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 (2)
173화
마족까지 모습을 드러냈던 워프게이트 방위 전투 이후 시간이 조금 지났다.
그날의 전투가 만들어낸 후폭풍이 제국을 한 차례 휩쓸었으나 거대한 피바람이 불지는 않았다.
황제는 말년에 귀족들과 강하게 척을 지는 건 삼가려 했고, 본보기만 확실히 보여 주곤 남은 귀족들은 적당히 힘을 빼놓는 선에서 그쳤다.
이번 사태에 마족까지 엮인 관계로 귀족들도 황제의 처분을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황실의 지원 아래 전사자들의 영결식도 진행됐다.
많은 인원이 죽거나 그에 준하는 부상을 입었다.
레이로서는, 나쁜 일은 아니었다.
생존자가 많지 않았던 탓에 에른스트가 그들의 입을 통제하기 훨씬 수월해졌다.
당시 브랜틀리를 따랐던 반역자들 중 살아남은 자도 2명인가 있었는데, 그들은 에른스트의 선에서 마무리됐다.
에른스트가 정보만 캐낸 후 그들을 처분했으리라고, 레이는 쉽사리 추측할 수 있었다.
'들킬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전투의 여파 탓에 워프게이트가 있던 지하 광장도 거의 무너져 내렸다.
제국의 최중요 시설인 만큼 제국에서 가장 단단하고 안정적인 시설이었지만 결국 소드마스터까지 참전한 전투를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흔적이 많이 묻혔고 남은 흔적들도 에른스트와 에리다누스가 남긴 것이 대부분이다 보니 의심을 살만한 여지가 적었다.
"후우..."
레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젠킨슨은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했기에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에 머물기로 했다.
그에 반해 모하메드는 필립스 백작령으로 귀환하기 위해 요새를 떠났다.
모하메드가 귀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에른스트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위까지 붙여주었다.
'호위를 붙여준 이유가 감시랑 조사 때문이겠지만...'
지금 필립스 백작령의 사람들이 그런 걸 불쾌해할 처지가 못 됐다.
모하메드를 순순히 보내준 것만 해도 에른스트는 넓은 관용을 베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이는 당분간 젠킨슨과 함께 요새에서 머물러야 했다.
부상을 입은 탓도 있었지만, 에른스트는 모로스의 소유자인 레이가 밖에서 나도는 것까지 허가하진 않았다.
레이도 에른스트의 판단이 십분 이해됐기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이번 일정에 동행한 보육원 아이들은 전부 레이와 같이 남았다.
데런, 이안, 루카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본 에른스트는 아이들에게 그럭저럭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 지원을 약속했다.
그건 레이가 세운 공로의 대가 중 하나였다.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가진 실력에 걸맞은 출셋길을 열어주겠다는 에른스트의 제안을 레이는 받아들였다.
"..."
레이는 괜히 손을 쥐었다 펴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자신의 손을 떠나갈 수 있음을 알았지만, 레이는 그게 옳은 길이라 여겼다.
'거기다 에른스트가 필립스 백작가에도 충분한 보상을 약속했으니...'
당장은 금괴와 보석을 몇 상자 실어서 모하메드와 같이 보냈을 뿐이지만, 추후 장기적인 수입원을 제공해주겠다고 명시했다.
'다 잘 풀린 거지.'
레이는 마음을 편히 먹었다.
당장 무언가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온몸이 지끈거리는 것만 빼면 모든 게 괜찮았다.
에른스트의 호의 아래, 레이는 오랜만에 큰 고민거리 없이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레이, 무슨 생각해?"
휠체어를 밀어주던 카렌이 물었다.
레이가 눈을 깜박이다 피식 웃었다.
"별생각 안 해."
"으음... 레이."
"왜?"
"나... 교단에 들어가 볼까?"
레이가 고개를 뒤로 돌려 카렌을 바라봤다.
카렌은 씩씩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그 붉은 눈동자가 불안에 잠겨 있음을 레이는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다.
레이는 입을 우물거리며 말을 골랐다.
카렌은 다재다능한 아이였다.
행정 업무든, 특정한 분야의 실무든, 혹은 검을 다루는 것까지 무엇이든 평균 이상의 성과는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레이 곁에 서면 너무나 초라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요하나가 레이를 따라잡아 넘어설 때까지 수십 년을 생각했다면, 카렌은 그러한 미래를 아예 꿈도 꿀 수 없었다.
뭐라도 더 해봐야 할까.
내가 아직 익히지 못한 분야에 혹시 대단한 재능이라도 가지고 있진 않을까.
그런 밑도 끝도 없는 희망을 바랄 만큼 카렌은 자신의 모자람이 불안했다.
레이는 카렌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목적이 불순한데 신께서 대단한 축복을 내려주시겠어?"
레이가 낄낄거리자 카렌이 뚱한 표정을 했다.
레이는 분위기를 환기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나 그리고 교단 별로 안 좋아해."
이 세계에도 종교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사회를 유지하고 사회 구성원을 단합시키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허나 교단을 깊숙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어둡고 습한 면모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레이는, 그들의 심연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고 있었다.
전생의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정보였다.
"카렌, 넌 지금까지 너무 잘해줬어. 네가 없었다면 나도 여기까지 하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레이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데, 카렌이 레이의 턱을 잡아 비스듬히 돌렸다.
휠체어에 앉은 레이를 뒤에서 끌어안는 모양새를 취한 카렌이 레이와 입을 맞췄다.
"?!"
레이의 호흡이 뚝 굳었다.
한참 어린 시절 뭣도 모르고 침이나 발라대던 때를 제외하면 카렌과 첫 입맞춤이었다.
당황한 레이가 몸을 들썩였으나 카렌은 레이를 꽉 안은 채 입술을 밀어붙였다.
카렌이 본래 꿈꾸었던 쑥스럽고 간질간질한 입맞춤과는 동떨어진 첫키스였다.
불안을 해소하고 애정을 갈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카렌의 들뜬 호흡에서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레이는 잠시 망설이다 카렌이 엮어오는 혀를 받아들였다.
서로의 침이 묻어나오며 호흡이 뒤섞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키스가 이어진 후.
간신히 레이에게서 떨어진 카렌이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레이가 침이 번진 입가를 한 번 매만지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가슴이 쿵쿵 뛰고 얼굴에 열이 오른 건 레이도 마찬가지였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카..."
덜컹!
카렌이 레이의 눈을 피한 채 휠체어를 재빠르게 밀었다.
시뻘겋게 물든 카렌의 얼굴을 확인한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앞을 바라보았다.
로맨틱한 분위기 따위는 없었던 지극히 충동적인 입맞춤의 잔향이 혀끝에 맴돌았다.
"카렌...?"
어색함을 풀어보려 입을 열었지만 휠체어 속도만 빨라졌다.
계속 말을 걸었다간 넘어질 것 같았기에 레이는 가만히 앞만 바라보았다.
카렌이 묵묵히 휠체어를 밀었다.
소용돌이 치는 여러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허나 카렌이 안정을 되찾기 전에 복도 반대쪽에서 걸어온 스페라와 마주쳤다.
"아, 레이."
스페라가 휠체어 위의 앉은 레이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카렌이 휠체어를 멈춰 세우곤 한 발 떨어졌다.
여전히 카렌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시선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스페라는 카렌의 상태가 이상함을 인지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은 채 레이에게 미소 지었다.
"잘 지내고 있나요?"
"덕분에 불편함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혹시 일행분이 필요한 게 있다면 바로 말해주세요."
스페라가 레이가 썩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어디선가 알레시아가 나타났다.
알레시아는 본래 필립스 백작령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떼를 써서 이곳에 남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알레시아가 굳이 이곳에 남은 이유는 하나였다.
경쟁자의 견제.
알레시아가 곧장 레이에게 붙어서 으르르 거리기 시작했다.
스페라는 개의치 않고 알레시아에게도 미소 지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필립스 백작 영애님. 좋은 아침이에요."
스페라에 이어, 스페라의 호위 기사인 셰이 또한 대단히 정중하게 알레시아에게 인사했다.
인사를 마친 스페라와 셰이는 다시 레이에게 시선을 돌린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인사를 받아준 후 멀거니 서 있던 알레시아가 뒤늦게 깨달았다.
'여전히 무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냐?!'
얼마 전까진 개무시를 당했다면, 이제는 굉장히 예의 바르고 우아하게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혼자 혈압이 올라 비틀거리는 알레시아를 보며 레이는 생각했다.
'배경이랑 재능의 총점을 따지면 스페라가 5점 정도이고...'
요하나는 3점 정도 매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알레시아는...
'0.5점...?'
아, 0.5점은 너무 짠가. 필립스 백작님 얼굴을 봐서라도 1.5점 정도로 상향 조정을 해야 될 것 같다- 따위의 생각을 레이가 하고 있자니 알레시아가 도끼눈을 한 채 레이를 돌아봤다.
"나의 기사가 또 불경한 생각을 품고 있느니라!"
"오해이십니다."
레이가 항변했으나 알레시아는 레이의 휠체어를 위아래로 들썩였다.
덜컹덜컹!
"어찌 기사가 되어서 주인을 모욕하는데 앞장설 수 있단 말이냐...!"
레이가 그런 적 없다고 부정해도 알레시아는 강고하게 휠체어를 흔들어댔다.
레이와 관련된 눈치만큼은 경지에 오른 알레시아였다.
알레시아가 난리를 피는데다 스페라까지 한 자리에 있으니 주변의 관심이 쏠렸다.
슬슬 정신이 사나워진 레이가 알레시아를 말리려는데 강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
바람에 밀려 몸이 떠오른 레이가 복도를 날아가다 누군가의 앞에 멈춰 섰다.
루나였다.
루나는 저번 전투에서 정령을 드러낸 덕에 중급 바람 정령 정도는 대놓고 데리고 다녔다.
알레시아가 자신의 유니크함이 퇴색된다고 투덜댔지만 루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모여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루나가 짧게 말했다.
"레이는 쉬어야 해요."
그리 말한 루나가 레이를 허공에 띄운 채 몸을 돌렸다.
카렌과 알레시아는 조금 놀랐다.
루나가 저리 강압적으로 나오는 모습을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루나는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를 걸으며 레이를 바라봤다.
레이는 아직 몸이 덜 회복된 터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레이는 자주 방에서 나와 사람들을 만났다.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게 많은 모양이었는데, 루나로서는 레이가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는 것 같아 걱정만 됐다.
제발 가만히 좀 누워있으면 좋으련만.
"...레이."
"응?"
"사람도 아공간에 넣을 수 있을까요?"
잠깐 침묵한 레이가 어렵사리 답했다.
"...사람을 아공간에 넣으면 죽어요."
"안 죽이고 넣는 방법을 연구해 볼게요."
"아냐, 그러지 마."
레이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
스페라는 레이에게 만큼이나 요하나에게 호의적이었다.
같은 성별의 또래들 중 대등하게 검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호적수였으니 마음이 가는 게 당연했다.
허나 요하나 입장에선 그런 스페라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요하나는 레이가 아니었다면 길거리를 전전했을 고아였지만 스페라는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가문을 배경으로 지니고 있었다.
그런 스페라가 자꾸 호의를 내보이며 친한 척을 하니 요하나로선 부담이 컸다.
허나 다가오는 스페라를 쳐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요하나는 어쩔 수 없이 스페라와 어울렸다.
오늘도 차를 마시는 자리에 불려 갔는데, 스페라는 찻물을 홀짝이는 요하나를 보며 우아하게 미소지었다.
"요하나의 검이 곧 완성된다고 해."
"정말요?"
요하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플린이 직접 제작해준다고 약속했던 검은 요하나 또한 정말 기대하고 있었다.
"그, 그럼 언제쯤 받아볼 수 있을까요...?"
"추가적으로 작업할 게 몇 개 남아서, 넉넉히 2주 정도 기다려달라고 하시더라."
요하나가 히죽거렸다.
스페라 또한 요하나의 검이 빠르게 완성되길 바랐다.
자신만의 검을 쥔 요하나와 다시 한 번 대련을 나눠보고 싶었다.
둘 다 흥이 오른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친근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스페라가 타이밍을 재다가 슬그머니 물었다.
"근데 요하나."
"네?"
"레이 말인데..."
"레이가 왜요?"
"진짜 커?"
요하나가 입에 댔던 찻물을 앞으로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