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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74화 (174/446)

의무 (3)

174화

스페라는 친구가 없었다.

스페라는 평범한 귀족 영애와 여러모로 동떨어진 삶을 살았고, 때문에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귈 기회가 없었다.

간간이 파티에 참가해 또래들을 만나도 항상 어색한 분위기만 감돌다가 끝났다.

그렇기에 스페라는 '또래 친구'라는 존재와 거리감이 좋지 못했다.

가까운 친구 사이에선 음담패설도 나누곤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가까운 친구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알지 못했다.

지금 차를 마시다가 요하나에게 크기 운운한 것도 그러한 원인이 컸다.

"진짜 커?"

"프흡!"

요하나가 입에 댔던 찻물을 뿜었다.

스페라의 옆에서 호위를 서던 셰이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셰이는 마음 같아선 스페라를 제지하고 싶었지만, 그러한 행동이 무례가 될까 걱정되어 나서지 못했다.

그 사이 요하나가 입을 닦고 스페라의 눈치를 봤다.

요하나는 스페라가 레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솔직히 불편했다.

그래도 이런 얘기를 할 상대가 거의 없었기에 조금 즐거운 마음도 들었다.

주변을 한 번 훑어본 요하나가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고는 조심스레 두 손을 벌렸다.

"요, 요 정도...?"

"?"

스페라가 자신의 손에 쥐인 포크를 내려보았다.

일단, 요하나가 벌린 두 손의 거리가 포크보단 확실 길었다.

스페라가 슬쩍 자기 배꼽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눌러보았다.

"..."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스페라가 디저트를 찍으려던 포크를 내려놓고는 입을 우물거렸다.

워낙 어릴 때부터 날붙이를 접해 고통에 대한 내성은 상당한 스페라였지만, 배꼽 언저리를 꾹꾹 눌러보고 있자니 뭐라 표현하기 힘든 더부룩함과 두려움이 슬금슬금 피어났다.

스페라의 눈이 당황에 휩싸여 떨리고 있는데 요하나가 쐐기를 박았다.

"근데 이게... 그, 평소 상태예요."

"...?"

요하나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스페라가 눈을 깜박이다 뒤늦게 몸을 굳혔다.

아니, 거기서 더 커진다고? 따위의 비명을 지르려던 스페라를 셰이가 제지했다.

"크흠!! 큼!!"

억센 헛기침을 통해 둘의 대화를 차단한 셰이가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으음, 음... 스페라 님, 혼약은 하시더라도 합방은 조금 늦추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타고난 체격이 작은 스페라인데, 나이까지 어렸다.

아직은 성장할 여지가 남았으니 2년 정도만 지나도 지금보단 덩치가 커질 터였다.

그때쯤이면 부담이 좀 줄지 않을까, 그런 의견이었다.

"으응, 그러는 게 좋겠어!"

스페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2년 뒤 몸집이 뭐 얼마나 커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장은 무리였다. 적어도 스페라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스페라가 당황한 채 눈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자 요하나는 괜히 우쭐해졌다.

허세라도 부려 좀 더 겁을 줘볼까, 그런 고민을 하던 요하나가 셰이의 눈치를 보고 장난을 그만두었다.

아직 요하나는 귀족과 기사들이 어려웠다.

다시 어색해진 스페라와 요하나는 괜히 차만 홀짝였다.

그런 대화가 오갔던 후.

그날 마침 레이와 만나게 된 스페라가 주먹을 불끈 쥐며 레이에게 다짐했다.

"2, 2년만 기다려줘요. 그때까지 그, 열심히 성장할게요. 아직은 작지만 키도 더 클 거고..."

"...?"

갑작스러운 스페라의 선언에 잠깐 얼을 탄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열심히 키우겠습니다."

"뭐, 뭘 키워요...?!"

"키요, 키."

레이의 키는 이제 175 cm 언저리였다.

결코, 결코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레이가 바랐던 수치에 비하면 현저히 모자랐다.

레이는 전생에서 군대 가서 키 컸다는 일화를 믿어보기로 했다.

이제까지 몸뚱이를 그렇게 혹사해놓고 기도할 바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레이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반드시 키를 더 키우겠다고 장담하는 레이를 보고 스페라가 얼굴을 상기시킨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더, 더 커지면 곤란한데요오..."

"아니, 더 안 크면 제가 곤란하다니까요."

"음... 저도 더 노력할게요."

"예, 뭐."

검을 다루는 입장에서 체격을 키워서 나쁠 건 없었다.

레이는 스페라를 적당히 응원해준 후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스페라가 괜히 몸이 달아올라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

얼마 후 제플린에게서 요하나의 검이 도착했다.

요하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검을 뽑아보았다.

검신의 양면에 X자 형태로 구멍이 파여 있었다.

X자 형태의 구멍은 외면이 꽃봉오리 형태로 꾸며져 있어 언뜻 보면 아름다운 장식을 새겨놓은 것처럼 보였다.

요하나는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곧장 새로운 검을 휘둘러보았다.

촤아아악!!!

새로운 검의 구멍 속에 마나를 응집시켜 터뜨리니 예전보다 훨씬 빠르게 검이 가속했다.

요하나는 자기 힘을 주체 못하고 휘청이다 바닥을 굴렀다. 그래도 얼굴에 미소가 떠나는 일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스페라 또한 기뻐했다.

요하나의 검은 소량의 마나로도 강맹한 위력을 발생시킬 수 있도록 수백 번에 가까운 실험을 거쳐 완성된 검이었다.

마나 폭발에 의한 급격한 가속을 버틸 수 있도록 재질 또한 굉장히 강도 높은 금속으로 제작되었다.

아티펙트 적인 기능은 없었지만, 제국 최고의 장인들이 최선을 다해 제작한 검이었다.

스페라는 이제야 요하나와 좀 더 대등한 위치에서 겨룰 수 있게 되었음이 정말 기뻤다.

이후 스페라와 요하나는 자주 진검을 들고 대련했다.

요하나는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 안에서 금세 유명해졌다.

레이는 이름을 언급하는 게 거의 금지되다시피 했지만, 요하나는 그런 게 없었다.

스페라에 맞먹는 천재 소녀의 출현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차츰차츰 퍼져 나갔다.

카가각!!

스페라와 요하나는 오늘도 대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점심 때의 대련은 이제 거의 일과가 되어버린지라, 둘 모두 이 시간대쯤이면 기세가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다.

셰이가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서 둘의 대련을 참관했다.

진검으로 벌이는 대련이라 까딱 잘못하면 대형사고였기에 실력 좋은 참관인이 반드시 필요했다.

카각!! 카가가각!!

"흐음..."

이제 슬슬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된 레이가 난간에 서서 둘의 대련을 지켜봤다.

요새에서의 대련이 처음 시작됐을 때는 스페라가 우세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요하나가 우세를 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금은 요하나가 유리할 수밖에 없지.'

요하나에겐 전문적인 검술 교육이 부족했고, 스페라에겐 시간이 부족했었다.

요하나는 에른스트를 비롯한 프리슬란 가문의 조력 아래 수십 개가 넘어가는 고급 검술의 묘리를 접하고 빠르게 체득해 갔다.

그에 반해 스페라는 시간이 문제였기에 급격한 실력 상승은 이룰 수가 없었다.

요하나와 스페라의 사이에선 2년이란 격차가 났다.

말이 2년이지, 스페라가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운 기간의 1/4에 달하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몇 년 더 세월이 흐른다면 그때는 스페라가 요하나를 따라잡거나 혹은 넘어설 수도 있었다.

꽈앙!!!!

대련이 절정에 이른 순간 셰이가 개입했다.

요하나와 스페라의 검이 셰이에게 막혔다.

비슷한 타이밍에 서로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었지만, 요하나 쪽이 조금 더 빨랐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스페라가 숨을 헐떡이며 아쉬운 얼굴을 했다.

최근 승률은 3:7 정도.

좁혀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스페라는 분해하면서도 요하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레이가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카렌이 복도 끝에 서 있다가 레이와 시선이 마주치곤 얼른 돌아서서 도망쳤다.

거의 달리다시피 걸어서 레이의 시선을 벗어난 카렌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려던 순간.

레이가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왜 도망쳐?"

"후악!"

정말로 놀란 카렌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려고 하자 레이가 얼른 카렌의 팔목을 붙들어 주었다.

간신히 균형을 잡은 카렌이 얼른 레이에게서 눈을 돌렸다.

저번에 급발진을 한 이후 레이를 대하기가 너무 어색했다.

레이는 카렌이 마음 정리를 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었지만,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지자 결국 먼저 나섰다.

"언제까지 도망 다니려고?"

"..."

카렌은, 앞을 막아버린 레이의 품을 힐긋거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으..."

"?"

카렌이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가져가 레이의 가슴팍을 아래로 쓸었다.

"그때... 그... 싫었어?"

겁 먹은 듯한 카렌의 질문에 레이는 그저 웃기만 했다.

설마, 싫었을 리가.

갑작스럽고 달짝지근했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레이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레이는 말없이 카렌과 한 걸음 더 거리를 좁혔다.

열이 조금 오른 레이의 시선을 받은 카렌이 레이에게서 손가락을 떼어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직감적으로, 이게 그러한 분위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갈등하던 카렌은 용기를 냈다.

서로의 신장이 그리 차이 나지 않았기에, 살짝 고개를 든 카렌이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서로의 입술이 맞닿는다.

카렌이 본래 첫키스로 꿈꾸었던, 수줍고 간질간질한 입맞춤이었다.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숙이려던 카렌의 턱을 레이가 가볍게 붙잡았다.

처음이 어려울 뿐이라는 건, 정말 어디서든 통용되는 말이었다.

레이가 카렌의 턱을 잡은 채 다시 입을 맞추었다.

"흡...!"

깜짝 놀랐던 카렌이 이내 눈을 감고 혀를 섞었다.

레이가 카렌을 조금 강압적으로 벽까지 밀었다.

카렌은 본능적으로 레이와 밀착해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단단한 레이의 육체와 맞닿은 살결로부터 이루 말하기 힘든 찌릿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흐읍, 흡!"

얼마 안 가 카렌은 레이의 목에 팔을 감은 채 더욱 적극적으로 혀를 섞었다.

달아오른 몸이 주체가 되지 않아 자꾸만 더 레이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이곳이 복도라는 것도 잊고, 카렌은 정신없이 혀를 섞으며 애달픈 신음을 흘렸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강렬한 욕구에 취해 레이의 몸을 더듬던 카렌은, 뒤늦게 레이의 혀가 멈추었다는 깨닫고 슬그머니 눈을 떴다.

레이의 눈이 옆으로 향해 있었다.

카렌 또한 레이를 따라 옆으로 눈을 돌렸다.

알레시아가 입을 쩍 벌린 채 그곳에 서 있었다.

*

모하메드가 필립스 백작령에 귀환했다.

필립스 백작은 그제야 모하메드로부터 일의 전말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백작은 안도의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모하메드가 가져온 상자들을 열어보았다.

필립스 백작령 5년 치 예산을 상회하는 금괴와 보물들이 상자에 담겨 있었다.

"후우..."

백작은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확실한 건 에른스트의 관용 덕분에 필립스 백작령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백작은 일단 모하메드를 비롯한 기사들을 불러모아 가장 중요한 안건을 먼저 논의했다.

울트 가디 자작에 관한 문제였다.

모하메드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건... 저희 역량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사료됩니다."

모하메드의 주장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하메드가 말을 이었다.

"사람을 보내 레이의 의견을 물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레이의 선택에 기대자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선 거물, 예컨대 에른스트쯤은 되는 인물의 조력이 필요했다.

울트 가디 자작을 아예 포기하거나, 혹은 진실을 일부 밝히고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야 했다.

백작 또한 모하메드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울트... 가디 자작을 포기할 수는 없네."

결국 디디에가 새로운 임무를 맡아서 필립스 백작령을 떠났다.

말을 타고 달려나가는 디디에의 뒷모습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레아가 칭얼거렸다.

"오빠 왜 안 와?"

벨라가 레아를 안아주며 속삭였다.

"오빠는 바쁜 일이 생겨서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린대."

"오빠 보고 싶어!"

"우리 딸은 오빠가 좋아?"

"..."

마냥 좋다고 하기엔 레이가 레아를 너무 괴롭히긴 했다.

그래도 누구보다 의지가 되는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샐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었다 반복하는 레아를 보며 벨라는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태생이 복잡했기에, 성인이 된 레아가 평범한 사람처럼 삶을 구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벨라는 레아를 지키고 싶었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딸을 지키기 위해선 자신의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그건 벨라의 변치 않을 진심이었다.

벨라가 레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우리 딸, 항상 오빠에게 감사하렴."

레이가 없었다면 벨라도 레아도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벨라는 항상 자신의 아들에게 감사했고, 레아 또한 그러기를 바랐다.

레아는 슬픈 표정을 한 엄마의 뺨을 두 손으로 주물렀다.

딸의 애교 아닌 애교에 벨라가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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