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모 (1)
177화
"..."
에른스트가 허리를 숙이고 있는 레이를 바라보다 눈을 아래로 내렸다.
집무실 탁자 위에 제국의 신검이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에른스트는 레이를 요새에 가둬두다시피 했지만 모로스만큼은 마지막까지 레이에게 맡겼다.
아공간 수납이 가능해 은밀히 외부 반출이 가능한 모로스를 레이에게서 강탈하지 않은 건 레이와의 신의를 쌓아가기 위한 포석이었다.
레이 또한 에른스트의 뜻을 모르진 않을 터다.
그럼에도 대놓고 모로스의 소유권을 양도하겠다고 내밀었다는 건...
"일단 이야기를 들어는 보마."
에른스트가 허락하자 레이가 입을 열었다.
"필립스 백작령 가까이 있는 디나르 지역을 영지로 가진 가디 자작이 '알리모'에서 실종되었습니다."
"네 부탁이라면 그의 행방을 조사해주겠다."
다시 한 번 모로스를 내려다본 에른스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직접 알리모로 가서 가디 자작을 찾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럴 이유가 없다."
"가디 자작가의 선조는 600년 전의 전쟁 영웅 카시야스입니다."
에른스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레이가 허리를 숙인 채로 계속 말을 이었다.
"가디 자작가는 세계수의 저주를 받은 레시나의 핏줄을 보호하라는 선조의 유지를 오랜 시간 지켜왔습니다."
"..."
"다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울트 가디는, 세계수의 가장 강력한 신기이며 한때 레시나가 사용했던 병기인 '게네시스'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세계수의 저주로 인해 그 기능과 의미가 대부분 퇴색되었다고는 하나,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게네시스... 레시나가 사용했던 세계수의 뿌리를 칭하는 건가?"
"예, 맞습니다. 알리모는 마경과 가깝습니다. 게네시스가 악한 세력에게 흘러들어 가면, 악용될 여지가 충분합니다."
"..."
가디 자작이 정말로 게네시스를 소유하고 있다면 마냥 하찮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레이는 고민에 잠긴 에른스트를 향해 가디 자작의 신변과 게네시스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만히 레이를 바라보던 에른스트가 입을 열었다.
"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경시할 사안은 아니다. 허나 네가 직접 움직일 필요는 없다. 제국엔 너보다 경험 많고 교활한 요원들이 많다."
"예, 옳은 말씀이십니다. 전 아직 어설픈 면이 많습니다. 허나 제국이 가용 가능한 전력 중에 로드 급을 제외하면 제가 가장 강합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로드 급만 제외하면 레이를 정면에서 막아낼 수 있는 개인은 손에 꼽히거나, 없었다.
탁자를 툭툭 두드린 에른스트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너만한 전력을 제국이 움직여야 하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이번 사안은 경시할 수 없고, 마경과 인접한 알리모는 위험한 장소입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더욱 그렇지요. 만약을 대비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레이는 낯부끄러운 감정을 내비치면서도 마지막 근거를 들었다.
"제가 영웅의 후손이 이끄는 필립스 백작령과 가디 자작령 인근에서 태어난 게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게 제 운명이자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
"울트의 신변을 확보하고 게네시스를 회수하겠습니다. 그리해서 미래의 재난을 미연에 방지하겠습니다. 제국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에른스트는 꽤 오랜 시간 침묵했다.
레이는 가만히 허리를 숙인 채 에른스트의 판단을 기다렸다.
에른스트는, 모로스의 검면에 새겨진 글귀를 눈에 담은 채 고민하다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알리모에서 작전 활동을 하기 위해선 제국 정보국의 협조가 필요하다."
프리슬란 가문이 타국에서 대대적인 첩보 활동을 하고 있을 리도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네가 입에 담은 역사가 진실이라면, 황실에도 그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을 황제 폐하께 보고드리고 사실관계를 확인하겠다."
"..."
"네 주장이 신빙성 높다고 판단되고, 또한 황제 폐하께서 작전의 수립을 허가하신다면 추가적인 인원을 알리모로 파견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
황도 근방에서 알리모까지는 거리가 굉장히 멀다.
신속히 추가 인원을 파견하려면 워프게이트를 사용해야 한다.
워프게이트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다만 최근 제국에 마족까지 출현하는 등 혼란이 잦았으므로, 명분을 좀 덧붙여 국가 간 회담을 진행하자는 이유로 워프게이트를 열어 사람을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네 신분을 위장해 알리모로 파견해... 그곳에 상주하는 제국의 정보원들과 접촉하게 해줄 수는 있다."
해줄 수는 있다.
해주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무언가를 확답하기엔 에른스트에게도 정보가 부족했다.
에른스트가 모로스를 레이 쪽으로 밀었다.
"일단 황제 폐하의 허가부터 받아보겠다. 폐하께서 허가해주시지 않는다면, 깔끔하게 포기해라."
"감사합니다, 에른스트 님."
레이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울트에 관한 문제는 에른스트로서는 아예 묵살해버려도 상관없는 사안이었다.
허나 에른스트는 조건부나마 협조해주겠다는 의사를 레이에게 전했다.
이에 관해 레이는 진심으로 에른스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도와주신다면, 반드시 성과를 내보이겠습니다."
"이것부터 가져가라."
에른스트가 손짓하자, 레이는 일단 모로스를 회수해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아, 에른스트 님."
"더 할 말이 남았느냐?"
"혹시 제 위장신분을 만들게 되면, 낮은 등급의 마법사로도 신분을 위장하는 게 가능할까요?"
"마법사?"
"예. 마법사 신분이라면 조금 더 경계는 받겠지만, 검으로 누군가를 처리했을 때 의심을 피할 수 있으니까요."
"나쁜 의견은 아니다. 근데 마법사 흉내를 제대로 낼 수 있겠느냐?"
에른스트가 되묻자 레이는 순간적으로 하드 스틱, 윈드 커터, 혹은 라이트닝 블레이드 따위가 생각났지만 괜히 까불 생각은 접고 손을 펼쳐 보였다.
"제가 서클을 지니고 있어 아티펙트 없이도 간단한 마법은 사용할 수 있습니다."
레이가 손 위에 얼음 결정을 생성했다.
에른스트가 고려해보겠다고 답하고 레이를 집무실에서 내보냈다.
*
최근 날씨가 꽤 쌀쌀해졌다.
레이는 복도를 걸으며 일이 어찌 되든 내년까지는 백작령으로 돌아가기 글렀다고 중얼거렸다.
선선한 공기를 느끼며 밖을 바라보는데, 복도 맞은편에서 알레시아가 카렌과 함께 다가왔다.
"불륜을 저지른 나의 기사여!"
"호칭 좀 복구시켜주시면 안 될까요?"
"아니 된다. 그러게 순서라도 좀 잘 지키지 그랬느냐."
옆에서 듣던 카렌이 겸연쩍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레시아는 레이를 붙잡고 일장 연설을 이어갔다.
"입을 맞추지 말라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있지 않느냐? 순! 서! 를 명확히 지키라는 것이다!"
대충 그런 이야기를 빙빙 돌려가며 한참 동안 떠는 알레시아가 자기 턱을 위로 치켜들었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해보거라!"
"...여기서요?"
복도 주변을 쓱 둘러본 레이가 알레시아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쪽
입술이 맞닿은 알레시아가 흡족히 웃으며 말했다.
"알겠느냐? 나와 먼저 입을 맞추고 카렌과 입을 맞추면 아무 문제 없느니라."
"그럼 이제 카렌이랑 입을 맞추면 됩니까?"
레이의 질문에 알레시아가 잠깐 당황했다.
"아, 어, 어, 그, 그리하거라...?"
레이가 얼굴을 붉히고 있던 카렌과 입을 맞췄다.
하란다고 진짜 하는 레이를 보고 알레시아가 입을 쩍 벌렸다.
레이와 카렌의 입맞춤은 짧으면서도 길었다.
뭔가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알레시아는 방금 전 자신과의 키스보다 애정과 흥분이 묻어나오는 입맞춤을 보며 눈을 끔벅이다 소리쳤다.
"나의 기사여!!"
"왜 또 그러십니까."
"카렌에 비해 나와의 키스에선 애정이 부족하지 않았느냐?!"
"오해이십니다."
"애정이 부족하였다!!"
난리를 치는 알레시아를 레이가 달래다 못해 결국 안아주었다.
알레시아의 팔이 목을 꽉 감고 있는 걸 느끼며 레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왜 그리 걱정이 많으십니까?"
"불륜을 저지른 나의 기사가 자꾸 여기저기 눈을 돌리니까 그러지 않느냐아..."
풀이 죽어 툴툴거리는 알레시아를 레이가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알레시아 님을 유기하지 않을 겁니다."
"...유기?"
말실수를 알아챈 레이가 얼른 말을 고쳤다.
"저는 알레시아 님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
도끼눈을 뜬 채 레이를 노려보던 알레시아가 레이의 입술을 콱 물었다.
레이가 닫힌 입술 사이로 비명을 흘리며 몸부림쳤다.
*
레이는 부어오른 자기 입술을 매만지며 식당을 향해 걸었다.
오늘은 스페라와 점심 식사 약속이 잡혀 있었다.
대외적으로 레이는 에른스트가 점 찍은 스페라의 짝이었기에, 오늘처럼 간간이 스페라와 둘이서 식사를 하곤 했다.
차림새를 정돈하고 식당에 들어서니 스페라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레이는 스페라에게 인사를 건넨 뒤 맞은편에 앉았다.
처음엔 둘만의 식사 자리가 어색해 식사하는 내내 침묵이 이어지고는 했다.
물론 이제는 익숙해져서 레이와 스페라는 꽤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가벼운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음식이 나왔다.
레이가 고기를 썰어 입에 넣는데 스페라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요하나 말이죠."
"크읍!! 크흡!!"
사레가 들린 레이가 옆에 준비된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켁켁거렸다.
간신히 숨을 진정시킨 레이가 손수건으로 입 주변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 왜 식사하는데 요하나 얘기를..."
"...하면 안 되나요?"
"...하셔도 됩니다. 당연히 하셔도 되지요. 안 될 게 뭐 있습니까."
레이가 콧잔등을 한 번 매만진 후 고기 조각을 다시 입에 넣었다.
고기를 우물거리는데 왠지 모를 꿉꿉한 향기가 육즙에서 번져 나오는 것 같았다.
레이가 자기 코를 찰싹찰싹 치는 사이 스페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요하나는 언제부터 검을 배웠나요?"
"어, 음, 스페라 님."
레이가 피식 웃었다.
오늘도 스페라는 요하나와 대련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스페라의 표정은 레이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원래 그렇다.
자신과 견줄 수 있는 또래의 라이벌이 나타났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또 상대가 자신을 추월하는 건 바라지 않는 법이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내가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라이벌 관계였다.
"2년은 긴 시간입니다, 스페라 님. 저희 나이대는 특히 더 그렇죠. 극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성장기잖아요. 앞으로 5년 정도만 지나도 2년의 시간 차 정도는 금세 희석될 겁니다."
"레이, 저는..."
"전 스페라 님과 요하나의 재능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비등하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스페라 님과 요하나가 서로를 자극하고 끌어주는 경쟁자이자 친구가 되길 바랍니다."
"..."
"당장은, 조금 충격적이겠죠. 마음에 안 들기도 할 겁니다. 나 홀로 외롭게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와 있다고 여겼는데, 바로 위층에 누군가가 딱 나타났잖아요. 하지만 그렇기에, 서로에게 건전한 자극이 될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으음..."
마음이 완전히 읽혔다는 걸 깨달은 스페라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조금은 불쾌하고 쑥스러운 감정과 함께 스페라는 레이가 참 신비롭게 느껴졌다.
자라온 환경을 보면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2살 연상의 소년이었는데 가슴에 품고 있는 지혜는 스페라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 적어도 스페라가 느끼기엔 그랬다.
가만히 레이를 바라보던 스페라가 방긋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습니다. 완전히 회복하기까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요."
"내년까진 이곳에서 머무는 거죠?"
"...글쎄요."
웬만해선, 레이는 울트를 찾기 위해 직접 움직이고 싶었다.
레이가 고기를 씹으며 괜히 자기 콧잔등을 매만졌다.
오늘따라 육향이 강했다.
*
"들어오게."
황제의 허가를 받은 에른스트가 문을 직접 열고 방에 들어섰다.
과거에 독대를 진행했던 작은 방 안에서 황제가 다시 한번 에른스트를 맞아주었다.
에른스트는 우선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인사했다.
"강녕하셨습니까?"
"강녕하지 못했네."
황제는 반쯤 농담을 섞어 그리 답했다.
건강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지만 본래 예정된 수순이었기에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었다.
에른스트는 황제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느끼며 착잡한 감정을 품고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에른스트를 향해 잔잔하게 웃었다.
"경이 지닌 정보력도 만만치가 않군."
"그 말씀은..."
"가디 자작가는 카시야스의 직계 후손이 맞네. 다만 게네시스의 소유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네. 허나 아예 허황된 이야기라고 치부하긴 힘들겠군."
레이의 말이 일부분 사실임을 확인한 에른스트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황제가 탁자 위의 종이를 넘겼다.
에른스트는 황제에게 서면으로 울트에 관한 문제를 보고했다.
제국의 귀족인 가디 자작이 알리모에서 실종되었다.
가디 자작이 카시야스의 직계 후손이며, 세계수의 신물인 '게네시스'를 소유하고 있다는 출처 불명의 신뢰도 낮은 정보가 입수됐다.
이 사안에 관해 황제 폐하의 의견을 여쭙고자 보고를 올린다.
대략 그런 내용의 보고서였다.
보고서를 툭툭 두드린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경에게 일임할까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