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2)
171화
루나가 비틀거리는 레이를 부축했다.
레이의 몸에서 말라붙어 찐득이는 핏물이 잔뜩 묻어나왔다.
그 끔찍한 감촉에 루나는 잠시 몸서리를 쳤다.
루나가 숨이 거칠어지자 레이가 뒤늦게 웃음을 머금었다.
"이거 치료하면 금방 괜찮아져. 걱정하지 마."
"...무슨 얘기 했어요?"
루나는 결계 너머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레이가 아티펙트에 의지해 펼친 결계 따위야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 있었지만, 괜히 손을 썼다가 소드마스터가 이상함을 눈치채 레이가 곤란해질까 봐 두려워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루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당신이 나에게까지 숨겨야 할 이야기가 과연 뭘까.
굳이 날 떨어뜨려 놓고 방음 결계까지 펼쳐가며 무엇을 숨기려 했을까.
그걸 들었어야 했다고 루나는 방금 전의 선택을 자책했다.
레이에게서 번져 나온 핏물이 루나의 옷깃을 적신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을 느낀 루나가 레이를 돌아봤다.
"레이는... 내 곁에 있을 거죠...?"
그 앞뒤 없는 물음에 레이가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나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대답해요."
"당연하지. 뭘 당연한 걸 물어."
비록 긴 시간은 아니겠지만,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너희들의 곁에 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쯤이면, 루나는 분명 세상을 오롯이 내려다볼 수 있을 테니, 그리된다면 레이는 안심하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
"..."
레이는 낯설게 느껴지는 천장을 바라봤다.
몇 번인가 기절했다 깨어나길 반복하다 보니 이제 좀 제대로 정신이 들었다.
레이는 붕대가 온몸을 감고 있는 것을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
붕대 위로는 핏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정말 안 다친 곳이 없었지만 레이는 내심 이 정도면 싸게 먹혔다고 되뇌었다.
전설적인 마족을 상대한 것치고는 사상자가 많다고 보기 힘들었다.
레이에게 중요한 사람들도 대체로 무사했고 말이다.
특히 루나의 실력을 거의 감추고 일을 마칠 수 있었다는 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처음 세웠던 작전대로 참 잘 풀렸다며 홀로 감탄하던 레이가 기척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나가 레이의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몇 번인가 기절했다 깨어난 사이에도 루나가 계속 거기 앉아 있었다는 걸 떠올린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루나야, 너도 좀 쉬지?"
루나가 고개를 저었다.
루나는 레이가 그러했듯, 아직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레이의 곁에 머물러야 했다. 그게 루나의 판단이었다.
레이가 몇 번 더 루나를 달래보다가 포기한 뒤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이 정도면 상황은 괜찮아.'
에른스트는 여전히 레이에게 호의적인 편이었다.
레이의 사정을 받아들여 주고 협조를 약속해주었다.
'반응 보니까 내가 공간검을 쓴다는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양반이라고 중얼거린 레이가 실소했다.
'차라리 내가 시한부 신세인 게 다행이지.'
지나치게 뛰어난 능력은 언제나 시기와 미움을 받는다.
레이가 이제까지 보인 성취는 에른스트에게조차 질투와 경계를 산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에른스트를 기준 삼아도 그런데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허나 레이가 시한부 신세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말 그대로 쓰고 버릴 카드가 되어버리니, 다른 이들의 경계를 살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에른스트에게 최소한의 신의가 있다면 레이의 죽음 이후에 레이의 주변 사람들을 충분히 지원해줄 터다.
레이가 본 에른스트는 품위와 신의가 있는 자였기에, 레이는 마음이 좀 놓였다.
'지원만 잘 받는다면 충분히 일가를 이뤄 독립할 아이들도 있으니...'
레이의 입가에 자연스레 웃음이 맺혔다.
레이는 이제야 무언가가 좀 궤도에 올랐음을 느꼈다.
우연이 겹치고 겹친 끝에, 제국을 결정적으로 분열시킬 만한 요소를 레이가 직접 처단했다.
600년 전의 악명 높은 마족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는다면 가만히 있진 않을 터다.
제국이 움직인다.
제국이 조금만 더 경계수위를 올려도 수많은 재앙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에른스트를 비롯해 제국의 상부가 결코 무능하다 생각되지 않았기에, 레이는 그들이 잘 해주리라 믿었다.
'필립스 백작령이 좀 마음에 걸리긴 하는데...'
황도를 떠나기 전에, 레이는 백작령에 따로 연락을 취했었다.
레이의 실력이 에른스트에게 들켰다는 사실은 지금쯤 필립스 백작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세세한 사정을 모르는 필립스 백작은 한참 속앓이를 하고 있겠지만, 레이가 보기에 크게 걱정할 문제는 없었다.
에른스트는 필립스 백작령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모두 듣고서도 책임지고 잘 포장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필립스 백작령은 '레아'만 잘 숨기면 됐다.
정확히는, 레아의 핏줄만 잘 숨기면 됐다. 그럼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잘 될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가라앉히던 레이가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가슴과 등 쪽에 무언가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찾아왔다.
레이는 잠깐 고민했다.
'이거 어디서 들었던 증상인데...'
대동맥 박리인가 뭔가, 뭐 그런 병명이었다.
레이가 마나를 흘려 심장 주변 혈관의 흐름을 살폈다.
대동맥의 내막이 여기저기 손상됐는지 피가 혈관 사이로 차올라 대동맥을 부풀리고 있었다.
'지랄 났다.'
전투 중에 코어와 서클을 같이 돌려댄 탓에 심장에 압박이 가해졌고, 그로 인해 혈압이 일순 미친 듯이 치솟았으며, 혈류가 대동맥을 강하게 긁고 지나간 것이 원인이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레이가 손가락을 까닥여 루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신성력 사용 가능하신 성직자 분들 좀 불러줄래?"
*
루나가 치료사와 신관을 불러왔다.
치료사와 신관이 레이의 상태를 다시 살피고 문제가 생긴 부분을 치료했다.
둘다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레이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문 채 치료만 하고 나갔다.
통증이 좀 가라앉은 레이가 축 처져 누워 있는데 방에 들어온 알레시아가 정수리를 내밀었다.
"나의 기사여, 많이 아픈가?"
"그걸 말이라고 물어요? 붕대 묶은 거 안 보여요? 우리 아가씨께서 이번에 눈을 좀 다치셨나?"
"나의 기사가 삐뚤어졌구나!"
기겁하는 알레시아를 보고 레이가 낄낄거리다 표정을 굳혔다.
"제 마스터는 상태가 어때요?"
"젠킨슨 경은 제대로 회복하려면 6개월 정도는 걸릴 것 같다고 하는구나아..."
알레시아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어쨌든 회복은 가능하다고 하니 안심한 레이가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그래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따지자면 젠킨슨도 프리슬란 가문을 위해 싸운 격이니 치료는 당연히 프리슬란 가문이 책임져야 했다.
보상도 따로 마련해줄 것이라고 중얼거린 레이가 통증을 잊기 위해 몸을 꿈틀거렸다.
알레시아가 레이를 향해 불쑥 물었다.
"목이 마르진 않느냐?"
"괜찮습니다."
"배가 출출하진 않느냐?"
"괜찮습니다."
그 뒤로도 알레시아는 뭐 필요한 거 없냐고 자꾸 물어보며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꽤나 절박해보이는 알레시아를 보며 레이가 피식 거렸다.
지금의 알레시아는 금방이라도 흐물흐물 해져선 나의 기사가~ 나를 헌신짝처럼~ 따위의 앓는 한탄을 내뱉을 것 같았다.
'하긴, 뭐...'
경쟁상대를 스페라로 삼고 있는 것 같은데, 스페라가 여러모로 알레시아보다 비교우위긴 했다.
재능과 배경 등의 스펙만 따지면 알레시아와 요하나를 합성시킨다 해도 스페라보다 종합 성능이 좀 떨어지는 감이 있었다.
레이가 그딴 생각을 하고 있자 대번 알레시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나의 기사가 불경한 생각을 품고 있느니라!"
"아닙니다. 머리 울리니까 목소리 좀 낮추세요."
그러면서 놀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스페라의 호위 기사인 셰이였다.
셰이도 여기저기 부상을 입어 거동이 불편했지만 허리를 꼿꼿이 펴고 레이 앞에 섰다.
무슨 일로 찾아왔나 싶어 레이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셰이가 곧장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일전의 무례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셰이의 태도는 대단히 정중했다.
고개를 숙인 셰이를 보며 알레시아가 기세등등해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야 제대로 된...!"
빡!
"아곡!"
지팡이 같은 것에 정수리를 가격 당한 알레시아가 정수리를 감싸 쥐었다.
정수리를 세차게 비비는 알레시아를 향해 레이가 지팡이를 붕붕 휘두르며 짜증을 냈다.
"제가 이곳에서 나대지 말라고 했죠?"
"주인의 머리를 내려치는 기사가 어디 있단 말이냐아...!"
빽빽거리는 알레시아를 슬며시 훔쳐본 셰이가 눈치껏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알레시아 님께도 일전의 무례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고개를 한 번 숙였다고 내가..."
레이의 눈치를 살핀 알레시아가 조금 흐물흐물해져선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사과를 받아주도록 하겠느니라..."
레이도 지팡이를 내려놓고 대충 셰이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프리슬란 가문의 관계자와 오래 감정을 묵혀봤자 좋을 게 없었다.
셰이가 깊숙이 고개를 숙인 채로 다짐했다.
"아가씨와 저를 구명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네, 뭐...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편히 휴식 취하시길 바랍니다."
셰이가 마지막까지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
워프게이트를 수호하기 위해 건설된 프리슬란 가문의 요새.
그 요새 안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던 에른스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말해봐라."
에른스트의 눈이 레이를 치료했던 치료사를 향했다.
치료사는 압박을 느끼면서도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신체 전반에 축적된 손상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고, 특히 심장과 주변 혈관의 상태가 심각합니다. 무언가가 꾸준히 부하를 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부터 잘 관리한다고 해도 15년 이상 버티기 힘들 겁니다."
"..."
"계속해서 무리하면 10년 안쪽으로 줄어들 겁니다. 이것도 높게 잡은 것이고, 언제 급사한다 해도 이상하진 않습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에른스트가 치료사를 내보냈다.
홀로 집무실에 남은 에른스트가 마족에게서 되찾은 드래곤하트를 꺼내보았다.
"..."
에른스트는 방금 전까지 1황자의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다시 살피고 있었다.
레이는 1황자가 사도로 개화했으며, 결국 드래곤하트를 폭주시켜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고 증언했다.
황실에서 시그니 산맥으로 보낸 조사단의 보고서에도 드래곤하트가 폭주한 흔적을 발견했으며, 그 과정에서 드래곤하트가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에른스트는 이 보고서를 신뢰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착잡했다.
차라리 레이가 사도가 된 1황자를 살해한 이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드래곤하트를 취했다면, 거기까지는 어떻게든 감싸줄 수 있었다.
허나 드래곤하트는 1황자와 함께 소실됐고, 레이는 여전히 시한부 신세였다.
"..."
에른스트가 손아귀에 쥐인 드래곤하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자신의 손에 들어온 드래곤하트를 레이에게 자의적으로 내어줄 수는 없었다.
그건 명백히, 에른스트가 스스로 세워놓은 선을 넘는 짓이었다.
에른스트가 회수한 드래곤하트는 전부 황제에게 다시 바쳐질 것이다.
이후 레이가 새롭게 황위에 오른 황제로부터 드래곤하트를 하사받을 수 있을지는, 그때 가서 노력해봐야 하는 문제였다.
매만지던 드래곤하트를 품에 챙긴 에른스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워프게이트를 둘러싼 요새의 상황도 어느 정도 수습되었으니, 이제 그만 황도로 가서 황제를 뵈어야 했다.
의논해야할 문제가 아주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