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모 (2)
178화
황제는 간접적으로 체험한 타인의 경험 중 카시야스에 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황실의 기밀 자료에도 카시야스와 레시나에 관한 기록이 일부 남아있었기에 황제는 가디 자작가가 어떤 사연을 지니고 있는지 대략 알고 있었다.
세계수의 신기에 관한 정보는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런 물건이 가디 자작가에 존재한다고 해도 정황상 이상할 게 없긴 했다.
허나 그게 황제에게 있어 중요한 사안은 아니었다.
기능을 대부분 상실했다고 여겨지는 세계수의 신기 따위 제국에 그리 가치 있지 않았다.
악용될 여지가 있다고는 하나 뚜렷이 와 닿는 게 없었다.
더군다나 황제는 노쇠했다.
황위 계승 문제를 처리할 기력도 부족한 차에 잡다한 사안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경이 거부하지 않는다면, 이 사안에 관해서는 경에게 일임하겠네. 정보국에 협조를 명해 놓을 테니 경의 뜻대로 처리하게."
"세계수의 신기를 회수하는 데 성공한다면..."
"판단은 경에게 맡기겠네. 중대한 사안이라 생각되면 포이보스와 논의하게. 그때쯤이면 황태자가 황위를 계승했을 것이니."
"...알겠습니다, 폐하."
에른스트가 예를 갖춘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쇠한 황제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
프리슬란 가문 요새의 집무실 내부.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레이를 향해 에른스트가 입을 열었다.
"필립스 백작령에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엘프를 하나 관측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큽..."
레이가 찻물을 뱉어내지 않기 위해 입을 콱 다물었다.
에른스트는 그런 레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도 네가 말한 '저주'의 영향 탓이냐?"
"..."
그 망할 년이 아직도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구나.
레이는 속으로 미네르를 씹으면서도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네르의 은신이 발각된 게 티티로부터 저주가 옮은 탓이었으니, 네 발로 기어 다니게 된 게 저주의 영향이 있긴 했다.
합리화를 마친 레이는 찻물을 마저 삼키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에른스트가 굳이 미네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필립스 백작령에도 자기 사람이 심어져 있으니 혹시 이상한 마음 먹지 말라는, 그런 경고를 돌려서 말한 것이다.
레이는 그걸 크게 불쾌하게 여기진 않았다.
이 정도 압박과 감시야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용납 가능한 범위 안의 일이었다.
'하하... 지금 당장 에른스트가 나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드물긴 하겠네.'
에른스트는 이래저래 레이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었다.
더군다나 레이가 시한부 신세인 걸 알고 있으니, 권력을 탐할까 견제할 필요도 크게 느끼지 못할 터다.
그런 의미에서 에른스트에게 레이는 대단히 신뢰할만한 카드였다.
레이가 목을 가다듬고는 물었다.
"저를 알리모로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현지의 제국 첩보대와 접촉할 수 있게 해주겠다."
"감사합니다."
"좋아하긴 이르다."
"예?"
"타국에 파견된 첩보대는 제국이 통제할 수단이 부족하다.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그 친구들이 말을 잘 듣진 않겠군요."
"그래. 활동하는 시늉만 하고 중앙의 명령을 어기거나 임의로 행동하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다. 현지와 동화되어 배반할 가능성 또한 항시 고려해야 한다. 더군다나 너는 정보국 소속도 아니지. 우습게 보일 가능성이 높다."
"기선 제압이 필요할까요?"
"직접 판단해라. 또한 어떤 상황에 처하든 방심하지 말고, 누구도 깊게 신뢰하지 마라."
"주의하겠습니다."
레이가 모로스를 에른스트에게 내밀었다.
"..."
제국의 신검을 양도받은 에른스트가 모로스를 아공간에 수납했다.
잠시 침묵한 에른스트가 레이의 허리춤에 매여 있는 오메가 시리즈를 눈짓했다.
"가져와 보거라."
"예."
레이가 곧장 검을 풀어서 건네자, 에른스트가 오메가 시리즈를 탁자 위에 있던 은색 케이스에 집어 넣었다.
에른스트가 케이스를 닫으며 레이를 바라봤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1회용 아공간 수납 아티펙트다."
레이는 상당히 놀랐다.
1회용 아공간 수납 아티펙트는 이름 그대로의 기능을 가진 아티펙트였는데, 한 번 아공간에 진입시켰다가 빼내면 아티펙트는 산산조각 나지만 안쪽에 보관된 물건은 보호 가능했다.
무기 소유가 불가능한 작전에 활용되는, 존재 자체가 기밀에 가까운 아티펙트였다.
에른스트는 덤덤하게 은색 케이스 두 개를 레이에게 건넸다.
"나는 네가 객사하지 않기를 바란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기사 둘을 붙여주겠다. 실력은 변변치 않으나 임무에 나섰던 경험이 많으니 네게 도움이 될 것이다."
에른스트가 신호하자 기사 두 명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둘 모두 에리다누스와의 전투에서 활약했던 기사였기에 레이와 초면이 아니었다.
두 기사는 에른스트에게 먼저 예를 갖추더니 레이에게도 지극히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에른스트가 기사를 다시 내보낸 뒤 물었다.
"푸른 머리의 여아와 같이 가겠다고 했느냐? 마법사가 필요하다면 구해주겠다."
"아뇨, 괜찮습니다. 루나는 제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실력도 출중합니다."
"...알겠다."
에른스트는 루나가 상급 정령 둘을 동시에 다루는 걸 직접 보았다.
마법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상급 정령 둘이면 거의 그래듀에이트에 근접한 전력이었다. 범용성은 훨씬 나았고 말이다.
"위장 신분은 둘 다 3서클 마법사로 준비해주겠다. 현지의 첩보대도 그리 알고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떠날 준비를 하여라."
레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
매일 하는 훈련을 마친 요하나는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던 요하나는 잠시 갈등하더니 훈련장을 다시 찾았다.
방금까지 입었던 훈련용 바지가 훈련장 벽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
요하나가 축축하게 젖은 훈련용 바지를 슬그머니 집어들었다.
얹혀살고 있는 상황에서 훈련용 가죽 바지까지 매일 빨거나 새것으로 교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요하나는 세탁되지 않은 훈련용 바지를 며칠이고 반복해서 입었다.
훈련용 바지가 땀내에 절여지는 건 필연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걸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 며칠 전에 큰 사고를 쳤던 요하나는 괜히 바지 상태가 걱정됐다.
"..."
슬그머니 바지의 가랑이 사이를 벌려본 요하나가 조심스레 코를 가져다 댔다.
"케흑!"
기침을 토한 요하나가 두 눈을 콱 감았다.
바지를 손에 쥔 채로 머리를 쥐어 싸맨 요하나가 제자리서 쾅쾅 뛰었다.
"진짜 미쳤나봐, 미쳤나봐아...!!!"
그야말로 숙성되고 농축된 냄새가 바지에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걸 레이의 안면에 그대로 가져다 비빈 것이다.
요하나가 자기 혼자 부들부들 떨며 괴로워하는 사이 훈련실 문이 벌컥 열렸다.
"요하나, 여기 있었구나!"
알레시아가 반가워하다가 요하나가 손에 꽉 쥐고 있는 훈련용 가죽 바지를 보았다.
호기심이 동한 알레시아가 요하나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그건 왜 손에 쥐고 있느냐?"
"네? 그, 그게..."
요하나가 어버버하는 사이 알레시아가 슬그머니 바지에 코를 가져다 대고 킁킁거렸다.
직후 흐물흐물하게 변한 알레시아가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훈련복이라지만 좀 빨아입거라아..."
"아, 알아요!! 근데 여기는 왜 찾아오신 거예요?"
"아! 레이가 우리를 찾는구나!"
"레이가요?"
"그래, 따라오너라."
알레시아가 요하나를 끌고 젠킨슨의 병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필립스 백작령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레이는 요하나까지 도착하자 간단하게 자기 상황을 설명했다.
"가디 자작님께 문제가 좀 생겼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나랑 루나가 외부에 나갔다 올 거야."
젠킨슨과 디디에가 불편한 표정을 했다.
울트 가디에 관한 일로 레이만 멀리 나가서 위험을 감수하는 게 두 기사에겐 부끄러웠다.
허나 젠킨슨과 디디에가 알리모에 동행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둘 다 가만히 레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돼서, 돌아오려면 몇 달 정도 걸릴 것 같아. 나 없는 동안 문제 일으키지 말고 잘 지내고 있어. 아, 그리고 여기서 했던 얘기는 당연히 비밀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떠들지 말고."
카렌과 알레시아가 나란히 풀 죽은 얼굴을 했다.
아이들이 돌아가며 떠나지 말라고 말려봤지만 레이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레이는 빠르게 자기 할 말만 마치고 병실에서 나왔다.
곧장 방으로 돌아가려는 레이를 요하나가 뒤에서 불렀다.
"레이."
"어, 요하나. 왜 불렀어?"
"...루나는 데려가는데 난 왜 안 데려가?"
예상치 못한 요하나의 질문에 레이가 조금 당황했다.
떨떠름해 하는 레이에게 요하나가 쏘아붙였다.
"내 실력이 부족해서 그래? 내가 루나만큼 뛰어나지 못해서? 그래서 루나만 데려가는 거야?"
"음..."
레이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답했다.
"꼭 실력 때문은 아니고..."
요하나는 이 요새에 머물며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검술을 새롭게 배우고, 훌륭한 기사들과 대련하고, 또래의 라이벌과 검을 나눔으로써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허나 루나는 그게 아니었다.
루나에게 더는 새로운 지식이나 선생 같은 게 필요하지 않았다.
루나에게 부족한 것이라 해봐야 스스로를 갈고 닦을 시간과 '다양한 경험'이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앞으로 자신이 움직일 때 루나를 웬만해선 대동할 생각이었다.
"그... 요하나, 너는 여기서 아직 배울 게 많잖아. 루나는 아니고. 그래서 그래."
"...꼭 그렇게 몸도 다 안 나았는데 싸돌아다녀야 해?"
"야이씨, 싸돌아다닌다니."
"싸돌아다니는 거 맞잖아. 난 네가 이해가 안 가. 그냥... 그냥 필립스 백작령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지내면 안 돼? 왜 자꾸 고생을 사서 해?"
요하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강해지는 것도 좋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지만... 나는 필립스 백작령이 가장 좋아. 옛날처럼 아무 걱정 없이 친구들이랑 웃고 떠들면서 지낼 수 있다면 강해지는 것도 맛있는 음식도 포기할 수 있어."
"요하나, 추억에 매몰되서는 안 돼. 그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그러면 왜 안 돼? 왜 꼭 앞으로 나아가야 해? 힘들게?"
레이가 피식 웃었다.
언뜻 철없어 보였지만, 요하나의 마음이 레이는 십분 이해가 됐다.
레이도 전생에 대학이야 손에 꼽히는 곳을 들어갔지만 그 후로는 거의 설렁설렁 살았다.
아득바득 남들과 경쟁해가며 스트레스받는 게 영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하나도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단한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도 그걸 굳이 개화해야 할 의무는 없지 않은가.
레이 또한 그리 생각하기는 했지만...
"세상이 험난해서 그래."
불행히도 이곳은 멸망이 예정된 세계였다.
"요하나,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세상에 잡아먹히게 될 거야. 그래서 그러는 거야."
요하나는 지금까지 잘해왔다.
입으로는 툴툴 대면서도 쉬지 않고 전진해 왔다.
그렇기에 레이는 앞으로도 요하나가 잘해줄 것이라 신뢰했다.
"열심히 하고 있어. 되도록 빨리 돌아올게."
"...이번엔 다치지 마."
요하나는 가득 차오른 불만 탓에 안면을 이리저리 일그러뜨리면서도 걱정을 내비쳤다.
레이가 입꼬리를 올린 채 손을 뻗었다가, 요하나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다시 내렸다.
그 순간 요하나가 레이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잡아챘다.
레이의 손을 꽉 쥐어 자기 머리 위에 올린 요하나가 짜증이 깃든 눈으로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가 낄낄 웃으며 요하나의 머리카락을 헤집은 후 등을 돌렸다.
이제 알리모로 가서 울트의 멱살을 잡고 끌고 와야 했다.
*
"추가 인원이 파견된다고?"
"네, 정보국 소속도 아니라는데요?"
"에휴..."
머리를 벅벅 긁은 남자가 서류를 살폈다.
글씨를 읽다 보니 절로 짜증이 올라왔다.
"실종된 변방 귀족을 찾아야 한다고? 신분을 속이고 알리모로 입국했다가 실종돼? 하아... 별 같잖은 일로 귀찮게 구네."
"어떻게 할까요?"
"따르는 시늉은 해야지. 새로 온다는 놈들은 여기 도착하면 적당히 일없는 곳에 뺑뺑이 돌리다 돌려보내. 정보국 소속도 아니라며."
"흐흐, 알겠어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 후 탁자 중앙의 카드를 하나 새로 뽑았다.
꽤 높은 패가 만들어졌기에, 여자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