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 (4)
175화
"...?!"
카렌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입을 쩍 벌린 채 서 있는 알레시아가 눈에 보였다.
카렌은 너무 놀라 레이에게 넣었던 혀를 뺄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알레시아가 거의 한계치까지 흐물흐물해졌다가 주먹을 콱 말아쥐었다.
그대로 와다다 달려온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어깨부터 가져다 박았다.
퍽!
"우읍...!!"
알레시아와 부딪쳐 옆으로 밀려난 레이가 황급히 카렌에게서 입술을 떼었다.
서로의 엮였던 혀가 풀리며 끈적한 침이 길게 늘어졌다가 끊어졌다.
공중에 뜬 침 한 방울이 바닥에 똑 떨어졌다.
그꼴을 아주 느린 속도로 주시한 알레시아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카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레시아의 푸른 눈동자가 분노로 인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기세에 눌린 카렌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치자 알레시아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알레시아의 손이 카렌의 등짝을 강타했다.
쫘악!!
"아악...!!"
카렌이 허리를 바짝 세우며 비명을 토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레시아는 연거푸 카렌의 등짝을 내려치며 울분을 토했다.
"나는 너를 믿었거느을...!! 어찌 이리 배은망덕하게 굴 수 있단 말아냐아!!!"
"죄, 죄송해요...!"
알레시아가 이리 나오면 카렌도 할 말이 없었다.
필립스 백작 가문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하란 이야기는 레이가 어린 시절부터 강조했던 것이었다.
카렌은 고작 알레시아에게 등짝 좀 맞았다고 항거할 생각도 없었고, 무엇보다 지금 알레시아의 분노는 매우 타당했다.
알레시아가 카렌에게 레이와 아예 접촉하지 말 것을 요구해왔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쫘악! 쫘악!
"순서만 정확히 지키라 그리 말했거늘,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아주 끈끈히 붙어먹고 있었구나!!"
"자, 잘못했어요...!!"
"어찌 이리 나를 기만할 수 있단 말이냐아!!"
알레시아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스페라를 감시하겠다고 온 신경을 빨딱 세우고 있던 사이에 카렌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적이 바로 내부의 적이라고 했던가.
여전히 번들거리는 카렌의 입술이 더욱더 알레시아의 울분을 치솟게 만들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구나!!"
쫘악! 쫘악!
알레시아가 빼애액 소리치며 카렌의 등짝을 계속해서 내려쳤다.
옆으로 튕겨 나갔던 레이가 뒤늦게 알레시아를 말렸다.
"아이고... 그만 하세요, 아가씨. 여기 복도 한가운데라서 사람들이 봅니다."
알레시아는 순간 혈압이 차올라 시야가 핑글 돌았다.
복도 한가운데라서 사람들이 보니까 그만하라고?
그게 방금까지 복도 한가운데서 혀를 섞으며 몸을 비벼댄 놈이 할 말인가?
"나의 기사가아...! 나를 이렇게 배신하다니이...!!"
카렌의 등짝을 몇 번 더 내려찍은 알레시아가 으르르 거리며 레이를 돌아보았다.
이미 알레시아의 푸른 눈동자에서 이성의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알레시아가 와다다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알레시아와 부딪친 레이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으악!"
"아, 알레시아 님!!"
이번엔 카렌이 알레시아를 뜯어말렸다.
*
알레시아에게 봉변을 당한 레이가 터덜터덜 걸어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문이 열리자, 방 안의 의자에서 책을 보던 루나가 레이를 돌아봤다.
레이의 안전이 걱정된다고 최근 자주 방에 침입해 있는 루나였다.
하지 말라고 말해봤자 루나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서 레이도 이제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루나는 방으로 돌아온 레이를 훑어보다 레이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레이의 입술은 퉁퉁 부어있었다.
쪽쪽 빨린 자국이 아니라 무언가에게 콱콱 물린 자국에 가까웠다.
루나가 눈을 깜박이다 물었다.
"개한테 물렸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레이가 퉁퉁 부은 입술을 매만지며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에 분노한 알레시아는 이성을 잃고 레이에게 달려들어 레이의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순서를 뺏겼으니 뒤늦게라도 자기 권리를 되찾겠다는 뜻이었는데, 그건 키스라기엔... 너무 폭력적이고 야만적이었다.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알레시아가 말한 '순서' 이전에, 레이는 애초에 또래들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유지해왔다.
그건 레이의 고집이었으며 또한 각오이기도 했다.
'아, 내가 미쳤지.'
허나 레이는 최근 정신적으로 많이 몰렸었고 육체도 피폐해졌다.
이제는 좀 안정을 찾았지만, 아직 완벽히 피로를 해소하지 못한 상황에서 카렌이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그때 입맞춤을 나눈 후부터 욕정의 조절이 예전만큼 잘 되지 않았다.
여체의 달콤함을 약간이나마 맛본 본능이 자꾸만 레이를 부채질했다.
더군다나 상대가 카렌이었다.
카렌은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소녀였고, 남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매력 또한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레이는 과거부터 은연중에 카렌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한 번 불이 붙은 카렌을 향한 욕정을 쉽사리 다잡기 힘들었다.
"후우..."
레이는, 초인을 흉내 내곤 했으나 결코 기계처럼 완벽한 초인이 아니었다.
레이가 괜히 자기 머리를 툭툭 쳤다.
스스로가 어설픈 위치에 서서 고민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루나가 갈등하는 레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레이."
"응?"
"알레시아 님은 유기하는 거예요?"
알레시아를 유기하고 훨씬 조건이 좋은 스페라로 갈아타는 거냐.
뭐 그런 의미의 질문에 레이가 잠깐 헛기침을 했다.
"...아니, 루나야."
"?"
"사람한테 '유기'라는 표현을 쓰면 안 돼요. 그건 나쁜 말이야."
"..."
루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레이가 고민하는데, 루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디나르 산."
"..."
"레전드리."
"에헤잇!"
레이가 다급히 루나의 말을 잘랐다.
"어디서 그런 나쁜 말을 듣고 왔어?"
"..."
"어쨌든 그런 말 하면 못써요."
레이가 흔들림 없는 루나의 눈동자를 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 뭐냐. 내가 알레시아 님을 유기...? 할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레이는 가능한 선에서 필립스 백작가를 굉장히 신경 쓰고 있었다.
앞으로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또 알레시아가 필립스 백작가를 이끌게 되었을 때.
그 기반이 충분히 튼튼해질 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썼다.
에른스트와의 대화에서 필립스 백작가와의 신의를 강조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루나가 레이를 빤히 바라보다 손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레이는 이제 쉬어야 돼요."
쉬어야 된다.
루나가 요즘 자주 입에 담는 말이었다.
남이 들으면 18살 소년을 골방 늙은이 취급한다며 실소를 터뜨렸을 터다.
하지만 루나는 레이의 과거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나 어린 시절부터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몸을 혹사시켰던 레이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몸이 더 망가지기 전에, 레이는 이제 쉬어야 했다.
"...이제는 쉬어도 되잖아요."
루나는 레이의 목적의식을 일부분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다.
레이의 목적이, 지금 단계에서 어느 정도 이루어졌음을 루나는 알고 있었다.
"이제는 굳이 레이가 고생하지 않아도 돼요."
레이가 가만히 있어도 아이들은 에른스트의 지원 아래 알아서 스스로의 재능을 만개할 것이다.
필립스 백작가 또한 레이가 구축한 시스템을 유지하며 차근차근 과거의 영광을 회복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만 쉬어요."
"..."
레이는 루나의 은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웃었다.
"앞으로 한 5년만 더 고생하면 안 될까?"
"...사람을 안 죽이고 아공간에 넣는 방법을 연구해볼게요."
"에헤잇, 그런 연구 하지 마라니까."
루나라면 진짜로 연구를 성공시킬 것 같아 레이는 조금 두려워졌다.
루나가 남들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미약하게 샐쭉한 얼굴을 하자 레이가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푸른 머리카락 위엔 레이가 선물한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레이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루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제국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에서, 굳이 레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은 찾기 힘들 수도 있었다.
허나 레이는 상황을 단언하기 힘들었다.
레이는 미래를 몰랐다. 미래를 아는 건 전생의 불알친구 놈이었다.
레이는 자신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과연 그게 옳은 판단일까 항상 고민해야 했다.
무언가가 부족하진 않을까, 혹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던 건 아닐까.
오랜 고민이었고, 남은 삶이 끝날 때까지 결코 해결 못 할 고민이었다.
레이는 착잡한 감정을 숨기며 루나에게 웃어주었다.
*
알레시아가 카렌과 레이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얼마 뒤.
스페라보다 카렌을 쫓아다니며 주시하던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도도도 달려왔다.
"불륜을 저지른 나의 기사여, 손님이 찾아왔다고 하는구나!"
바뀌어버린 호칭이 며칠 째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레이는 떫은 얼굴로 알레시아에게 되물었다.
"...손님? 누구요?"
"일단 나와보거라!"
레이는 알레시아를 따라 요새의 외부 성벽까지 나갔다.
그곳에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디디에 경."
디디에가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에 도착해 있었다.
디디에는 신원 확인 절차를 거친 후 알레시아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후 레이를 돌아본 디디에가 말없이 레이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디디에의 손아귀에서 전해지는 감정을 느낀 레이가 피식 웃었다.
"잘 오셨습니다, 디디에 경."
"그래. 모하메드 경께 이야기는 들었다. 정말 고생 많았다. 그리고 고맙구나. 백작님께서도 네게 고마워하셨다."
"별말씀을."
간단한 대화를 끝내고 요새 안으로 안내받은 디디에는 젠킨슨을 먼저 찾았다.
"젠킨슨 경, 몸은 괜찮습니까?"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젠킨슨이 침대에 누운 채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당시 전투의 전사자 숫자를 고려하면 목숨이라도 건져 다행이라는 게 빈말이 아니었다.
허나 결코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다.
다리를 그럭저럭 회복하는 데만 앞으로 몇 개월은 더 걸렸고, 재활까지 합치면 족히 1년은 채워야 했다.
디디에는 젠킨슨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선에서 젠킨슨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병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디디에가 레이에게 입을 열었다.
"레이. 지금까지 고생한 너에게 정말 면목없다만, 너와 논의해야 할 문제가 있다."
"면목이 없다니요. 무슨 말씀을 그리하세요? 방으로 가시죠."
레이도 디디에가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 여기까지 왔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디디에를 방으로 데려간 레이가 의자에 앉은 채 결계를 쳤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울트... 가디 자작이 실종됐다."
"...제국 안에서 실종됐나요?"
디디에가 고개를 저었다.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디디에가 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제국 안에서 울트가 실종됐다면 필립스 백작가 선에서도 어떻게든 조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허나 제국 바깥에서 울트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이는 필립스 백작가의 역량을 완전히 벗어난 일이 되어버린다.
레이가 자기 미간을 매만졌다.
문제의 해결을 시도해보기라도 위해선 조력자가 필요했다.
다른 국가에까지 직간접적인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조력자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