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1)
170화
전투가 끝난 후.
에른스트는 먼저 딜리드 프리슬란을 불렀다.
딜리드는 왼쪽 팔이 통째로 날아가 있었으나 대충 지혈하고 에른스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에른스트 또한 딜리드의 부상은 살피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번 사태에 네 실책을 묻지 않겠다."
"..."
딜리드는 가만히 에른스트의 말을 들었다.
지금 딜리드의 실책이 정말 있었나 없었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에른스트는 실책을 묻지 않겠다고 했다.
에른스트의 성격상 어지간한 죽을죄가 아니고서야 조용히 덮고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그 대신, 지금 시키는 일을 제대로 완수 못 하면 딜리드는 정말 목이 잘릴 각오를 해야 했다.
에른스트는 딜리드에게 몇 가지 명령을 지시했고, 딜리드는 고개를 한 번 더 숙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딜리드를 돌려보낸 에른스트가 레이를 돌아봤다.
레이가 에른스트를 향해 억지로 웃음을 머금었다.
"짬이란 짬은 다 때리고 가셨으면서 좀 늦으셨군요."
"...그래, 내가 늦었구나."
에른스트는 잠시 레이를 살폈다.
그다지 상태가 좋지 못했다.
그나마 안에 받쳐 입은 내갑 덕분에 치명적인 관통상은 피한 것 같았지만, 몸에 구멍 안 난 걸 빼면 아주 엉망이었다.
눈으로 대충 훑어도 베이거나 뭉개진 곳이 수두룩했고, 안색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지만, 부상부터 치료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뇨, 말씀부터 먼저 나누시죠."
이대로 드러누워 봤자 불안해서 쉴 수도 없었다.
레이는 여전히 정신을 날카롭게 갈아내고 있었다.
아직 이곳은 레이에게 전장이었다.
지금까지 에른스트가 보여준 모습을 감안했을 때 아주 적대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진 않았지만, 만약 그리된다면 레이에겐 선택지가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레이는 가까이 다가온 루나의 기척을 느끼며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른스트가 그런 레이를 바라보다 먼저 몸을 돌렸다.
"따라오거라."
레이는 지하 광장을 벗어나 요새의 성벽 가까이로 걸었다.
레이의 뒤를 루나가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성벽 가까이 선 에른스트가 루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에른스트가 묻기 전에 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똑똑한 아이입니다. 정령을 다룰 줄 알고 백작령에서 머무는 마법사에게 마법도 조금 배웠지요.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번에 에른스트 님을 모시는 데도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에른스트가 루나를 가볍게 훑고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가 구사하는 검술을 어떤 경위로 익히게 되었는지... 네 설명을 먼저 듣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레이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필요 없는 이야기는 배제하고 각색도 조금 들어가긴 했지만, 대체로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차분히 이어갔다.
하르시아의 검술과 모로스의 경우, 리실로테가 주도적으로 마련해둔 안배를 취함으로써 얻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레이는 리실로테가 600년 전 혼란스러운 시기가 다시 도래할 것임을 예견했고, 그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준비해둔 안배의 주인으로서 나를 선택했다고, 그렇게 자신을 포장했다.
"그 후로 계속해서 타락한 자들과 맞닥뜨렸습니다."
레이는 운명을 강조했다.
하르시아의 검술과 제국의 신검을 얻게 된 후 운명처럼 맞닥뜨린 수많은 '악'들을 나열했다.
레이가 요약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나자 에른스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1황자를 네가 베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1황자가 사도로 개화했다는 증언을 확보했을 때, 리실로테 님이 남긴 조언자가 사도가 완전히 개화하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움직였습니다."
"..."
에른스트는 1황자 사건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열람했고, 레이의 증언에 하자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구멍이 쑹쑹 뚫려 있다고 판단되는 1황자 사건의 조사 결과에 레이의 증언을 더하면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허나, 그럼에도...
"넌 그때 14살이었다."
"전 그때 하르시아가 창조한 공간검의 유일한 계승자였고, 모로스를 다루었으며,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닿아 있었습니다."
에른스트는 실소가 터지려는 걸 억눌렀다.
저 허황되기 짝이 없는 소리가 거짓이 아님을, 이제는 에른스트도 알고 있었다.
에른스트는 전장 위에 선 레이를 직접 목도했다.
레이의 검격 위에는 전장을 전전한 자만이 녹여낼 수 있는 예리함과 처절함이 담겨 있었다.
레이는 그 존재 자체가 상식에 완전히 위배되고 있었다.
에른스트가 복잡한 감정을 곱씹었다.
에른스트, 그는 소드마스터였다.
에른스트는 세상의 흐름에 때로는 초월적인 존재들의 의지가 담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상은 그걸 필연이라 불렀고, 필연 속에서 태어난 존재를 숙명을 타고났다고 수식했다.
악신의 의지가 다시 세상에 내려앉기 시작한 이때, 레이라는 존재가 나타난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에른스트는 다시 어려운 시기가 찾아오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레이라는 존재가 필요했다.
"...모로스를 좀 보여줄 수 있겠느냐?"
"..."
레이는 침묵한 채 모로스를 돌려 잡아 에른스트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함정일 수 있었기에, 레이의 긴장감은 그 어느 때보다 치솟았다.
꽈악
에른스트가 모로스를 건네받아 비스듬히 세웠다.
에른스트의 손이 모로스의 검신 위를 천천히 훑었다.
에른스트는 모로스의 검신 위에 새겨진, 괴이한 형태의 글자로 새겨진 문장을 중얼거렸다.
"제국에게 영광을..."
에른스트조차 어린 시절엔 책 속에 그려진 모로스의 모습을 보며 꿈을 키웠다.
잠시 가만히 서 있던 에른스트가 레이에게 모로스를 다시 건넸다.
레이가 긴장 어린 기색으로 모로스를 건네받자, 에른스트가 레이의 어깨 위로 손을 가져갔다.
터업
"고민과... 고생이 많았을 것 같구나."
에른스트가 레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말을 이었다.
"제국의 수많은 귀족과 군대가 하지 못한 일들은 네 홀로 해냈다. 네 공로는 믿기지 않는 수준이나...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다."
영웅의 서사시라는 게 한 꺼풀만 벗겨 내도 반역죄를 덮어씌울 수 있는 법이었다.
포장만 잘하면 레이를 비롯해 필립스 백작령을 통째로 불태울 명분을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었다.
물론 레이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몸을 사리려 했다고, 에른스트는 생각했다.
"레이, 나는 제국에 충성한다. 황제 폐하를 존경하고, 또한 그분의 뜻을 존중한다."
"..."
"하지만 우리는... 로드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자들은 견제와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건 필연이기에, 억울해하지 말아야 한다."
레이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에른스트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허나 방관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고립되는 법이니."
레이의 어깨에서 손을 뗀 에른스트가 모로스를 응시했다.
"네가 하르시아의 공간검을 계승한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르시아의 공간검은 영웅의 정통성을 상징하지, 황실의 정통성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하르시아는 황족이었을 뿐, 황제조차 아니었다.
그의 존재는 신화가 되어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르시아가 황실의 상징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로스는... 제국의 신검은 명백히 황실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그러니 이건 반드시 황실에 반납해야 한다."
레이가 곧장 무릎을 꿇고 에른스트에게 모로스를 내밀었다.
결코 제국의 신검에 욕심 따위를 갖지 않겠다는 레이의 의사 표현이었다.
레이는 차라리 에른스트가 모로스를 회수해주기를 바랐으나, 에른스트는 레이에게 다시 모로스를 쥐여주었다.
"레이, 잘 듣거라. 반납은 1년 정도 미루는 것이 좋을 것이다."
"...?"
레이가 선뜻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에른스트가 설명을 덧붙였다.
"곧 황태자로 책봉될 포이보스 님은 정통성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모로스를 진상하는 것은 큰 빚을 폐하께 입히는 것과 같다."
허나 현 황제는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처럼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움직이는 과격한 방법을 취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지금 모로스를 황실에 바치면 현 황제에게 빚을 남기게 된다.
그 빚은 황제가 죽으면 사라진다.
가능하다면 황위가 포이보스에게 계승된 이후 모로스를 바치는 것이, 실리적으로 훨씬 나았다.
"황제 폐하께서 승천하실 때까지 난 최선을 다해 폐하를 보필할 것이다. 다만, 실리를 챙길 수 있다면 챙기는 것이 현명하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네가 모로스를 보관하고 있거라. 남들에겐 보이지 말고."
"하지만..."
"내가 내 사람도 통제 못 할 그릇처럼 보이느냐?"
이번 전투에서 모로스를 본 사람은 많았지만, 그중 다수가 전사했다.
또한 애초에 이 요새에 있는 사람들은 에른스트가 선별한 자기 사람들이었다.
에른스트가 작정하고 휘어잡으면 1년 정도 정보를 통제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에른스트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네 존재가 드러나면, 널 껄끄러워할 사람들이 많아질 거다. 새로 즉위한 황제 폐하께 빚을 지워두는 편이 네 자신을 보호하기 수월할 거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어두운 시기가 찾아왔을 때, 네가 충분한 공로를 세우고 황실을 향한 충성을 증명한다면... 폐하께서 네게 모로스를 빌려주실 수도 있을 거다. 그 정도 융통성은 있으신 분이니 내가 말한 대로 하거라."
"..."
"레이."
에른스트가 레이의 어깨를 다시 한 번 다잡았다.
"추후 나는 너의 공로를 잘 포장해줄 것이며, 너의 사람들을 지켜줄 것이다. 내겐 그럴 힘이 있고, 그리해줄 의지가 있다."
"..."
"그러니 너도 내 사람이 되어라."
내 사람이 되라는 건 결국 스페라와의 혼약을 의미했다.
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에른스트의 표정이 레이와 재회한 후 처음으로 구겨졌다.
충분히 알아들을 만큼 설명을 했고, 레이 또한 충분히 현명한 아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제의를 거절할 줄은 몰랐다.
당혹을 너머 분노를 느끼는 에른스트를 확인한 레이가 잠시 루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루나, 잠깐만 좀..."
"..."
분위기가 살벌하진 않았기에, 루나는 레이에게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레이가 팔찌를 사용해 방음 결계를 전개하고선 입을 열었다.
"에른스트 님, 에른스트 님도 아실 겁니다. 공간검을 계승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요."
"알고 있다."
"이건 주인을 죽이는 검입니다. 주인의 몸을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검입니다. 제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에른스트가 레이를 다시 살폈다.
탁한 눈동자를 가지고 거친 호흡을 내쉬고 있는 소년을 다시 살폈다.
심장으로부터 쿵쿵 들려오는 박동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에서 줄타기를 하는 중인지 다시 느꼈다.
레이가 에른스트의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정확히 응시했다.
"제 수명은 더 줄어들 겁니다. 인류와 제국과 나의 사람들을 위해 불태울 겁니다. 저는 에른스트 님보다 빨리 죽을 겁니다. 아마도 훨씬 빨리 죽겠죠. 그렇기에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싶진 않습니다."
"..."
"제 역할은 길을 열어주는 겁니다. 저는 거기까지 밖에 걷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 공로에 대한 대가를, 제가 스러지고 난 후 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
에른스트는 한참을 레이를 바라보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일단 가서 치료부터 받거라.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에른스트 님, 오해를 살만한 여지가 충분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차라리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을?"
"리실로테 님은 제국의 황족이 사용하는 드래곤하트로 일반인의 심장을 강화하는 방법을 연구하셨다고 합니다. 리실로테 님이 남긴 안배 중 그러한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허나 레이는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 수명을 조금 더 늘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나중에... 제가 제국을 위해 위대한 공로를 세운다면, 황제 폐하께 혹시 작은 조각이라도 드래곤하트를 하사받을 수 있을까요?"
"...넌 이미 충분한 공로를 세웠다."
사도로 개화해 제국에 막대한 혼란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는 1황자를 척살했다.
루비하 왕국에서 불순한 움직임을 보이는 세력이 제국에 손을 뻗치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그리고 오늘, 마족에게 놀아나 양단될 뻔한 제국을 구했다.
에른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면, 네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
"감사합니다."
레이가 고개를 한 번 숙이곤 몸을 돌렸다.
비틀거리는 레이를 루나가 다가와 부축했다.
슬픔으로 가득 차 어둡게 가라앉은 은색 눈동자가, 에른스트의 눈에 잠시 비치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