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166화 (166/446)

끝맺음 (1)

166화

레이가 검을 휘두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정제된 마나가 두 자루의 검을 타고 올라 검강의 형상을 이루자마자 허공에서 증발했다.

레이를 바라보던 모두가 여전히 불신이 섞인 눈으로 사라져버린 검강의 행방을 쫓았다.

다음 순간.

검강으로부터 분리된 수십 개의 도약 검기가 공간을 찢고 사방에 떨어져 내렸다.

포로들에게 인접해있던 브랜틀리의 기사들이 코앞에 나타난 도약 검기를 보고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가가가각!!!

폭음이 울리고, 도약 검기에 직격당한 기사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채 땅을 굴렀다.

그게 신호가 되었다.

지휘관 중 그 누구도 움직이란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요새의 방어군들은 짐승의 비명을 닮은 함성을 내지르며 일시에 돌진했다.

심장에 코어조차 없는 하급 병사도 방어군 전부를 이끄는 지휘관도 레이가 치켜든 섬광에 이끌려 몸을 던졌다.

요새의 방어군이, 혼란에 빠져 시간을 낭비한 브랜틀리의 병력과 충돌했다.

카가가가가각!!!!!

삽시간에 병기가 뒤섞이며 비명과 선혈이 낭자했다.

워프게이트를 수호하듯 진을 치고 있던 브랜틀리의 병력이 크게 출렁였다.

객관적인 전력은 분명 브랜틀리의 병력이 앞섰다.

그래듀에이트만 네 명이 존재했고 고위 마법사와 성기사를 비롯한 고급 병종의 조합이 완벽히 갖추어져 있었다.

허나 요새의 방어군은 광기 어린 눈빛으로 적들을 찍어눌렀다.

그들은 도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르시아와 함께한 신화 속 군단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덮어씌운 채 병기를 휘둘렀다.

죽음의 두려움조차 망각한 광인들이 적의 살점만을 갈망하며 목숨을 던졌다.

그리고, 피바람이 불어닥친 전장을 향해 레이가 몸을 기울였다.

콰앙!

"?!"

브랜틀리를 돕던 그래듀에이트가 방어군을 막아내다 말고 몸을 급히 돌렸다.

레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듀에이트는 머리를 어지럽히는 혼란을 억지로 집어삼킨 채 레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찬란히 빛나는 검강이 서로를 베어내고자 충돌했다.

콰가각!!!!!

모로스를 막아낸 그래듀에이트의 상체가 옆으로 크게 꺾였다.

서로의 검에 맺힌 검강의 형상은 비슷했으나 그 위력은 천지 차이였다.

"...!!"

레이의 일격을 간신히 받아낸 그래듀에이트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허나 레이는 양손의 검을 휘둘러 그래듀에이트의 퇴로를 차단한 채 서로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

그래듀에이트는 그 찰나 레이의 빈틈을 보고 파고들었으나, 의미 없는 짓이었다.

오버드라이브.

전설처럼 전해지던 하르시아의 비기가 행해지며 레이의 검이 급격히 가속됐다.

그래듀에이트는 섬광처럼 휘둘러진 레이의 일격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촤악!!

그래듀에이트의 팔이 갑옷과 함께 잘려나간 직후.

횡으로 휘둘러진 모로스가 그래듀에이트의 목까지 잘라냈다.

기사의 몸뚱이가 허물어진다.

레이는 그대로 적들의 무리를 파고들었다.

두 자루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선혈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레이는 적들을 일방적으로 유린하며 전진했다.

그 누구도 레이를 막아 세우지 못했다.

그래듀에이트 소수, 혹은 엑스퍼트 급 다수가 레이를 잠시라도 저지하기 위해선 스스로를 소모품처럼 희생하며 발목을 붙들어야 했다.

허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브랜틀리의 병력은 각기 다른 세력에서 차출된 고급 병종들의 집합이었다.

그들은 개인의 실력은 우수했으나 서로가 서로를 위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져 희생하는 건 불가능했다.

레이가 적들의 진형을 헤집자 요새의 방어군 또한 더욱 미쳐 날뛰었다.

한편, 혼란이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루나가 정령을 소환했다.

소환된 정령들이 적들이 앗아간 물자가 있는 곳을 기습했다.

중급 정령 하나, 중상급 정령 둘, 상급 정령 하나가 강력한 바람을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정령이 난입하자 브랜틀리의 병력 사이에 번졌던 혼란이 더욱 극심해졌다.

소수의 지휘관이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제대로 입을 열기도 전에 허공을 찢고 떨어져 내리는 도약 검기를 맞이해야 했다.

적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요하나가 자신의 검을 찾아 뽑아들었다.

요하나는 마나를 전혀 주입하지 않은 채 검을 휘둘러 기사들을 속박하던 형구를 베어냈다.

제플린이 건네준 검의 강도가 형구를 이룬 금속보다 월등히 뛰어났고, 또한 요하나의 검술이 수준급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속박에서 벗어난 자들이 침묵을 유지한 채 병기를 꼬나쥐고 전장으로 돌진했다.

갑옷을 다시 입을 시간이 없어 맨몸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검을 휘둘러야 했지만 누구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지독한 함성과 비명이 계속해서 지하를 울렸다.

"이게 무슨..."

삽시간에 진형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브랜틀리는 혼이 빠진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이대로는 패배하고 목이 잘릴 터다.

브랜틀리가 마법사들을 독촉했다.

"저놈을 죽여!! 저놈을 당장 죽이란 말이다!!"

브랜틀리가 레이를 가리키며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마법사들은 브랜틀리의 명령에 따라 아군의 피해를 고려 않고 화력을 쏟아내려 했으나 무모한 짓이었다.

레이를 누군가가 제대로 붙들어 두지 못했다는 건, 언제든 도약 검기가 머리 위에 내리꽂힐 수 있다는 의미였다.

마법사들이 수작을 부리려 하는 걸 감지한 레이가 곧장 검을 휘둘렀다.

공간을 찢어내고 나타난 도약 검기가 마법사들의 머리 위를 폭격했다.

콰가가가각!!!

육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기사들의 집중적인 보호 덕분에 무사했던 브랜틀리가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손을 앞으로 뻗었다.

심장 속의 드래곤하트와 심장을 두른 서클이 공명하며 시푸른 화염을 만들어내 뿜어냈다.

푸른 화염의 파도가 적아를 구분 않고 해치며 레이를 향해 너울졌다.

계속해서 전진하던 레이가 묵묵히 두 검을 맞부딪쳤다.

까드득-!

검기 다발이 공명과 반발을 반복하며 레이를 중심으로 공간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일그러진 공간을 타고 흐른 화염의 파도가 고리 형태로 변형된 끝에 천장으로 치솟았다.

화르륵!!

화염이 치솟으며 길이 열리고, 다시 레이와 요새의 방어군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레이의 뒤를 따르는 군세는 공포를 망각한 순교자와 다르지 않았다.

찬란히 빛나는 제국의 신검 아래 결집된 광신도들이 죽음을 경시하며 달려들었다.

그들과 마주한 브랜틀리의 병력은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다.

우린 지금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

우린 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는 것인가.

꿈꾸고 동경했던 신화의 단편 속에서 우리는 왜 악역을 자처하며 스러져가는가.

알 수 없었다.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피 냄새만이 짙어질 뿐이었다.

브랜틀리의 병력은 몇 번이나 진형이 붕괴된 끝에 지하 광장의 구석까지 밀렸다.

실성한 것처럼 몸을 떠는 브랜틀리를 릴리프가 붙잡고 병력들의 가장 후방으로 물러났다.

브랜틀리의 병력은 반원 형태의 진형을 유지한 채 버티려 했지만 얼마 못 가 무너져내렸다.

투항할 의사를 내보일 새도 없이 몸뚱이가 잘려나가는 병사들을 보며 브랜틀리가 뒤늦게 정신을 다잡고 릴리프를 붙들었다.

"워프게이트를 당장 가동할 수 있나?! 아니, 가동하게 만들어!!!"

릴리프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댄 브랜틀리가 남은 병력에게 소리쳤다.

"워프게이트까지 다시 길을 뚫어!!! 워프게이트까지만...!!"

워프게이트만 다시 탈환한다면, 그리고 릴리프가 제 역할을 한다면.

일이 그렇게만 풀린다면 이 실소만 나오는 악몽 같은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적들은 게이트 너머까지 쫓아오지 못할 테고, 설령 쫓아온다 해도 게이트 너머에서 기다리던 병력들에게 섬멸당할 터였다.

브랜틀리는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믿고 연거푸 소리쳤지만.

말을 끝맺기도 전에 브랜틀리의 가슴을 릴리프의 손아귀가 파고들었다.

뿌드득!!

"?!"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브랜틀리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릴리프의 손아귀를 바라보다 피를 토했다.

푸욱!!

핏물에 적셔진 드래곤하트가 브랜틀리의 심장에서부터 뽑혀 나왔다.

릴리프가 자신의 손아귀를 펼쳤다.

홀로 붉게 빛나는 드래곤하트가 릴리프의 손아귀 위에서 작게 진동했다.

철퍽!

브랜틀리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인간 중에 심장이 훼손되고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브랜틀리가 죽었다.

그 충격적인 사태에 광기에 휩싸였던 전투조차 한순간 얼어붙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브랜틀리의 수하들이 적들에게 등을 보인 채 릴리프에게 검을 겨누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설마 브랜틀리를 직접 죽여 상대에게 목숨이라도 구걸하려는 건가.

그게 아니면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것인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릴리프는 미친놈처럼 낄낄 웃어보다 이내 표정을 굳혔다.

"웃음도 잘 안 나오는군."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려 해도 자꾸만 얼굴이 굳었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릴리프가 세상을 배척하고 마족으로 개화한 후.

일반적인 지성체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을 대부분 소실했다.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그 모든 감정이 이제는 변질되거나 망각되어 원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허나, 600년 전 '그'가 새긴 공포라는 감정만큼은 마경으로 돌아가서도 발작적으로 뇌리를 헤집고는 했다.

평범한 인간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몸부림을 치고 괴성도 질러봤지만 그가 남긴 상흔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무려 600년의 시간이 흘러서야 희석되고 희석되어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끔찍한 존재를 고스란히 계승한 후계가 악몽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저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거짓 웃음조차 입가에 잘 맺히지 않았다.

하지만.

"넌 완전히 개화하지 못했군."

상대는 아직 초월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그건 명백한 상대의 실책이었다.

릴리프를 잡아 죽이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초월의 경지에 발을 내딛고 난 후 찾아왔어야 했다.

화르륵!

릴리프의 손아귀에 쥐인 드래곤하트가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좌우로 길게 찢어져 검은 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릴리프의 눈동자가 레이를 똑바로 응시했다.

"곱씹고 곱씹고 곱씹어도 여전히 날 속박하고 있는 그날의 악몽을... 내 손으로 지워내겠다."

드드드드득!!!

불쾌하고도 압도적인 기운이 공간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지하 광장에서 아직 살아숨쉬고 있던 모든 인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심장이 멋대로 요동치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릴리프.

과거의 이름은 '에리다누스'.

마족 중에서도 유달리 영악하고 강력하다고 평가받으며 인간들의 두려움을 샀던 악신의 추종자.

마경 안에서라면 완전히 개화한 사도와 비견된다는 최악의 마족이 본모습을 드러냈다.

찢어진 에리다누스의 눈동자에서 검은 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바닥을 적시다 못해 찰랑이기 시작한 검은 물은 금방이라도 사람의 정신을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 같았다.

누군가가 뒷걸음질을 쳤다.

동요가 들불처럼 번지며 주춤거리다 물러서는 자가 늘어났다.

그 순간.

레이가 모로스를 치켜들었다.

모두가 고개를 돌려 푸른 섬광을 내뿜는 제국의 신검을 두 눈에 담았다.

레이가, 단련된 기사조차 차마 마주 보지 못할 불가해한 힘을 품은 적을 향해.

모로스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가 올곧이 겨누었다.

"제국에게."

"영광을!!!!!!!!!"

광기에 찬 함성과 함께.

병기를 손에 쥔 모두가 목숨을 도외시한 채 악의 하수인을 찢어발기기 위해 짓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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