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176화 (176/446)

의무 (5)

176화

울트 가디.

그의 풀네임은 울티마 가디언.

600년 전 엘프 영웅이었던 레시나를 지키고자 한 카시야스의 후예이자 최후의 수호자.

본래 울트는 스러져 가는 레시나의 옆만을 가만히 지켰으면 되었다.

허나 울트는 레시나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제는 티티라 칭해지는 그녀를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 울트는 계속해서 세계를 떠돌았다.

필립스 백작은 로커스트 습격 사태 이후 울트와 연락선을 구축해 놓고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울트 또한 연락선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정황상 간단한 연락도 남기지 못할 만큼 어려운 상황에 빠졌거나, 사망했을 확률이 높다."

"울트가 실종된 곳이 어디인가요?"

"...'알리모'다."

"후우."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알리모는 제국 동쪽에 있는 국가다.

필립스 백작령과는 아예 반대 방향에 있는 국가이며 마경과 비교적 인접해 있어 여러모로 안전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울트가 실종되었다면 필립스 백작의 역량으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디디에가 레이에게 이번 실종 사태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가만히 앉아 고개만 끄덕이는 레이를 향해 디디에는 미안한 감정을 내비쳤다.

"부담을 주어서 미안하다."

"아뇨, 아닙니다. 그... 일단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어설프게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울트가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 더욱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디디에는 피로감이 뚜렷한 레이의 얼굴을 보고 착잡한 감정을 느꼈다.

*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 안에 있는 개인 훈련장.

그곳에서 요하나는 땀을 흘리며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 온갖 고급 검술과 기술들을 새롭게 접했기에 요하나는 그걸 실험하고 체화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에른스트조차 조금 놀랄 만큼, 요하나의 성장 속도는 가팔랐다.

요하나는 강도 높은 훈련을 감내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웃음꽃이 떠나지를 않았다.

자신의 성장이 눈에 보인다는 건 그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요하나는 어제보다도 날카로워진 자신의 검격을 감상하다 제자리서 멈추었다.

어느새 훈련실에 찾아온 레이가 요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요하나는 검을 꽂아넣더니,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곤 레이에게 다가가 자기 자랑을 했다.

"오늘도 스페라 님을 이겼다? 3연승이야!"

"어, 4위권 사수 축하해."

뻑!

요하나가 레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리 강하게 차진 않았다.

괜히 엄살을 떠는 레이를 얄미운 감정을 담아 노려본 요하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앞으로 5년...은 무리고 10년..."

아니, 10년으로도 부족했다.

넉넉하게 잡아 20년 정도라면 요하나는 지금의 레이 곁에 서도 크게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평생을 바쳐 수련해도 결코 닿지 못할 경지가 요하나에겐 쉽사리 보였지만, 요하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말이 20년이지 그때가면 요하나의 나이는 40살에 가까워진다.

더군다나 레이도 계속 발전해 갈 것 아닌가.

레이 홀로 너무 앞서 가 있다는 게 새삼스레 다가와 요하나는 괜히 불쾌해졌다.

표정이 휙휙 변하는 요하나를 보고 피식 웃은 레이가 검을 뽑아들었다.

"오랜만에 대련 좀 할까?"

"...너 몸 아직 다 안 나았잖아."

"마나 안 쓰고 가볍게 하면 괜찮아."

"..."

요하나가 고민하다 검을 뽑았다.

레이와 검을 나눌 때마다 복잡한 감정을 느끼곤 했지만, 어쨌든 요하나는 레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캉! 카강!

마나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의 쇠붙이가 맞부딪쳤다.

이건, 날 것의 부딪침이었다.

코어니 서클이니 공간검이니 그딴 화려한 포장지가 벗겨지고, 온전히 인간의 육체로만 행하는 진짜 검술이 드러난다.

레이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이 세계의 모든 검술은 마나의 활용을 전제하고 발전됐다.

때문에 이런 육체만을 활용한 부딪침 속에선 고급 검술이라 해도 제대로 빛을 발하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타고난 육체 감각과 임기응변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카각!! 캉!!

대련이 이어질수록 레이는 자주 휘청였다.

거리를 잘못 계산해서 과하게 물러서거나, 혹은 지나치게 파고들었다가 뒤늦게 몸을 비틀기도 했다.

요하나는 생각했다.

레이가 아직 몸이 덜 회복되었구나. 그러니까 자꾸 이리 실수를 하는구나.

그건 요하나의 착각이었다.

레이는 천재라 불리어도 손색없는 재능을 타고났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의지력도 지니고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완전히 날 것이 되었을 때.

레이는 요하나보다 앞선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카앙!!

레이의 몸이 다시 한 번 휘청였다.

레이는 실소했다.

레이는 분명 제국 역사상 그 누구보다 빠르게 높은 경지에 닿아 말도 안 되는 공적을 세웠다.

허나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초월자가 머리에 때려 박은 기술들을 기반으로 레이가 자신의 미래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카각!!

레이가 요하나의 검을 옆으로 쳐냈다.

레이의 의도를 알아챈 요하나는 검을 회수하고 뒤로 물러났다.

"끝?"

"어, 여기까지만 하자. 많이 늘었네."

레이가 흐뭇한 감정을 내비쳤다.

황도에 오기 전에 비해 요하나의 검술 실력은 눈부시게 도약해 있었다.

필립스 백작령에 묶여 있던 재능이 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만족한 레이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아예 누워버렸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지라 과격하게 움직이니 금방 지쳤다.

요하나는 레이가 걱정돼서 거리를 좁혔다가 다시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까부터 계속 훈련을 이어갔던 몸이 후덥지근했다.

요하나는 얇고 잘 늘어나는 훈련용 가죽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렇다 보니 특히 하체 쪽이 습하고 찝찝했다.

거리를 벌린 채 요하나가 눈치를 보자 레이가 낄낄 웃었다.

"왜 또 도망쳐? 향수라도 뿌리고 오게? 땀 냄새 좀 나면 어때. 나 땀 냄새 좋아해."

"...!"

요하나는 순간 발끈했다.

허나 요하나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제까지 레이가 이런 걸로 놀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의 도발에 걸려서 흥분해봤자 결국 레이만 낄낄거리며 좋아했다.

지금까지의 굴욕을 상기한 요하나는 반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각오를 다진 요하나가 검을 내려놓고 레이에게 다가갔다.

요하나는 과거 '언니'들이 가르쳐 준 지식을 되새겼다.

"땀 냄새가 좋다고?"

"뭐, 싫어하진..."

"나 알고 있어."

"뭘?"

레이가 아직 분위기 파악이 덜 된 사이.

요하나가 레이의 허리 양옆에 발을 디디고는 장난기가 어린 얼굴로 레이를 내려다봤다.

"남자들 중엔 여자 땀 냄새에 흥분하는 변태들도 있다는 걸."

쿵!

요하나가 무릎을 꿇었다.

요하나의 무릎이 레이의 양쪽 어깨 위의 지면과 맞닿았다.

요하나가 속삭이듯 물었다.

"레이도 그래?"

"...?"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레이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허나 아무리 눈동자를 굴려보아도, 요하나의 사타구니 사이와 잘 단련된 허벅지만 시야에 가득 비쳤다.

간신히 눈을 위로 쳐들어 봤자 사람을 깔보듯이 내려보는 요하나의 표정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다.

레이가 이년이 미쳤나 싶어 입을 반쯤 벌린 채 어버버거렸다.

요하나가 배시시 웃었다.

"이러니까 좋아?"

이리 말하는 요하나도 결코 여유롭지 못했다.

요하나는 지금 얼굴이 화끈거려 기절할 지경이었다.

어린 시절 홍등가 언니들한테 흥미롭게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일을 저지르긴 했는데, 정작 일을 저지르고 나니 뒷감당이 안 됐다.

요하나는 겨드랑이 사이와 함께 신체에서 가장 푹푹 찌는 곳을 레이에게 벌리고 있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다.

훈련을 오래 해서 땀 냄새 엄청 날 텐데.

그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하자 요하나는 미친 듯이 부끄러워졌다.

허나 자존심,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먼저 도망칠 수가 없었다.

요하나는 차라리 레이가 먼저 밀어내주길 바라며 숨만 거칠게 내쉬었다.

레이도 굳고, 요하나도 굳어버린 그 순간.

떨떠름해 하는 소년의 목소리가 훈련장을 울렸다.

"...두 분 뭐하십니까?"

"...!!"

깜짝 놀란 요하나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허나 너무 다급히 움직이다 실수를 해서 바닥에 대고 있던 무릎이 미끄러졌다.

요하나가 취하고 있던 자세가 좋지 못했던 탓에, 요하나는 그대로 레이의 얼굴 위에 엉덩방아를 찧게 됐다.

쩌업!

"크흡! 커헙!"

갑자기 숨이 막힌 레이가 반사적으로 입과 코로 공기를 들이쉬려 했다.

사타구니 사이에서 레이의 숨결을 느낀 요하나가 온몸의 근육을 경직시키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기겁한 요하나가 몸을 굴렸다.

튕겨져나오듯 레이에게 떨어져 나온 요하나가 가랑이 사이를 콱 좁힌 채 몸을 떨었다.

"미, 미쳤나봐아!!!!!!"

요하나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요하나의 엉덩이에서 벗어난 레이가 뒤늦게 맑은 공기를 마시며 켁켁댔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고민하던 레이가 얼굴 위를 문질렀다.

축축한 가죽 바지 너머로 번져 나왔던 요하나의 땀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레이가 침을 삼켜보더니 중얼거렸다.

"아, 좀 짜다."

쫘악!!!

결국 뺨을 한 대 얻어맞은 레이가 씩씩거리는 요하나를 두고 일어서서 데런과 인사했다.

"어, 데런. 무슨 일이야?"

"...이따가 다시 올까요?"

"너 지금 가면 내가 맞아 죽어."

"어, 음."

요하나의 눈치를 살핀 데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랑 좀 하고 싶어서 형님을 찾고 있었어요."

"무슨 자랑?"

스릉!

데런은 다짜고짜 검부터 뽑아들었다.

눈을 감은 데런이 정신을 집중시켰다.

츠즉-!

데런의 기세가 날카로워진다.

마나의 기류가 검신을 타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푸른 빛 무리가 점멸하며 검신의 주위를 은은하게 밝혔다.

검기는 아니다. 아직 그 단계까진 이르지 못했다.

허나 얼마 안 가 검에 검기를 두를 수 있는 수준에 이를 것이다.

빠르면 올해 말. 늦는다고 해도 내년 초까지.

"흐읍...!"

참았던 숨을 토해낸 데런이 검을 늘어뜨렸다.

그 잠깐 사이 무리했던 탓에 데런은 한동안 호흡을 골라야 했다.

레이가 데런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밝게 웃었다.

"잘했어."

데런 또한 레이를 향해 마주 웃었다.

평생의 우상이 해준 잘했다는 말 한마디가 그리 기쁠 수 없었다.

*

레이는 요새를 돌며 아이들을 살폈다.

요하나와 굉장히 남사스러운 일이 한 번 있긴 했지만, 레이는 코끝에 남아있는 꿉꿉한 소녀의 체취를 잊기 위해 노력했다.

'...다들 잘하고 있네.'

본격적인 지원을 받자 아이들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더는 곁에 붙들어 놓고 신경 쓰지 않아도 다들 잘해줄 것이란 믿음을 레이는 얻을 수 있었다.

자기 방에 도착한 레이가 방문을 열었다.

역시나 루나가 레이를 맞아주었다.

루나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에게 휴식을 더 취하라고 짧게 참견했다.

레이는 말없이 의자를 끌고 와 루나와 마주앉았다.

레이는 입을 열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민했다.

'울트...'

레이는 이 세상의 미래를 잘 모른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멸망을 막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으나 여전히 한 치 앞의 미래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레이는 항상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울티마 가디언.

그는 레이가 미래를 알고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미래에 타락하고 악신의 사도가 되어 세계수를 불태운다.

그렇기에, 레이는... 어떤 의무감을 느꼈다.

자신이 명확히 아는 부정적인 미래만큼은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그런 의무감을 느꼈다.

또한 이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어둠 속을 헤매기보다, 큰 재앙이 될 요소를 확실히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훨씬 합리적이었다.

'울트가 필립스 백작령으로 복귀했을 때 담판을 지으려 했는데...'

연락이 끊기고 실종됐다니 이젠 레이가 찾아가 볼 수밖에 없었다.

울트를 죽이든, 혹은 그와 티티의 문제를 해결해주든.

레이는 자기 손으로 울트와 관련된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결국 결심했다.

그게, 레이가 생각한 자신의 의무였다.

"루나, 내가 가봐야 할 곳이 생겼어."

"..."

"정말 갈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지만, 한 번 가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몰라."

"..."

루나의 표정에 분노와 짜증이 깃들었다.

그 미약한 변화를 레이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레이가 루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루나, 나랑 같이 가줄 수 있어?"

"..."

루나는 원망의 말을 내뱉고 싶었다.

대체 왜 그렇게 망아지처럼 날뛰어대느냐고, 어째서 그리 스스로를 희생하지 못해 안달이냐고 톡 쏘아붙이고 싶었다.

허나 루나는 그러지 못했다.

루나는 다만 가슴이 쓰라림을 느끼며 레이의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고동과 감정이 온기를 타고 흐른다.

루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레이가 어디에 있든, 난 레이의 곁에 머물 거예요."

루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더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렇기에 이제는, 당신의 곁에 머물 것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당신이 위험을 자처한다면, 이젠 내가 당신을 지킬 것이다.

당신이 크게 다치지 않게, 당신이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없도록.

당신을 위협하는 악한 것들을 내 손으로 부술 것이다.

츠즉-

새롭게 개화한 네 번째 고리가 루나의 심장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이어졌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