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맺음 (2)
167화
본래 브랜틀리를 따랐던 자들이 가장 선봉에서 에리다누스에게 돌진했다.
이게 그들이 죄를 씻고 목숨이라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또한 옳은 길이었다.
몰려오는 군세를 보며 에리다누스가 마법을 사용했다.
드래곤하트가 매개체가 되어 뜨거운 화염 폭풍이 몰아쳤다.
화르륵!!
마법을 사용한 에리다누스의 안면까지 뜨거운 열기에 뒤덮였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에리다누스의 콧잔등에 살얼음이 얼어붙었다.
"!"
촤악!!!
코어와 서클을 한계까지 활성화시킨 레이가 화염을 뚫고 들어가 검을 휘둘렀다.
제국의 신검과 제플린의 오메가 시리즈가 그려낸 궤적이 에리다누스를 중심으로 교차했다.
쩌억!!!
두 팔로 레이의 검격을 막아낸 에리다누스가 벽에 반쯤 틀어박혔다.
그 상태로 벽을 긁어대며 수십 미터가 넘게 밀려난 에리다누스가 벽에서 몸을 뽑아냈다.
레이의 검격을 막아낸 에리다누스의 두 팔은 완전히 짓이겨져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언뜻 무력화된 것처럼 보이는 에리다누스를 향해 기사들이 들개처럼 달려들었다.
그 찰나 에리다누스의 사지가 꾸물꾸물 요동치더니 수십 개의 촉수를 뽑아내 사방으로 쏘아냈다.
뻐어억!!
촉수는 너무도 쉽사리 갑옷과 인간의 육신을 관통했다.
촉수를 우습게 보고 접근했던 기사 세 명이 온몸이 관통당한 채 축 늘어졌다.
허나 그 경악스러운 광경을 보고도 기사들은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쫘아악!!!
기사들이 발현한 검기와 검강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칼날이 촉수를 베어냈다.
에리다누스가 급히 뒤로 물러서며 지면을 내려찍었다.
마법진이 지면 위에 떠오르더니 폭발과 함께 흙더미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콰아앙!!!
폭발에 휘말린 기사들이 제자리서 다리를 박아넣고 버티다가 나뒹굴었다.
기사들이 폭발의 충격을 흡수해준 사이 레이가 그들을 지나쳐 에리다누스를 향해 돌진했다.
다가오는 레이를 응시하던 에리다누스의 눈가가 옆으로 길게 찢어지며 콧잔등마저 벗겨 냈다.
에리다누스의 두 눈동자가 가운데로 몰려 하나로 합쳐지더니 검은 물을 주르륵 흘렸다.
끄드득!!
에리다누스를 바라보던 레이의 시야가 뒤틀렸다.
갑자기 서로의 거리가 고무줄처럼 늘어나더니 이내 레이의 시야에 담긴 에리다누스의 모습이 점처럼 변했다.
레이가 걸음을 멈추자 칠흑 같은 어둠이 주위에 내려앉았다.
촤악!!
어둠 속에서 촉수가 튀어나왔다.
철갑조차 우습게 뚫어버리는 촉수가 전방위에서 꾸물대며 레이의 시야를 뒤덮었다.
끔찍한 광경을 앞에 두고 레이는 권능을 사용한 채 횡으로 공간검을 휘둘렀다.
상위 차원으로 도약했던 검기가 떨어져 내리자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왜곡된 공간이 바스러졌다.
까가각!!!
뒤덮였던 어둠이 물러가며 레이의 시야가 본래대로 환원됐다.
레이가 에리다누스를 응시하며 조소했다.
"내 앞에서 공간으로 장난질을 쳐?"
"아, 넌 정말 끔찍한 존재야."
에리다누스가 진저리를 치는 시늉을 함과 동시에 촉수 수십 개가 울긋불긋 물들며 두껍게 팽창했다.
한계까지 팽창한 촉수가 폭탄처럼 터져나갔다.
콰앙!!!!
"!!"
폭발이 몸을 덮치기 전 레이가 망토를 방패처럼 내밀었다.
걸쭉한 육편들이 망토에 들러붙으며 레이를 세차게 밀어냈다.
부정한 기운이 레이가 서 있는 공간을 휩쓸었지만 드래곤 가죽으로 이루어진 망토의 항마력이 레이를 지켜냈다.
폭발이 만들어낸 폭풍이 가라앉기도 전에 레이가 지면을 찍어 밟으며 망토의 추력까지 이용해 앞으로 전진했다.
에리다누스의 모든 정신이 레이를 향해 있는 사이.
기사들이 재차 에리다누스를 포위한 채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가각!!!!
에리다누스의 촉수가 기사들의 검을 받아냈다.
에리다누스의 촉수로부터 어느새 검은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기사들은 당황했다.
촉수에서 묻어나온 살점이 칼날에 들러붙자 칼날이 통째로 녹이 슬며 급격히 부식됐다.
무기를 희생해가며 촉수를 베어내도 잠시 뒤면 잘려나갔던 촉수가 멀쩡히 재생됐다.
용맹하다 이름 높은 전사조차 주춤할 광경이었으나 단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에리다누스에게 맞섰다.
검이 부러지면 검 자루를 역수로 쥐고서라도 휘둘렀고, 모든 병기가 바스러지면 갑옷 조각을 주먹에 쥐고서라도 에리다누스를 붙들고 늘어졌다.
"..."
에리다누스는 잡병들에게 생각보다 시간이 끌렸다는 걸 깨닫고 수십 개의 촉수 위로 하나하나 마법진을 전개했다.
마법진이 발광하려던 찰나 허공을 찢고 떨어져 내린 도약 검기가 촉수를 잘라냈다.
카가각!!
잘려나간 촉수가 꾸물거리다 녹아내렸다.
기사들이 충분히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기세를 정비한 레이가 공중에 몸을 띄웠다가 에리다누스를 향해 추락했다.
에리다누스가 레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삽시간에 에리다누스의 코앞까지 도달한 레이가 에리다누스가 수작을 부리기도 전에 모로스를 사선으로 휘둘렀다.
쫘아아아악!!!!
에리다누스의 육체가 뭉개지다 못해 완전히 양단됐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으나 레이는 도리어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검을 휘두를 때 느껴진 반발이 너무나도 적었다.
촉수의 강도를 생각하면 이리 쉽게 잘려나가선 안 됐다.
"...!"
양단되어 넘어가는 에리다누스의 육체 너머로 검은 덩어리가 뒤늦게 레이의 시야에 비쳤다.
레이는 그제야 에리다누스가 필요없는 껍데기를 탈피하고 뒤로 물러섰음을 깨달았다.
에리다누스의 본체인 검은 덩어리는 인간의 형상을 닮아있었으나 전신에 기포 같은 게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에리다누스는 액체처럼 미끄러지며 거리를 벌리더니 질척이는 손으로 지면을 짚었다.
우우웅--!!
에리다누스가 지닌 막대한 양의 마나가 한순간에 소진되며 미리 준비해두었던 마법진에 동력을 공급했다.
활성화된 수십 개의 마법진이 동시에 허공으로 떠오르며 검은 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레이가 마법진의 전개를 방해하기 위해 도약 검기를 쏘아냈다.
에리다누스가 그 혐오스럽고 기괴한 몸뚱이를 이리저리 움직였으나 공간을 찢고 나타나는 도약 검기를 전부 회피할 수는 없었다.
콰가가각!!
도약 검기에 직격당한 에리다누스의 육체가 크게 비틀렸다.
촉수는 대부분 잘려나갔으며 신체 곳곳에 깊게 파인 상흔에서 기포가 부글부글 끓었다.
레이는 에리다누스가 마법진을 발현하기 위해 힘을 소비한 탓에 재생이 느려졌음을 간파하고 재차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 찰나 에리다누스가 발현한 마법진의 중앙에서 드래곤하트가 빛을 발했다.
으드드득!!
드래곤하트가 일종의 촉매 역할을 하며 마법진이 활성화되는 속도를 크게 가속시켰다.
꿀렁이던 마법진이 심연의 힘과 융합되며 변이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십 개의 마법진이 하나로 합쳐지더니 속이 텅 빈 원형의 마법진이 생성됐다.
쯔즈즈즈즈즈즈즉!!
마법진으로부터 검은 물이 폭포처럼 쏟아짐과 동시에 화염에 휩싸인 검고 거대한 손아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불길한 기운을 품은 손아귀였다.
아낌없이 스스로를 희생하며 달려들던 기사들조차 일순 몸을 굳혔다.
레이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고 거대한 손아귀를 보며 제플린의 오메가 시리즈를 지면에 박아넣었다.
"후우..."
레이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른 심장이 가슴을 쿵쿵 때렸다.
레이는 잠시 눈을 감은 채 자신에게 주어진 검술이 무엇인가 되돌아보았다.
"하르시아... 당신이 서 있던 전장의 풍경이 보여."
이제는,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하르시아가 어떤 의지와 갈망을 담아 이 검술을 창조했는지, 하르시아가 대체 무엇을 갈망했기에 삶을 깎아가면서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였는지.
그날의 하르시아가 품었을 감정의 격류를 레이는 이제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레이가 두 손으로 모로스를 움켜쥐었다.
검을 집어삼킬 듯이 요동치던 검강이 다시 한 번 압축되기 시작했다.
까드드드드드득!!
은백색의 검신을 타고 기어 올라간 검기 다발이 검 끝에 이르러 변화를 일으켰다.
검기 다발은 서로를 할퀴고 찍어누르며 스스로 붕괴된 끝에 구체 형태로 집약됐다.
푸르게 빛나며 심장처럼 쿵쿵 고동치던 검 끝의 구체가 백색으로 물듦과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건 마치 새하얀 구슬처럼 보였다.
가죽이 벗겨진 에리다누스의 흉측한 얼굴 위로.
처음으로 당혹감이 드러났다.
"초월의 경지에 들지도 못했으면서... 그 기술을 쓰는 건가?"
에리다누스의 당혹에 레이가 웃음으로 답했다.
모로스가 휘둘러지며, 백색의 구슬이 레이의 품을 떠났다.
으드드득!!!
백색 구슬은 레이의 품을 벗어나자마자 변화를 일으켰다.
백색 구슬을 감싼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백색 구슬의 중심부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공간에 진입한 모든 물질이 백색 구슬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한 채 낱낱이 분해되어 하나로 압축됐다.
백색 구슬을 감싸고 있던 풍경에 쩍쩍 금이 간다.
이제는 사람의 시야에 제대로 담기지도 않는 백색 구슬이 검은 손아귀와 맞닿았다.
빠드드드득!!!
힘껏 펼쳐졌던 검은 손아귀가 급격히 오그라들었다.
날카롭게 뻗어나왔던 손가락이 뚝뚝 떨어지며 꺾이고 접혔다.
본래의 형태를 잃고 마나의 덩어리처럼 변해버린 검은 손아귀의 잔해가 백색 구슬의 중심부로 뒤틀려 수축됐다.
타락한 마법조차 파괴하고 잡아먹은 구슬은 더이상 새하얗지 못했다.
검붉게 변해버린 구슬이 방해되는 모든 걸 부수고 잡아먹으며 나아가 에리다누스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쩌엉!!!!!!!!
빛이 터져 나왔다.
귀를 망가뜨리는 굉음이 지하 광장을 강타했다.
구슬이 만들어낸 폭발의 범위는 넓지 않았으나 폭발에 휩쓸린 구역은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통째로 증발했다.
터져나왔던 섬광이 간신히 가라앉았을 때.
지하 광장 끄트머리에 구형의 동공(洞空)이 새롭게 생겨나 있었다.
모두가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봤다.
동화책을 읽고 망상 속에서나 구현해보았던 그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며 멍하니 눈시울을 붉혔다.
단지 레이만이, 후폭풍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가 피를 게워냈다.
"커헉...!!"
비틀려 쥐어짜이는 듯한 부하가 신체를 강타했다.
혈관에서 터져 나온 핏물이 전신의 피부 위를 붉게 물들였다.
하르시아가 창안한 고유한 비기라는 게 죄다 이 꼴이었다.
위력은 범접 불가했지만 사용자의 몸을 급격히 망가뜨렸다.
레이는 핏물을 게워내며 비틀거리다 다시 몸을 세웠다.
레이의 시선이 새롭게 생겨난 동공을 향했다.
그 섬뜩한 시선을 받은 검은 존재가 어둠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낮게 흐느꼈다.
"공포스럽구나..."
아직 초월의 경지에 이르지도 못한 주제에 이만한 힘을 사용한다.
미래를 꿈꾸어야 할 소년이 너무도 쉽사리 자신의 삶을 깎아가며 검을 휘두른다.
그 압도적인 재능과 그 맹목적인 의지가 에리다누스에게 다시금 과거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하르시아조차 초월의 경지에 다다르기 전 저토록 무모하고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시간을 주면... 저건 분명 하르시아를 초월할 것이다.
하르시아를 초월해, 그가 이루지 못했던 비원을 남은 삶을 전부 태워서라도 이루고자 할 것이다.
저건 언젠가는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하겠지만, 그게 대체 언제가 될지 에리다누스는 알 수 없었다.
진정한 초월의 경지에 발을 디디기 전에 저걸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그게 지금 악신이 새롭게 내린 에리다누스의 사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