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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72화 (172/446)

의무 (1)

172화

에른스트는 황제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대부분이 진실이었지만 레이의 활약상은 고의로 누락했다.

레이의 활약상을 누락시키니 자연스레 에른스트의 공적이 부풀어 버렸다.

에른스트는 참 오랜만에 낯부끄럽다는 감정을 느꼈으나,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당장은 공로를 가로챈 모양새가 되었으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 이 판단이 레이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임은 분명했다.

보고를 들은 황제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일 자체는 나쁘지 않게 풀렸다.

에른스트는 황제가 맡긴 임무를 깔끔하게 처리했고, 드래곤하트를 전부 회수했으며, 또한 제국에 큰 해악을 끼칠 수 있었던 습격을 잘 막아냈다.

분명 훌륭한 결과였다.

허나 그 과정에서 마족이 제국 한복판에 등장해 수작을 부렸다는 게 확인됐다.

몇몇 귀족들을 숙청하거나 힘을 빼놓기엔 마족의 출현이 좋은 명분이 되어주겠지만, 황제는 결코 유쾌해할 수 없었다.

에른스트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마족의 능력과 정황을 보았을 때, 약 600년 전 모습을 드러냈던 마족인 '에리다누스'로 추측됩니다."

"..."

거물이라 부를만한 마족이었다.

더군다나 에른스트의 증언에 의하면, 에리다누스는 마경이 아닌 제국 한복판에서 로드 급에 어느 정도 근접한 전력을 발휘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황제는 모르지 않았다.

"힘든 시기가 닥쳐올 수 있겠구나."

황제가 에른스트의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포이보스를 돌아보았다.

"네가 감당해야 할 의무가 막중하다."

포이보스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포이보스를 바라보던 황제는 한숨을 삼킨 후 에른스트와 간단하게 추후의 대책을 논의했다.

정보국과 특임대의 지원을 늘리고, 타국의 동향을 더 세세하게 살피는 등, 단순하지만 아주 효과적인 방안들이 우선 거론됐다.

짧은 논의 후 황제가 에른스트의 공을 분명히 치하했다.

에른스트가 황실의 허가 없이 임의로 워프게이트를 이용하긴 했지만, 마족을 참살한 공이 훨씬 컸다.

제국이 양분될 뻔한 사태를 막은 공신에게 절차를 운운하며 문제 삼는 건 굉장히 좀스러운 일이었다.

자세한 논공행상은 이른 시일 내에 마무리 짓겠다고 약속한 황제가 에른스트를 내보냈다.

황제와 독대하게 된 포이보스가 더욱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포이보스를 내려보는 황제의 눈에 안쓰러움이 깃들었다.

"정녕 악마의 의지가 세상에 다시 내려앉기 시작했다면, 네가 인류의 구심점이 되어 거대한 재앙과 맞서 싸워야 한다."

"해내 보이겠습니다."

"짐이 부덕하여, 어려운 시기를 앞두고 네게 충분한 기반을 마련해주지 못했다. 허나 너는 현명하니 험난한 길을 충분히 잘 헤쳐나가리라 믿겠다."

"..."

"일단 후계부터 만들어라. 황족이 많이 줄었다. 너의 위치도 불안정하니, 그를 해결하기 위해선 후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명심하겠습니다."

"짐이 죽기 전에 아이가 태어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구나."

"폐하, 어찌 그런..."

포이보스가 하려던 뻔한 대꾸를 황제가 잘랐다.

자리에서 일어선 황제가 황좌에서 내려왔다.

황제는 아직 정정해 보였지만, 황제 스스로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따라오거라."

황제와 포이보스가 같이 황궁을 걸었다.

황궁의 심부를 향해 계속 걸어간 끝에, 둘을 호위하던 로얄가드 마저 모습을 감췄다.

황궁의 심부에 다다른 황제가 막혀 있는 벽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알 수 없는 기계음과 함께, 본래 벽이었던 곳이 푸른 빛으로 뒤덮이며 황제와 포이보스를 벽 너머의 공간으로 인도했다.

밝은 빛 때문에 잠시 눈을 감았던 포이보스가 다시 눈을 떴다.

넓은 광장이 시야에 들어왔는데, 사방이 전부 크리스탈 유리처럼 보이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황제가 광장 중앙에 있는 작은 분수대로 걸어가더니 포이보스에게 손가락을 베어라 명했다.

포이보스가 스스로 손가락을 베어서 핏물을 분수대 위에 떨어뜨렸다.

잠시 반짝이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분수대를 보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 시간부로 네가 제국의 황태자이며, 황제의 권한을 일부 대행할 자격을 갖추게 됐다."

포이보스가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친히 포이보스를 일으킨 후 광장의 끝자락을 찾아갔다.

광장을 이루는 벽면에는 푸른 구슬이 일렬로 박힌 채 옆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황제가 명했다.

"손을 대 보거라."

포이보스가 명령에 따랐다.

구슬에 손을 대는 순간, 포이보스의 의식이 다른 공간으로 훅 꺼졌다.

"...!!!"

포이보스는 환영을 보았다.

제국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그 순간을, 두 눈으로 보고 있었다.

환영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과거의 사건들을 담은 누군가의 시선이 쉬지 않고 포이보스의 눈을 뒤덮었다.

그날의 사건들이 대체 어떤 인과가 맞물려 그러한 결말을 맞이했는지 포이보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반쯤 정신을 놓은 채 환영을 지켜보던 포이보스가 두통을 느끼고 뒤로 물러섰다.

후욱!

환영이 꺼지며 다시 광장으로 돌아온 포이보스가 제자리서 휘청였다.

잠시 머릿속을 정돈한 포이보스가 황제를 바라봤다.

포이보스는 깜짝 놀랐다.

적어도 며칠은 지났을 줄 알았는데, 황제의 시간은 몇 초도 흐르지 않은 듯 했다.

황제가 벽에 박혀 있는 수백 개의 구슬을 둘러보며 숨을 크게 쉬었다.

약간이나마 상기된 기색이었다.

"1000년이 넘는 제국의 역사가 이곳에 있다."

"..."

"네게 부족한 경험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역대 황제가 겪었던 역사와 경험뿐만 아니라 영웅이라 불리었던 자들의 가치 있는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는 공간이었다.

인간이 여기 있는 모든 기록들을 체화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현명한 자가 모자람을 채우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소리 없이 감탄하며 황제와 같이 광장을 걷던 포이보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구슬이 박혀 있어야 할 장소를 붉은 결계가 가로막고 있었다.

"저건... 무엇입니까?"

"봉인된 기록이다."

"...?"

"600년 전 누군가의 기록이다. 당대의 황제가 직접 봉인했다고 전해진다."

"...!"

"봉인을 풀기 위해선 제국의 신검이 필요하다고 하더구나. 억지로 열어보려 하면 안에 있는 기록 또한 파괴될 것이다."

황제가 포이보스를 돌아본 후 어깨에 손을 올렸다.

"때가 되면 제국의 신검도 다시 황실로 돌아오지 않겠느냐. 기다리고 있거라."

포이보스가 황제를 따라 착잡한 웃음을 머금었다.

*

필립스 백작은 최근 두통을 안고 살았다.

레이가 제국의 소드마스터에게 제대로 찍혔다고 하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 드넓은 황도에서 대체 얼마나 재수가 없어야 제국의 소드마스터와 딱 마주친단 말인가.

필립스 백작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말 그대로 비상 상황이었다.

허나 유난을 떨었다가 괜히 더 의심을 살까 싶어 함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지미, 레아를 잘 챙기게."

"알겠습니다."

지미는 최근 레아가 외부인과 접촉하는 일을 최대한 줄였다.

레아가 지미의 친자식이 아님을 알고 있는 자들은 극소수니, 이제 몇 사람의 입단속만 잘하면 큰 문제가 발생할 확률은 낮았다.

지미의 보고를 들은 필립스 백작이 클레멘스를 찾아갔다.

백작은 지미와 피코르의 호위를 받으며 클레멘스가 지내는 건물 계단을 올라갔다.

샤샤샤삭!

"...?"

계단을 다 오른 백작이 복도 사이를 바라봤다.

웬 커다란 바퀴벌레...가 아닌 엘프가 입에 사과를 물고 복도를 샤샤샤삭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꼴을 가만히 바라보던 백작이 혹시나 싶어 지미에게 물었다.

"엘프란 종족이 4족 보행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금시초문입니다."

떠드는 소리를 들은 미네르가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백작을 발견한 미네르가 엉덩이를 든 채 제자리를 몇 번 더 뽈뽈뽈 돌더니 어색하게 허리를 세웠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일으킨 미네르가 입을 우물거리다 손 위에 사과를 퉤 뱉었다.

드디어 입이 자유로워진 미네르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백작이 4족 보행을 하는 미개한 동물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미네르를 훑더니 물었다.

"클레멘스는 어디 있나?"

"저기 방에 있는데요..."

"고맙네."

백작은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주고는 미네르를 지나쳤다.

백작이 클레멘스의 방에 들어간 후 미네르는 슬그머니 주변 눈치를 보다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몇 초만에 다시 퇴화해버린 엘프가 사과를 입에 문 채 콧노래를 흘렸다.

*

클레멘스는 오랜만에 직접 찾아온 백작을 환영했다.

백작과 클레멘스는 이제 나름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전적으로 클레멘스가 노력한 덕분이었다.

덕분에 백작은 꽤 편한 마음으로 클레멘스에게 입을 열었다.

"제국이 많이 혼란한 상황이네. 말과 행동을 유념해주게. 한동안 외부인과는 접촉하려 하지 말고."

"주의하겠습니다."

"피코르 경이 이곳을 지킬걸세. 자네를 의심하기보단 엘프가 문제야."

작게 웃은 클레멘스가 문 너머를 바라봤다.

"미네르도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혹시 엘프가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내게 말해주게. 나도 피를 보는 건 원치 않으니, 문제가 생기기 전에 막고 싶군."

"알겠습니다."

해야할 이야기를 끝낸 백작이 화제를 돌렸다.

"자네는 화가를 했어야 했어."

백작이 클레멘스가 그린 풍경화를 바라보며 내심 감탄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클레멘스의 실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의 추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림을 바라보던 백작이 옆으로 눈을 돌렸다.

의자에 앉은 엘프를 그린 그림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림 속의 엘프는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방금 전까지 4족 보행을 하던 동물이 모델이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엘프의 그림은 그 밖에도 꽤 많았다.

아름답게 미소 짓는 엘프의 그림을 확인한 백작이 묘한 표정을 했다.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클레멘스가 손을 휘저었다.

"그... 그런 거 아닙니다."

클레멘스는 그림 모델이 없어서 엘프를 그린 그림이 많을 뿐이라고 괜한 설명을 열심히 덧붙였다.

백작이 알겠다고 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게. 되도록 준비해주겠네."

"백작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

클레멘스와의 만남 후 집무실로 돌아온 필립스 백작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제는, 영지를 버리고 도망가는 걸 제외하면 할 수 있는 단속과 채비는 대부분 마쳤다.

부디 일이 잘 풀리는 걸 바라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

백작은 알레시아가 걱정됐다.

지금쯤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며 무시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괜히 마음이 아팠다.

자꾸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돌 맞을 일이 없을 텐데, 백작이 아는 알레시아는 도저히 그럴 성격이 못되었다.

백작이 한숨을 삼키며 집무실에 놓인 편지를 뜯어 읽었다.

얼마 안 가 백작의 표정이 훨씬 안 좋아졌다.

"백작님?"

디디에가 걱정을 내비치며 백작을 불렀다.

필립스 백작이 꽝꽝 아파져 오는 골치에 미간을 짚었다.

편지에는, 울트 자작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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