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모 (3)
179화
레이는 요새를 떠나기 전 동행하기로 한 기사들과 다시 인사를 나누었다.
비교적 장신의 기사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뱅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본명은 아니었다.
위험 지역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진입하는 만큼 짧고 간결한 호칭을 새롭게 정했다.
뱅 옆에 있던 기사가 말했다.
"저는 칼이라고 불러주십시오."
"..."
잠시 침묵한 레이가 창문을 바라봤다.
어스름한 석양 너머로 어린 시절 만났던 칼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리파도 이제 혼기가 꽉 찼는데 나 없는 동안 괜찮은 남자를 잡았을까, 레이는 괜히 걱정됐다.
리파가 좋은 남편을 만나 가정을 차려야 칼도 안심하고 떠나지 않겠는가.
"...레이 님?"
뱅의 부름을 듣고 정신을 차린 레이가 뒤늦게 답했다.
"아, 그, 칼은 별로니까, 제트로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졸지에 칼에서 제트로 이름이 바뀐 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머리를 긁적이다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 '레온' 같은 걸로 할까요?"
"네, 그렇게 하시지요."
루나의 가명은 '룬'으로 합의한 레이가 뱅과 제트를 돌아봤다.
두 기사는 조력자이자 감시자였다.
분명 도움은 되겠지만 둘이 곁에 있으면 루나가 전력을 드러내기 껄끄러워졌다.
'기회가 되면 적당히 떼어놓는 게 좋겠어.'
죽이는 건 안 된다.
저 둘에게 문제가 생기면 에른스트의 의심을 살 테고, 또한 레이는 사람 죽이는 걸 결코 즐기지 않았다.
인사를 나눈 레이는 기사들과 함께 알리모에서 사용할 장비를 챙겼다.
에른스트가 준비해준 장비들 중엔 돌리면 검날이 튀어나오는 스태프 또한 있었다.
스태프의 상태를 점검해본 레이가 방호 기능이 존재하는 로브 형태의 아티펙트를 루나에게 건네주었다.
"자, 루나. 몇 개 더 얻어올 수 있으니까 개량하고 싶으면 해봐."
루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뱅이 날카롭고 질긴 실뭉치를 품에 넣으며 레이에게 조언했다.
"제국의 첩보대라고 해도 완전히 신뢰하시면 안 됩니다."
"네, 주의할게요."
타국에 파견된 첩보대는 중앙에서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게 불가능했다.
소속원을 갈아 끼우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 말이다.
때문에 첩보대를 원하는 대로 통솔, 처벌, 혹은 제지하는 것은 제국에게도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어떻게든 첩보대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제국의 저력을 방증했지만, 첩보대에게 뒤통수를 맞을 위험성은 무시할 수 없었다.
"뭐... 어쨌든 잘 부탁하겠습니다. 뱅, 제트."
"워프 게이트를 넘어가면 존칭은 완전히 생략하십시오. 레온 님이 저희의 상급자 위치이시니."
시간이 지나, 떠나기 직전 레이는 요새에 남을 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알레시아는 징징거렸고 카렌은 귀를 덥석 물었다.
요하나는 입으로는 틱틱거리면서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밖의 사람들과 인사를 끝낸 레이가 뱅, 제트, 그리고 루나와 함께 요새를 떠났다.
레이의 일행은 곧장 마차에 탑승해 워프게이트로 향했다
황도 인근에 존재하는 워프게이트는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에 있던 것과는 그 크기부터 달랐다.
거대한 워프게이트 앞에는 알리모와의 회담을 진행하기 위한 제국의 관리들과 그들을 보좌하는 자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레이의 일행은 제국이 알리모에 내리는 하사품이 실려야 하는 짐마차에서 호흡을 죽인 채 대기했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제국과 알리모 양쪽에서 워프게이트가 개방됐다.
제국이 알리모로 보내는 대규모 행렬이 워프게이트로 나아갔다.
"..."
루나는 눈을 감은 채 마법이란 학문이 만들어낸 가장 고등한 아티펙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느꼈다.
공간 계열 마법의 정수가 어떤 형태로 완벽히 실증되었는지 루나는 차근차근 그 흐름을 분석하고 기억했다.
츠즉-!
레이의 일행이 탄 마차가 워프게이트를 통과했다.
레이는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음을 느꼈다.
레이의 일행은, 황도로부터 한참 동쪽에 위치한 알리모에 도착했다.
잠시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마차 안의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레이가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관문인가.'
알리모가 건설한 관문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워프게이트를 수호하고, 워프게이트에서 허가받지 않은 존재가 나타났을 때 섬멸하기 위한 요새이다.
아무리 제국의 행렬이라 해도 아무 검증 없이 관문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이제 한참 동안 신원 확인 절차가 진행될 터였다.
그때 마차의 바닥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톡! 토도독! 토독! 톡!
약속된 신호가 울리자 레이의 일행은 방수복을 몸에 걸치고 마차 하단부를 열었다.
마차 하단부를 열자 땅이 깊게 파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깊게 파인 땅 아래에는 하수를 처리하기 위한 하수관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수관 윗부분에는 사람 하나가 통과할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뱅, 제트, 레이, 루나가 차례대로 구멍에 몸을 들이밀었다.
첨벙...!
썩은 물이 흐르는 하수관 속에 안착한 레이가 뒤이어 떨어지는 루나를 받아냈다.
레이는 발아래 떨어져 있던 하수관의 상부 철판을 구멍에 가져다 대고는 마법으로 대충 용접했다.
뚫려있던 구멍을 용접하자 하수관엔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수관 위쪽의 파인 땅을 은밀히 덮고 빈 마차를 새롭게 채우는 건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큽...'
하수관을 기어가기 위해 바짝 엎드린 레이가 신음을 삼켰다.
악취가 엄청났다.
숨을 조금만 들이쉬어도 일반인은 곧장 기절할 만큼 공기가 오염되어 있었다.
이곳의 악취에 비하면 요하나의 오래 입은 훈련복 가랑이에서 났던 냄새는 꽃향기라 부를 수 있었다- 따위의 생각을 하던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정신을 집중해야 할 때였다.
화악!
조금 전 마차의 하단부를 두드려 신호를 보냈던 첩보원이 불빛이 반짝이는 아티펙트를 꺼내 흔들었다.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기어가는 첩보원을 따라 레이의 일행 또한 오물이 뒤섞인 구정물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똥물을 뒤집어쓰고 전진하며 레이는 이를 꽉 물었다.
기사들이 몬스터 내장에 머리를 박거나 전생의 특수부대가 똥물에 입수하는 훈련을 받는 게 괜한 얼차려가 아니었다.
레이는 몸 쓰는 훈련을 적게 받은 루나가 걱정됐으나 루나는 의외로 레이의 뒤를 잘 따라왔다.
"..."
가장 앞서서 은밀하게 전진하던 첩보원이 발광 아티펙트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바로 앞에 결계가 있다는 의미였다.
쥐나 벌레들도 돌아다니는 하수구였기에 결계가 모든 생명체들을 감지해 마법사에게 경고를 보내지는 않았다.
저길 통과하기 위해선 생명체의 부피가 작아야 했고, 지닌 마냐량이 적어야 했으며, 또한 빠르게 지나가야 했다.
우웅-!
첩보원이 미리 준비한 길쭉한 아티펙트를 가동시켰다.
결계를 잠시 왜곡해 결계를 통과하는 물체의 부피를 훨씬 작게 인식시키는 아티펙트였다.
첩보원이 자기 심장 주위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고는 빠르게 기어 결계를 통과했다.
뱅, 제트, 그리고 레이가 코어의 움직임을 억지로 정지시킨 후 앞으로 나아갔다.
결계를 통과한 레이가 잠시 몸을 꺾어 루나의 손을 잡고 당겨주었다.
그꼴을 썩 한심하게 바라본 첩보원이 다시 앞서 기었다.
모두가 숨도 거의 못 쉬고 나아간 끝에 빛이 새어 들어오는 장소에 도착했다.
첩보원이 하수구 상부를 박자에 맞추어 퉁퉁 치자 대기하던 다른 첩보원이 철판을 열어주었다.
철판이 열리며 별빛이 더욱 강하게 쏟아졌다.
"후욱, 후우..."
레이가 구멍을 빠져나온 후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레이의 일행과 첩보원들은 하수구 구멍을 용접하고 땅을 덮은 후 방수복을 벗어 밀봉했다.
뒤처리를 마치자 첩보원이 준비해놨던 마차를 향해 손짓했다.
어서 타라는 의미였다.
레이의 일행은 어두컴컴한 마차의 짐칸에 올라탔다.
마차는 곧 도시로 진입했다.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알리모의 수도는 아니겠고... 인근 도시겠군.'
이번에 통과한 워프게이트가 알리모의 수도 인근에 설치되어 있었다.
한 국가의 수도 인근인 만큼 주변 도시 또한 발전되어 있었다. 황도에 비하면 촌구석이었지만 말이다.
"이봐!"
"...!"
밖에서 누군가가 억지로 마차를 멈춰 세웠다.
뱅과 제트가 긴장을 끌어올린 채 검자루를 쥐었다.
마차를 끌던 마부가 마차를 멈춰 세운 위병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다른 게 아니고, 저번에 건네줬던 술이 꽤 괜찮던데."
위병은 마부가 속한 조직이 밀수했던 술을 몇 병 받아챙겼던 일을 언급하며 낄낄댔다.
마부는 능숙하게 맞장구를 친 후 위병에게 돈 몇 푼을 쥐여주었다.
위병은 마부의 마차 안에 평소처럼 '밀수품' 따위가 실려 있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관례대로 적당히 용돈만 챙긴 후 보내주었다.
다시 마차가 이동했다.
마차가 복잡한 골목길을 지나가던 순간 문이 살짝 열렸다.
첩보원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켰다. 내리란 소리였다.
툭...!
다들 소리 없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마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한편 레이의 일행은 골목 사이에 숨겨져 있던 지하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레이는 아프텔의 도움 덕에 이곳이 정교하게 짜인 감시와 방음 결계로 덮여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길을 안내해준 첩보원이 평범해 보이는 나무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열리자 흡사 술집처럼 꾸며져 있는 첩보대의 아지트가 드러났다.
"도착했다."
관문에서부터 내내 말이 없던 첩보원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바텐더가 서 있을 법한 위치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남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안녕하시오. 펄거림에 온 것을 환영하오."
펄거림은 알리모의 수도 인근에 위치한 도시 이름이었다.
레이가 상대를 바라봤다.
"당신이 이곳의 지부장인가?"
"음... 그리 높은 사람은 아니고, 부지부장쯤 되려나. 코멧이라 부르시오. 그쪽은?"
레이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술병이 올려져 있었고 담배 냄새가 퀴퀴했으며 카드 오락을 즐긴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턱을 매만진 레이가 코멧에게 물었다.
"...울트 가디에 관한 조사는 진척이 있었나?"
"아직 진행 중이오. 시간이 늦었으니 일 얘기는 내일 하지. 몸도 좀 닦고 말이야."
레이의 일행이 하수구에서 밴 악취가 아직 남아있었기에 아지트에 있던 첩보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는 가만히 코멧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조사한 자료부터 정리해서 우리와 공유해라. 미흡해도 상관 없다."
"일단 좀 씻고 오라니까 왜 이렇게 안달이 나셨나, 우리 마법사 양반은?"
코멧이 낄낄 웃더니 레이의 일행을 둘러봤다.
3서클 마법사가 둘. 엑스퍼트 급 기사가 둘.
얕볼 상대는 아니었지만 대단한 전력도 아니었다.
넷 모두 정보국 소속도 아니라고 하니, 코멧은 제국이 울트 가디에 관한 사안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단편적으로 보면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
코멧은 레이의 일행을 둘러보다 뱅과 눈이 마주쳤다.
코멧은 뱅의 눈빛으로부터 경멸, 분노, 그리고 비웃음을 읽었다.
약간 불쾌해진 코멧이 다시 레이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레이가 코멧을 향해 스태프를 겨누고 있었다.
명백한 위협이었다.
카앙!!
첩보대에 속한, '리첼'이란 가명을 사용하는 여자가 신속하게 레이의 스태프를 쳐냈다.
지팡이를 놓친 레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리첼을 향해 맨손으로 덤벼들었다.
리첼은 레이가 우스웠다.
기껏해야 3서클, 스태프의 보조까지 필요한 마법사가 무엇을 믿고 이리 까부는가.
리첼은 마법의 발현에 주의하며 검을 적당히 휘둘렀다.
어깨를 깊게 베려는 생각이었는데, 레이의 오른손이 휘둘러지던 리첼의 검신을 붙잡았다.
쩌적-!
"?!"
레이의 손에 붙잡힌 검신의 중앙에 마나의 밀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리첼이 어떻게 대처도 하기 전에 검신이 뚝 부러지며 옆으로 튕겨 나갔다.
리첼은 부러져 나간 검신이 첩보대 동료의 어깨에 박히는 모습을 보았다.
거기까지가 리첼이 정확히 기억하는 마지막 광경이었다.
쩌억!!!!
어느새 리첼의 뒷머리를 휘어잡은 레이가 리첼의 안면을 나무 선반에 가져다 박았다.
레이는 리첼의 뒷머리를 움켜쥐고는 옆으로 주르륵 밀고 나갔다.
거칠게 쪼개진 나무 조각들이 쉽사리 리첼의 피부를 꿰뚫었다.
그꼴을 보고 덩치 큰 첩보원 한 명이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덩치가 레이에게 닿기도 전에 늑대 형상을 한 바람 정령 두 마리가 나타났다.
콰악!!!
"끄악...!!!"
덩치가 정령에게 어깨와 다리를 물린 채 바닥을 굴렀다.
카가가강!!
여기저기서 칼이 뽑혔다.
제대로 싸움이 붙으려던 순간 코멧이 손을 들어 올렸다.
첩보원들이 코멧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렸다.
그 와중에 레이는 거의 기절한 리첼의 안면에서 신경질적으로 나무 조각과 살점을 뜯어냈다.
"아이씨..."
핏물이 묻은 손을 더럽다는 듯 털어낸 레이가 품에 있던 포션병으로 리첼의 머리를 내려쳤다.
까앙!!!
포션을 뒤집어쓴 리첼이 바닥 위에 털썩 쓰러졌다. 완전히 기절한 듯 미동도 없었다.
레이는 짜증이 가득 담긴 얼굴로 혀를 차고는 기다란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봐."
레이가 코멧 가까이 있던 술잔 두 개를 자기 앞으로 끌고 왔다.
마법이 발현되더니 굵은 얼음이 허공에 몇 개 생성되어 잔 안에 떨어졌다.
레이가 이번엔 코멧 가까이 있던 술병을 손에 쥐었다.
"나는 네놈들이랑 기 싸움이나 하며 시간 때우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술병을 몇 번 흔들어본 레이가 술잔에 술을 따랐다.
"너희들을 감찰하러 온 것도 아니지. 포션보다 값비싼 술과 담배가 어디서 났을지 나는 관심 없다고. 알아들어?"
술잔 두 개가 가득 찼다.
레이가 술잔 하나를 코멧을 향해 밀었다.
"나는 울트 가디만 찾아서 데려가면 돼. 그놈만 잡아오면 된다고. 그리고 여길 떠날 거야."
레이는 술잔을 입에 댔다가, 또 무엇이 수틀렸는지 있는 힘껏 술잔을 벽에 던졌다.
파각!!
잔이 깨져나가며 술과 유리 파편이 바닥을 뒹굴었다.
레이가 자기 머리를 쓸어올리며 코멧을 응시했다.
"최소한만 협조하면 니들이 여기서 무슨 작당을 꾸미든 신경 안 쓸 테니까, 그놈에 관해 조사한 정보나 내놔. 혹시 아무것도 안 알아봤나?"
"..."
레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코멧이 자기 앞으로 미끄러진 술잔을 잡았다.
술잔에 담긴 얼음이 진동하며 맑은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