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169화 (169/446)

끝맺음 (4)

169화

레이는 습격을 받았을 때 스페라에게 물었었다.

에른스트가 건네주었던 이 이십면체 형태의 보석 같은 물건이 어떠한 기능을 하는지 설명해 달라고.

스페라는 굉장히 놀라면서도 답해주었다.

제국이 제국의 '결전병기'를 외부로 돌렸을 때, 그리고 그 틈을 노리고 어떤 세력이 제국을 공격했을 때.

그러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개발된 아티펙트 중 하나라고.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제국 전역에 워프게이트를 건설해 운용할 수는 없었다.

헌데 만약 워프게이트가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 결전병기에 비견되는 누군가를 파병했을 때.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그를 빠르게 불러들일 수 있는 수단이 제국에겐 절실하게 필요했다.

워프게이트 없이 워프를 행하기 위해선 대마법사라 해도 많은 준비와 시간이 소모됐다.

그렇기에 제국은 총력을 다해 아티펙트를 개발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이십면체 형태의 쌍을 이루는 아티펙트였다.

아티펙트 하나를 워프게이트에 삽입하면 다른 하나와 공명한다.

쌍을 이루는 두 아티펙트는 공명을 통해 비관성 좌표계 위에 서로의 공간 좌표를 일시적으로 고정시킨다.

그를 통해 아티펙트를 소유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을 워프게이트로 불러올 수 있었다.

에른스트는 그 쌍을 이루는 아티펙트 중 하나를 레이에게 건넨 것이었다.

레이는 스페라의 이야기를 듣고 결정했다.

더 적은 희생으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전력을 알 수 없는 마족을 확실하게 참살하기 위해, 또한 루나의 힘을 마지막까지 숨기기 위해.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전장을 워프게이트 앞으로 옮기고자 했고, 결국 성공했다.

"..."

레이의 곁에 선 에른스트의 품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에리다누스는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과거 수천이 넘는 정예병을 상대로도 홀로 맞서 싸워 귀환했던 그 위대하고 끔찍했던 마족이,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했다.

단 두 사람, 단 두 사람이었다.

단 두 사람을 마주했을 뿐이지만... 에리다누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곳에 제국이 서 있었다.

"..."

에리다누스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곳에 그 누구도, 에리다누스를 도망가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에리다누스는 투쟁해야만 했다.

인간과 마족의 관계에선 투항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선택지는 단 두 가지였다.

죽거나, 죽이거나.

에리다누스는 이제까지 죽여왔다. 혹은 죽이지 못하고 도망쳤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허나 에리다누스는 이 장소에서 도망치지 못하리란 것을 직감했다.

"..."

에리다누스가 자꾸만 뒷걸음질을 쳤다.

레이와 에른스트는 더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콰앙!!!

레이와 에른스트가 동시에 지면을 박차고 가속했다.

에리다누스가 반사적으로 수십 개의 마법진을 전개했다.

위대한 분의 축복 아래 회복되었던 마나가 소진되며, 전개된 마법진들로부터 검은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나 그건 에리다누스의 실책이었다.

그런 식으로 마나를 낭비하면 안 되었다.

마법을 발현할 거면, 훨씬 정밀하고 신중하게 사용했어야 했다.

트드드득!!

소드마스터의 절대권역이 펼쳐진다.

절대권역 안에서 에른스트는 마나에 대한 압도적인 지배권을 행사한다.

주위의 마나가 요동치더니 검은 물을 뚝뚝 흘리던 마법진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바스러지고 뭉개지는 마법진들을 보며 에리다누스가 뒤늦게 마나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허나 늦었다.

이미 절반 이상의 마법진이 무너져 내리더니 빛의 칼날로 변형되었다.

에른스트의 의지가 뒤섞인 거대한 빛의 칼날이 에리다누스가 서 있던 공간을 폭격했다.

카가가가가각!!!!!!!!

섬광이 번쩍이며 지면이 두부처럼 갈려나갔다.

삽시간에 걸레짝이 된 에리다누스가 뻗어나온 촉수로 바닥을 기어서 폭격을 피해 도망쳤다.

그꼴이 흡사 하찮은 벌레 같았다.

에른스트가 자신의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검이 그려낸 반원의 궤적을 따라 벽이 폭발하듯 깊게 파였다.

콰가가가가가가각!!!!!!

굉음이 울리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번졌다.

방금의 일격 탓에 다리가 통째로 잘려나간 에리다누스가 촉수를 재생해 지면을 내디뎠다.

에리다누스가 어떻게든 뒤로 물러서려고 발악하던 찰나 머리 위의 공간에 실금이 새겨졌다.

쫘악!!!

공간이 갈라지며 도약 검기가 떨어져 내린다.

그와 동시에 레이가 시야를 흐리는 먼지 구름을 뚫고 에리다누스에게 돌진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레이를 보며 에리다누스가 광분했다.

"네놈이!!!!!!!"

쩌엉!!!!!!

폭풍의 한가운데서 에리다누스는 도약 검기 탓에 온몸이 찢겨나가면서도 레이의 검격을 막아냈다.

에리다누스가 다시 마법을 발현했다.

에리다누스의 손에 쥐인 드래곤하트로부터 뜨거운 화염이 쏟아져 나와 레이를 덮쳤다.

화르륵!!

뒤로 한 걸음 물러선 레이가 코어와 서클을 한계까지 회전시켰다.

서클로부터 발산된 냉기가 화염을 잠시 막아낸 순간.

레이가 전력을 다해 두 검을 교차시켜 베었다.

촤악!!!!!

검압에 의해 일순 화염 폭풍이 밀려나며 그 너머에 있는 에리다누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잠깐의 틈새를 섬광이 파고들었다.

삽시간에 에리다누스와 맞닿은 에른스트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건."

에른스트의 검이 에리다누스의 어깻죽지를 향해 휘둘러졌다.

"더러운 오물이 손을 대도 될 물건이 아니다."

쫘아아아아악!!!!!

에른스트가 그린 반원의 궤적이 에리다누스의 어깻죽지를 잘라냈다.

드래곤하트를 쥐었던 팔을 통째로 잃은 에리다누스가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악!!!!!!!!!"

에리다누스는 괴성을 지르며 재차 이해했다.

저 둘과 동시에 맞서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설령 이곳이 마경의 가장 깊숙한 곳이라 해도 저 둘을 상대로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도주해야했다. 어떻게든 도주해야 했다.

허나 도주할 수 없었다.

기적적으로 이 지하 광장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해도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지역은 제국의 한복판이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에게 쫓기면서 어찌 제국의 한복판에서 무사히 도주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 가지도 못해 쏟아져 들어오는 제국의 지원군과 맞닥뜨릴 게 뻔했다.

그나마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선택지는, 지하 광장에 있는 워프게이트의 탈환이었다.

당장은 제어권을 강탈당했으나 에리다누스의 실력이라면 단숨에 제어권을 되찾아 워프게이드를 가동시킬 수 있었다.

어떻게든 저기까지 도달해, 제어권을 강탈해 간 저 빌어먹을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를 죽이고...

소녀를 죽여...?

정말 죽일 수 있나...?

저건 수십의 뛰어난 마법사가 몇 시간에 걸쳐서야 간신히 해제할 수 있는 봉인을 홀로 박살내버린 존재였다.

저것도 괴물이다. 어쩌면 이 공간에서 가장 위험한 괴물이었다.

적어도 에리다누스가 단숨에 찢어발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은 확실했다.

도망갈 길이 없다. 도망갈 길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공포가 에리다누스를 잠식했다.

과거가 대부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길었던 삶이었는데, 그 삶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워, 에리다누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방황하는 에리다누스를 향해 에른스트가 짓쳐 들었다.

에리다누스는 위대한 분의 축복을 갈구하며 계속해서 발악했다.

에른스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에리다누스는 수십의 마법진을 중첩시켜 충격을 흡수했고 촉수를 무한히 증식시켜 중요한 기관을 보호했다.

그 순간 레이의 검격이 허공을 갈랐다.

쫘악!!!!

언뜻 보아선 아무것도 베어내지 못한 것 같았다.

허나 레이의 검격은 에리다누스와 이어져 있던 '위대한 분'과의 연결을 잠시잠깐 끊어버렸다.

그 찰나의 틈을 에른스트의 참격이 파고들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참격이 에리다누스의 상체를 양단했다.

콰가가가가가가각!!!!!

에리다누스를 이루던 몸의 절반이 소멸했다.

처음보다 훨씬 작아진 에리다누스가 지면을 굴렀다.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중상을 입은 에리다누스가 비명을 질렀다.

이제는 위대한 분이 내려준 축복조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에리다누스는, 위대한 분이 자신을 포기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슴을 가득 메운 공포가, 몇백 년 전에 망각했던 수많은 감정들을 하나하나 되살렸다.

그 모든 감정이 촉매가 되어 비대해진 공포를 더욱 선명히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검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죽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죽고 싶지 않았다.

에리다누스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육체를 포기하고서라도, 설령 수백 년의 시간을 암흑 속에서 홀로 보내게 된다 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매었다.

그때 레이가 다가왔다.

온몸을 가득 메운 상처로부터 흘러나오는 고통 탓에 숨을 헐떡이면서도, 레이는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뚜벅뚜벅 걸어 에리다누스에게 다가갔다.

레이가 검을 들어 올린다.

검을 둘러싼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빛나는 섬광을 사방으로 내뿜었다.

이 검엔, 하르시아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갈기갈기 찢어발겨도 온갖 수를 써서 언젠가 부활해 되돌아오곤 하는, 그런 빌어먹을 존재들을 죽여버리고 말겠다는 그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상위차원에 도약된 채 현실에 고정된 이 검은 육체와 함께 그 안에 담긴 영혼까지 부수고 베어낸다.

제국 역사의 정점이 창조해낸 저 검에 의해 수많은 악한 존재들이 영구히 소멸했다.

에리다누스가 공포에 미쳐 비명을 지르며 레이에게 돌진했다.

"하르시아!!!!!!!!!!!!!!!!!!"

뿌드득!

레이가 제국의 신검을 내리그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에리다누스의 육체와 함께, 그것의 영혼이 바스러진다.

바스러진 영혼이 조각조각 나누어지다 못해 가루처럼 분쇄되어 흩날렸다.

그것이 에리다누스의 최후였다.

제국의 신검이, 600년을 넘어섰던 에리다누스와의 악연을 끝맺었다.

반으로 갈라진 에리다누스의 육체가 비틀대다 스러졌다.

검게 타락한 육체가 결국 움직임이 멎었다.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누군가가 팔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살아남은 인간들의 함성이 반쯤 무너져내린 지하 광장을 계속해서 울렸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신화로 기록될 역사의 한가운데에 서 있음을.

부상자를 챙기면서도, 사망자를 수습하면서도 격양된 함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들은 제국을 부르짖고, 제국의 소드마스터를 찬양하고, 또한 레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모두가 괴성을 내지르고 있는 사이, 루나가 레이에게 다가갔다.

레이는 루나에게 힘을 숨겨달라고 부탁했다.

나 홀로 막지 못할 재난이 찾아왔을 때, 그때 너의 힘을 빌려달라 부탁했다.

그렇기에 루나는 레이에게 다가갔다.

레이는 루나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에른스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나의 전투가 끝났다.

하지만 레이는 아직 전장 위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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