재미를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코멧은, 자신이 조금 쫄았음을 인정했다.
"...다들 자리 좀 비워봐. 넌 리첼 좀 데려가고."
첩보대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 코멧의 명령을 이행했다.
코멧은 자리가 정리되는 동안 술잔에 술을 다시 따랐다.
상황이 거북하긴 했지만 레이 쪽에서 먼저 선을 긋고 나왔으니 코멧 또한 협력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말마따나 코멧이 알리모에서 활동하며 밀수 쪽 일에 가담해 이득을 챙겼다고 해도 레이가 따지고들 이유는 없었다.
자리가 비워지자 코멧이 술잔을 레이에게 내밀었다.
"얼음 좀 더 넣어줄 수 있소?"
"여유를 부리는군."
레이는 그리 말하면서도 얼음 몇 조각을 잔 위에 떨어뜨려 주었다.
코멧이 얼음이 채워진 술잔을 받아들며 입을 열었다.
"울트 가디. 알리모에서 사용한 가명은 '호프'. 중년 남자, 검은 머리카락에 벽안. 전신에 흉터 다수. 엘프가 생각나게 할 만큼 활을 잘 쏘고, 신분을 위장한 채 용병으로 활동함. 오래된 유물과 미궁을 뒤지는 걸 좋아하고."
"그건 전부 우리 쪽에서 첩보대에게 전달한 정보잖아. 설마 다른 조사는 안 했나?"
"그럴 리가. 일단 '호프'의 행적을 추적해보긴 했는데, 용병 활동을 하다가 '금지된 숲'에서 행적이 끊겼소."
"금지된 숲?"
"오염된 숲이라고도 불리지."
레이의 표정을 확인한 코멧이 지도를 꺼내왔다.
"자자, 여기... 여기 말하는 거요."
알리모는 마경과 인접한 국가다.
남쪽으로 내려가 얕은 바다를 건너면 그곳이 바로 마경이었다.
바다 건너라고 해도 마경의 침식은 해저를 타고 이어져 알리모의 영토를 일부 오염시켰다.
마기에 침식되고 오염되어 마경화 된 지역을 금지된 숲, 또는 오염된 숲이라 사람들은 불렀다.
마경의 심부와 거리가 있어 오염이 아주 극심하진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은 장기간 생존이 불가능한 구역이었다.
"오염된 숲이 자리 잡은 지역엔 멸망한 국가가 남긴 흔적이 존재한다고 하오. 제국의 역사보다도 오래된 문명이지. 하지만 수복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보니 그냥 방치되고 있소. 호프는 그 근방을 탐사하다가 실종된 것 같소."
"그래서, 정확히 언제 어떤 지점에서 실종되었지? 마지막으로 접촉한 자의 신원은 확보했나?"
"아... 이보시오, 마법사 양반."
코멧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잘 들으시오. 금지된 숲은 흉흉한 이름과는 달리, 알리모에게 쏠쏠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자원의 보고요."
"자원의 보고?"
"아주아주 쉽게 표현하면, 마물 양식장이지. 금지된 숲은 마경에 가까운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보니 마물의 숫자가 쉽게 늘어나오."
예컨데 시그니 산맥에 비해서도 면적 대비 마물의 숫자가 금지된 숲 쪽이 10배 이상 높았고, 숫자의 회복도 빨랐다.
"그리고 마물의 사체는... 쓰임새가 많지. 왜, 그, 와일드호그의 창자로 만든 고급 피임구는 제국에서도 인기잖소? 그거 다 알리모에서 수입하는 거요."
레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허나 코멧은 거기까지 신경 쓰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만약 금지된 숲이 어느 날 갑자기 훅 사라지면 마물 사체의 공급이 뚝 끊길 것이오."
"그게 큰일인가?"
"큰일이지. 마물의 사체로 연구를 진행하던 마탑들도 비명을 지를 테고, 제국의 고급 창관들도 난리가 날 거요. 피임구를 빨아서 쓸 수도 없는데, 공급이 끊기면 어쩌란 말이오?"
레이는, 꽤 진지하게 물었다.
"...피임구를 빨아서 못 쓴다고?"
"그럼 뭐 피임구를 빨아서 재사용하오? 어떤 미친놈이? 어디 깡촌에서나 그러면 모를까."
"..."
레이가 잠깐 눈을 감았다.
레이는 눈을 감은 채 어린 날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렸다.
라일락의 저녁에서 사용된 와일드호그의 창자 조각을 냇가에서 세탁했던 추억 따위를 말이다.
냇가에서 창자 조각을 열심히 문질러 세탁하다 보면 안의 내용물이 안면에 튀는 불상사도 자주 발생했다.
그때마다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발작하곤 했지.
엉덩이 쪽에 사용했던 걸 맨손으로 빨았던 기억도 뚜렷이 남아 있었다.
"..."
레이는 기분이 굉장히 좆 같아졌다.
코멧은 주변 공기가 차가워진 것을 느끼며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레이는 자기 콧잔등을 매만지다 손을 휘휘 저었다.
"쓸데없는 얘기는 됐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금지된 숲은 알리모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고 있고... 그리고 많은 용병들의 밥줄이오. 요즘은 실력 좀 괜찮다는 용병은 많이들 알리모로 모여들고 있소. 그만큼 수익이 쏠쏠하지."
"근데?"
"이권이 많이 걸려있다 보니 자그마한 사건 사고는 덮고 넘어가려는 경향이 강하오. 사람이 금지된 숲에서 실종됐다? 다른 신경도 쓰지 않소. 괜히 캐내려고 여기저기 묻고 다녔다간 칼침 맞기 십상이지."
"그래서 첩보대도 칼침 맞기 무서워 놀고먹고 있었다고?"
"오해하지 마시오. 무분별하게 들쑤셨다간 첩보대의 신분이 탄로 날 수 있으니 소극적으로 움직였을 뿐이오."
"되지도 않는 변명을 빙빙 돌려가면서 말하는군."
혀를 찬 레이가 다시 물었다.
"하다못해 첩보대 인력을 파견해 금지된 숲을 뒤져보기는 했나?"
"소수의 첩보대원으로 금지된 숲을 직접 조사하는 건 너무 위험..."
"아, 그딴 변명 할거면 닥쳐. 울트... 호프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가 어디야?"
"...리오슈코 지역이오. 해당 지역에는 용병이 다수 상주하며 꽤 거대한 길드를 이루고 있소."
"그럼 거기부터 뒤져봐야겠군."
레이가 의자에서 일어서며 지도를 자기 품에 챙겼다.
"내 일행은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야. 울트 가디에 관한 자료를 아침까지 정리해놓고 말 네 필도 준비해놔"
일방적으로 통보한 레이가 등을 돌렸다.
코멧은 꽤 떫은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더는 따지지 않고 남은 술을 들이켠 후 일어섰다.
아침까지 쓸만한 말 네 필을 준비하려면 지금 움직여야 했다.
*
다음 날 아침.
레이는 울트에 관한 자료를 챙긴 채 말 위에 올라탔다.
코멧이 그늘 아래서 레이를 바라보며 갈등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레온."
"왜."
"금지된 숲에는 많은 권력자들의 이권이 개입되어 있소. 막무가내로 들쑤셨다간... 정말 피 볼 텐데."
레이가 피식 웃었다.
코멧이 저런 말을 하는 게 정말 레이를 걱정해서인지, 아니면 자기 안위를 위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좀 더 음흉한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레이는 알 수 없었다.
허나 코멧의 저의 따위를 레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다 보면 날 잡겠다고 찾아오는 놈들이 생기겠지."
"내 말이 그 말이오."
"그놈들까지 하나하나 조지다 보면 '호프'의 행방 정도는 찾아낼 수 있지 않겠어?"
"..."
코멧은 저게 뭔 미친 소리인가 싶었다.
레이가 상대해야 할 것은 그냥 양아치 무리가 아니었다.
귀족이나 그에 준하는 권력자들 다수가 금지된 숲에 관한 문제에 얽혀 있었다.
잘못 들쑤셨다간 기사단까지 움직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국가의 공적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헌데도 일단 들이박고 보겠다고?
코멧은 레이의 자신감이 이해가 안 갔다.
레이가 설령 그래듀에이트 급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곳은 알리모였다.
위험에 처했을 때 제국의 신속하고 제대로 된 지원 따위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땅이었다.
"레온... 여긴 제국이 아니오."
"그래, 제국이 아니지."
레이가 로브를 뒤집어쓴 채 낄낄거리다 정색했다.
"네 말대로 여긴 제국이 아니야."
이곳은 알리모다.
소드마스터도 없고, 대마법사도 없다.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일천 년의 권위를 지닌 황제와 같은 강력한 권력자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촌구석은 레이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만 가보겠다."
울트가 정확히 어떤 상황에 부닥쳐있는지 몰랐기에 레이는 괜히 늑장 부릴 생각이 없었다.
"코멧, 필요한 일이 생기면 부르겠다. 이번엔 신속히 움직이도록."
마지막으로 경고를 보낸 레이가 일행과 같이 말을 몰았다.
그 지나치게 오만하고 불손한 태도에 홀로 남은 코멧이 고개를 저었다.
*
리오슈코.
알리모에 존재하는 지역이자 도시의 이름이다.
리오슈코의 별명은 용병들의 도시였다.
먼 과거엔 초원이었다고 전해지는 리오슈코는 금지된 숲 덕분에 발달한 도시였다.
마물을 잡아 수익을 올리기 위한 용병들이 몰리기 시작하며 리오슈코는 번화하고 발전했다.
리오슈코의 가장 큰 술집, '와이번의 둥지'에선 오후부터 술냄새가 번져 나왔다.
금지된 숲은 밤에 굉장히 위험했기에 많은 용병들이 동이 뜨는 새벽에 숲에 진입했다가 저녁이 되기 전 일을 마치고 술집에 모이고는 했다.
제대로 한 몫 잡기 위해선 야영을 하며 숲 깊숙이 들어가야 했지만, 매번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와이번의 둥지'야 원래 번창하는 가게였지만 최근 마물의 출현이 늘며 용병의 숫자 또한 같이 늘어났기에 더욱 시끌벅적했다.
용병들은 떠들고 마시며 정보를 나누고 마물 사냥을 위한 파티를 재편성했다.
이번에 무슨 마물을 만나 사냥했다느니 누가 헛짓거리를 하다 다리가 뭉개졌다느니 용병들이 떠들고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폭음이 문밖에서 터졌다.
쿠웅---!
용병들의 말소리가 뚝 그쳤다.
서로 눈치를 보던 용병들이 무기를 잡고 일어서는데 다음 순간 와이번의 둥지의 정문이 터져나갔다.
쾅!!
터져나간 정문이 산산이 부서져서 바닥을 굴렀다.
정문이 사라진 입구 너머로, 기절한 용병 하나의 멱살을 잡아챈 레이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레이가 와이번의 둥지에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오롯이 레이에게 쏠렸다.
레이는 끌고 왔던 용병을 옆으로 집어 던지며 입을 열었다.
"자, 모두 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