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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68화 (168/446)

끝맺음 (3)

168화

백색의 구슬이 검붉게 물들었다가 마족을 집어삼켰다.

터져나오는 빛줄기에 지하 광장이 하얗게 물들었다가 되돌아왔다.

레이가 만들어낸 광경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기에, 마족을 경험해본 적이 없던 인간들의 눈엔 에리다누스가 완전히 소멸한 것처럼 보였다.

폭풍이 지나가고 고요한 열기가 지하의 광장에 내려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레이를 향하고 있었다.

모하메드와 젠킨슨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둘 다 완전히 무사하진 못했다. 특히 젠킨슨은 다리 하나가 반쯤 뭉개졌는데, 지금 가슴을 메운 복잡한 심경이 뭉개진 다리 때문은 아니었다.

모하메드와 젠킨슨은 처음으로 레이가 전력을 다해 맞서 싸운 전장을 끝까지 함께하고 지켜봤다.

모하메드와 젠킨슨은 레이가 이제까지 견뎠을 중압과 레이가 그동안 겪었을 고통을 그제야 작게나마 이해했다.

경이와,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착잡한 웃음으로 번졌고, 한편으론 뒷일이 걱정됐다.

"..."

지하 광장 한구석에서, 요하나는 멍하니 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손을 앞으로 뻗어본 요하나가 중얼거렸다.

"너무 멀어."

너무 멀어서, 널 따라잡을 수가 없다.

네가 떠나기 전에 널 잡아챌 자신이 없다.

요하나는 언젠가 레이가 속삭여주었던 바람을 곱씹었다.

열심히 해서 더 빠르게 강해져야 한다고, 더욱 노력해서 해서 날 빠르게 뛰어넘어야 된다고, 레이는 그리 말했었다.

"멍청이."

요하나는 무책임한 레이의 부탁과, 여전히 무력해 빠진 자신에게 화가 났다.

"..."

툴툴대는 요하나 옆에서 카렌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레이가 입은 상처 탓에 속이 울렁거렸고, 또한 레이가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져 가슴이 공허했다.

예쁘장한 얼굴 말고는 가진 게 없는 시골 처녀와 모두가 우러러보는 소년과의 괴리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다가와 미래를 두렵게 했다.

모두의 환호를 받는 레이를 카렌은 계속 바라보기 버거워 고개를 돌렸다.

스페라는 뒤늦게 잡았던 대검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주저앉아 실소했다.

웃음을 참아보려 해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야, 이게..."

첫만남을 가질 때, 증조부님이 웬 촌뜨기를 주워왔나 싶어서 머리를 싸매고 만나러 갔다.

내심 불만을 가지고 만난 것치곤 상대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의 재능에 놀랐고, 마음을 열고 소통해보려는 노력도 했다.

그러다가 진심인지 연기인지 모를 모자란 모습을 보며 실망도 많이 했다.

천한 출신을 어쩔 수 없다고, 그런 생각도 속에 담았었다.

"대체 뭔데요."

스페라가 강하게 뛰는 자기 가슴을 부여잡으며 웃었다.

동화책에서 보았던 왕자님과의 만남이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그런 유치하고 낯부끄러운 생각이 스친 탓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 하나로는 지참금이 부족할 것 같네요."

영웅이 되어 과거의 신화를 이어갈 소년을 붙잡기 위해선 더욱 많은 것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스페라는 그걸 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은은히 내려앉았던 열기가 이내 힘찬 환호로 변했다.

누군가는 지면에 검을 박아넣은 채 무릎을 꿇었고 누군가는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제국에게 영광을.

함성이 커졌다.

들끓는 함성 속에서 데런이 활짝 웃었다.

과거에나 지금에나 레이는 데런의 영웅이었다.

다만 데런은 간간이 불안해지곤 했다.

시골 바닥을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을 때 레이의 위대함이 빛을 잃고 퇴색할까 봐, 그래서 자신의 영웅을 잃을까 봐 걱정하곤 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는 세상에 나가서도 모두의 영웅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언제가 데런이 레이와 헤어진다 해도, 데런은 레이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형님이라 불렀던 기억을 평생 기억하며 자랑할 것이었다.

데런이 주먹을 쥐고 하늘로 뻗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들끓는 함성이 길게 이어지는 가운데, 정령을 소환해 비전투 인력을 지키던 알레시아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의 기사가 표정이 좋지 않구나."

그 순간 레이가 팔을 위로 반쯤 들어 올렸다.

높아만지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너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던 사람들은 레이가 말한 '너희들'이 자신들을 칭하는 줄 알았다.

허나 아니었다.

레이의 시선이 깊게 파인 동공의 가장 어두운 곳을 정확히 향했다.

"너무 끈질겨."

철벅!

동공에서 검은 덩어리가 걸어나왔다.

에리다누스의 상체는 절반 가까이가 바스러져 있었다.

에리다누스는 손상을 바로 회복하지 못했다.

곁가지야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주요 기관이 파괴되면 바로 재생은 불가능했다.

허나 에리다누스는 마족이었기에, 인간이라면 진작 즉사해야 할 손상을 버티며 레이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위대한 분께서..."

에리다누스는 소모되었던 마나가 급격히 차오름을 느꼈다.

걸음을 걸을수록 다리에 힘이 실렸다.

"너의 죽음을 원하신다."

에리다누스는 위대한 분의 축복을 느꼈다.

비록 마경에서의 전력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전능한 힘이 몸을 전율시켰다.

레이는 에리다누스를 가만히 응시했다.

저게 로드 급의 2할밖에 안 되는 전력은 절대 아니었다.

최소 4할을 넘어섰고, 또한 적은 드래곤하트의 조각을 고도로 잘 다루었다.

레이는 말없이 지면에 박혀있던 제플린의 오메가 시리즈를 뽑아들었다.

강대한 힘을 가진 두 존재가 재차 격돌했다.

쩌엉!!!!!!!

핏물이 사방으로 번진다.

요하나와 스페라가 반사적으로 검을 들고 에리다누스를 향해 돌진하려 했다.

모하메드와 셰이가 둘을 뒤로 당겨 내동댕이치며 뛰쳐나갔다.

몇 남지 않은 마법사와 성기사가 남은 힘을 짜내 에리다누스에게 쏟아부었다.

허나 에리다누스는 마법사들의 마법을 단숨에 파훼하거나 상쇄했고 미약한 신성력은 위대한 분에게 받은 축복으로 뭉개버리며 레이에게 집중했다.

이미 신체에 상당한 손상을 입을 레이가 계속된 에리다누스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섰다.

곧장 마법을 발현해 레이에게 퍼부으려던 에리다누스에게 그래듀에이트 셋이 어깨부터 들이밀며 검을 휘둘렀다.

콰가각!!!!

모하메드, 셰이, 그리고 딜리드 프리슬란이 전력을 쏟아냈다.

에리다누스를 감싼 촉수가 단번에 잘려나갔으나 에리다누스는 개의치 않고 마법진을 그려 검붉은 화염을 쏟아냈다.

끝나지 않는 전투 속에서 희생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인간들이 아무리 병기를 휘둘러 상처를 입혀도 에리다누스는 다시 불길한 기운을 흘리며 일어섰다.

목숨을 아끼지 않던 기사들도 급격히 정신이 마모되어 갔다.

마족은 여전히 600년 전의 신화와 다를 바 없이 끈질겼으나,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그저 기록물로 과거를 접했을 뿐이었다.

몸으로 경험치 못했던 불가사의한 불사성은 강철 같은 의지를 부식시키고 억지로 숨겼던 공포를 비대하게 살찌워 숨을 막히게 했다.

에리다누스가 하나 된 눈알을 굴렸다.

인간의 체력과 정신은 그 한계가 명백하고, 레이를 돕던 병력들은 시시각각 줄고 있었다.

그에 반해 위대한 분의 축복을 내려받은 에리다누스는 불사신과 같았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 조금만 더 인간들에게 피해를 누적시키면 상황을 일방적으로 주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에리다누스는 레이를 극히 경계했다.

레이는, 그 어떤 참담한 역경 속에서도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존재였다.

에리다누스는 상황이 불리해지면 곧바로 워프게이트를 이용해 도주할 생각이었다.

현재 워프게이트의 제어권은 에리다누스에게 있었고, 에리다누스의 실력이라면 스스로를 마경 인근으로 확실하게 전이시킬 수 있었다.

물론 반대쪽에 워프게이트가 없는 상태에서 육체를 전이시키면 온몸이 찢겨나가겠지만, 에리다누스의 육체는 그만한 부상을 죽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다.

퇴로를 미리 확보해 두었던 에리다누스는 워프게이트로 잠시 눈을 돌렸다가 덜컥 굳었다.

"...?"

푸른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 닿은 게이트의 설정 값이 급격히 뒤틀리고 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에리다누스 본인이 직접 조작하고 봉인해둔 워프게이트였다.

그 봉인을 풀기 위해선 뛰어난 마법사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몇 시간은 걸려야 했다.

헌데 에리다누스의 지식과 권능이 모조리 발휘되어 이루어진 봉인이 단 한 명의 소녀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졌던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소녀는 에리다누스의 봉인을 거의 완전히 부숴버렸다.

"...!!!"

다급해진 에리다누스가 방어적인 태도를 버리고 워프게이트를 향해 돌진했다.

기습적인 움직임이었지만, 레이는 에리다누스가 그리로 움직이리란 걸 이미 꿰뚫고 있었다.

돌진하는 에리다누스의 앞을 레이가 막아선다.

쩌엉!!!!!!!!!!!

서로의 핏물이 비산했다.

레이의 어깨에서 터져 나온 선혈이 루나의 얼굴을 철썩 때렸다.

레이가, 에리다누스를 보며 조소했다.

"말했잖아."

"...!!"

"나는 널 놓치지 않을 거라고...!!"

에리다누스가 다시 워프게이트를 향해 하나 남은 눈을 돌렸다.

피를 뒤집어쓴 루나가 악의에 가득 찬 얼굴로 에리다누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에리다누스를 노려보며, 이십면체 형태의 보석을 닮은 아티펙트를 게이트에 삽입했다.

에리다누스는 저 아티펙트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저 아티펙트는 한 쌍으로 이루어져 서로 공명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한쪽을 게이트에 삽입하면, 다른 한쪽과 공명하며 서로의 좌표를 공유한다.

저 너무나도 귀한 아티펙트의 짝이 되는 물건을 누가 가지고 있을지는 명백했다.

"비켜라!!!!!!!"

에리다누스가 괴성을 질러내며 레이를 밀쳤다.

강철보다 단단한 수십 개의 촉수가 레이를 향해 쏟아졌다.

허나 레이는 제자리서 비키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다 못해 몸으로 촉수와 마법을 막아내면서까지 제자리서 버티며 웃음을 토해냈다.

그 광기 어린 모습을 보며 남은 기사들도 달려들어 에리다누스를 밀어냈다.

루나는 그들의 뒤에서, 생채기 하나 입지 않고 핏물만을 뒤집어썼다.

루나는 구역질을 느끼며 안면을 뒤덮은 눈물과 핏물을 긁어냈다.

레이가 부탁한 일은 이제 전부 마쳤다.

워프게이트가 가동된다.

레이가 모로스를 하늘 높이 들었다가 일직선으로 내리그었다.

쩌엉!!!

발악하던 에리다누스가 레이의 일격을 완전히 상쇄치 못하고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워프게이트가 가동되며 공간을 잇는 통로가 생성된다.

너무나 작고 불안정해 기껏해야 단 한 사람만 통과 가능한 통로였다.

그리고...

저벅

워프게이트 너머로부터 한 노인이 발을 내디뎠다.

워프게이트를 주시하고 있던 모두가 한순간 숨을 죽였다.

워프게이트 너머에서 나타난 노인이,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상황을 살피고는 말없이 걸어가 레이의 곁에 섰다.

노인의 품에서 검이 뽑혀 나온다.

현 제국의 정점과, 제국 역사의 정점을 계승한 후계가, 동시에 같은 적을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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