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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레이가 슬금슬금 스페라의 눈치를 보았다.
스페라는 그 꼴을 보며 콩깍지 같은 게 좀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연거푸 추한 꼴을 보인 레이를 향해 고개를 저은 스페라가 감정을 꾹꾹 눌러담았다.
어쨌든 레이는 스페라의 일행 때문에 곤란에 처했다.
인내심을 발휘한 스페라가 브랜틀리에게 말했다.
"저 망아지 같은 촌뜨기를 증조부님께서 재능이 보인다고 저택에 초대했는데, 바로 죽이기엔 쓸모가 좀 있지 않겠어요?"
여기까지가 스페라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브랜틀리가 피식 웃더니, 스페라에게 답했다.
"걱정 마. 피를 흘릴 곳은 여기가 아니거든."
그리 말한 브랜틀리가 수하들에게 포로를 끌고 가라고 명했다.
이후 브랜틀리의 병력들은 포로들을 데리고 워프게이트까지 빠르게 진군했다.
단련되지 않은 사람은 따라잡기 힘든 속도였지만 다들 입 다물고 죽을둥 살둥 다리를 옮겼다.
여기서 뒤처졌다간 바로 목이 날아간다는 걸 모르는 멍청이는 없었다.
간간이, 열을 맞춰 잘 걸어가고 있는데도 포로의 등을 밀치는 기사들도 있었다.
웬지 모르게 표적이 된 알레시아가 열심히 걷는 도중 앞으로 밀쳐졌다.
퍽!
"아곡!"
알레시아가 철퍼덕 넘어지려는 순간 레이가 재빨리 묶여있는 팔로 알레시아를 잡았다.
알레시아가 레이에 의해 질질 끌려가다 다시 균형을 잡고는 툴툴댔다.
"이런 플레이는 별로 즐겁지 않구나아..."
"농담할 기운이 있으신 걸 보니 다행이군요."
"으음, 나의 기사여."
알레시아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슬그머니 목에 힘을 주었다.
"권력을 탐하다 이런 꼴이 되었지 않느냐. 앞으로는 내게서 눈 돌리지 말거라."
"...뭐, 주의하겠습니다."
레이는 이 와중 알레시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어처구니없었지만 축 처져 있는 것보단 나았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알레시아가 레이의 곁에서 계속 걷다가 물었다.
"나의 기사여, 근데 적들이 우리를 왜 살려둔 것이냐?"
알레시아가 보기에도 적들이 필립스 백작가 일행들을 반드시 살려둘 필요가 없어 보였다.
물론 투항한 적을 베는 것은 굉장히 명예롭지 못한 일이지만, 이 망할 것들은 반역도들 아닌가.
이 지경이 되어서 명예니 뭐니 따져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레이가 주변 눈치를 보더니 답했다.
"워프게이트는 프리슬란 가문이 소유한 저택에 있다고 해요. 근데 말만 저택이지 일종의 요새라고 하더군요."
현재 적들의 전력이라면 요새도 분명 함락시킬 수 있을 터다.
허나 적들의 입장에서도 되도록 시간이 끌리지 않고 요새에 무혈입성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니 포로가 된 스페라를 들이밀며 요새를 개방하라고 협박하겠죠. 하지만 방어군이 바로 요새를 포기할 확률은 낮잖아요."
"음, 그렇겠구나."
"방어군이 버티면 경고와 위협을 가해야 할 텐데, 다짜고짜 가장 중요한 인질인 스페라부터 죽일 수는 없잖아요."
"..."
"그러니 아마도... 우리들을 먼저 주르륵 세워놓고 목을 쳐서 방어군을 위협하지 않을까요? 계속 문을 안 열면 스페라도 이 꼴로 만들 거라고요. 말하자면 우리는... 에피타이저 같은 존재인 거죠."
"음..."
설명을 잘 이해한 알레시아가 흐물흐물해졌다.
레이는 또 밀쳐지기 전에 알레시아를 잡아끌며, 적들의 진형을 살폈다.
'...나쁘지 않군.'
적들은 포로를 감시하고, 또한 수상한 행동을 할시 목을 베기 위해 포로들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있었다.
이러면 아군과 포로가 섞여 있게 되니 상대측 마법사들이 다짜고짜 화력 높은 마법부터 쏟아내기 힘들었다.
그에 반해 적들의 지휘부는 따로 모여서 호위를 받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마법을 발현해 명중시키기 훨씬 편했다.
저벅 저벅
진군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브랜틀리의 병력과 포로들은 도시로 진입했다.
시민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지만 전부 무시했다.
마침내 브랜틀리의 병력과 포로들이 프리슬란 가문이 소유한 저택 앞에 도착했다.
말만 저택이지, 방위를 위해 건설된 요새에 가까웠다.
레이는 긴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이곳에서 적들이 포로를 살해하려들 확률이 높으니,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일단 루나가 마법을 발현해 단숨에 지휘부를 습격한다.
적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레이는 도약 검기를 사용해 인질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적들을 밀어내야 한다.
이후 정령을 이용해 물자를 회수하고 비전투 인원을 고위 정령 칼가를 이용해 빠르게 보호한다.
그리고 레이가 살아남은 적들의 지휘부에 난입해 시간을 끌면, 재무장한 아군들과 요새에 있던 병력들이 합류할 터다.
'나쁘진 않아, 나쁘진 않은데...'
작전만 잘 풀리면, 일방적인 포위 상황에서 미리 준비된 상대 화력을 죄다 얻어맞은 후 싸우는 것보단 나았다.
허나 그게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적들의 전력은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릴리프'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마족의 힘이 확실치 않았다.
설령 힘겹게 승리한다 해도 적을 완전히 섬멸하는 건 불가능했다.
레이는 웬만하면 요새 안에서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필립스 백작령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되는 꼴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레이가 검을 뽑을 준비를 마친 사이.
브랜틀리 측과 요새를 지키는 방어군 사이에서 고성이 오갔다.
고성 자체의 내용은 뻔했다.
문 열어라, 닥쳐라, 부끄러운 줄 알아라.
몇 번 더 고성이 오간 후 브랜틀리 측은 성벽 앞에서 포로들을 고문하거나 목을 벨 준비를 했다.
"..."
레이가 루나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허나 레이와 루나가 미처 무언가를 하기도 전.
요새를 둘러싼 성벽의 문이 열렸다.
"...?"
레이는 요새를 지키는 지휘관의 결단이 빠른건지, 아니면 현 사태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건지 헷갈렸다.
어쨌든 요새의 지휘관, 딜리드 프리슬란은 성문을 빠르게 열어주었다.
스페라의 목숨을 아예 포기할 생각이 없다면 현명한 판단이었다.
시간 조금 끄는 대가로 스페라의 손목이 날아가는 꼴을 볼 바에야 차라리 멀쩡할 때 열어주는 게 나았다.
브랜틀리와 그를 따르는 병령들이 요새 안쪽으로 진입했다.
완전무장된 요새의 병력들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그들 대부분이 프리슬란 가문에 속해 있었다.
딜리드 프리슬란이 브랜틀리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스페라에게 생채기 하나라도 입히면 우리 모두 같이 죽을 줄 알아라."
브랜틀리가 피식 웃고 고개를 돌렸다.
요새의 방어군들이 브랜틀리의 병력을 포위하는 형세가 됐지만 브랜틀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이대로 싸워도 브랜틀리의 병력이 충분히 상대를 압도할 수 있었다.
브랜틀리는 지하로 향하는 거대한 통로로 진입하며 딜리드를 향해 조소했다.
"안 쫓아올 건가?"
"...프리슬란 가문은 오늘의 모욕을 잊지 않을 것이다."
요새의 방어군이 브랜틀리의 뒤를 쫓아 지하로 향했다.
*
워프게이트는 지하 광장에 존재했다.
지하 광장의 규모는 대단했는데, 심지어 밖에서 본 요새의 넓이보다 더 넓게 확장되어 있었다.
지하에 존재하는 영맥의 한가운데 워프게이트가 위치했다.
꽤 거대한 장치였으나, 정착 물자가 통과할 수 있는 입구는 작은 편이었다.
브랜틀리의 병력이 워프게이트에 도착했고, 요새의 방어군이 거리를 벌린 채 그들을 포위한 후 기습할 준비를 갖췄다.
서로의 긴장이 팽팽히 당겨진 가운데, 딜리드의 부관이 딜리드에게 물었다.
"워프게이트를 이렇게 내주어도 괜찮겠습니까?"
"황실의 허가 절차 없이 저걸 작동시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지원 병력이 도착할 테고, 황실에서도 무언가 조치를 취할 거다."
옳은 말이었다.
워프게이트는 가장 중요한 전략 물자인 만큼 손만 댄다고 가동시킬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브랜틀리도 이번만큼은, 워프게이트를 향해 다가가는 릴리프를 약간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봤다.
만약 워프게이트의 가동이 늦는다면 작전 자체를 바꿔야 했다.
허나 릴리프는 다른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금세 워프게이트를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릴리프의 실력을 눈앞에서 확인한 마법사들이 탄성을 흘렸다.
브랜틀리는 웃었고, 요새의 방어군들은 당혹에 휩싸였다.
시간이 흘러 워프게이트 주위의 공간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하자, 릴리프가 워프게이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브랜틀리에게 보고했다.
"완전 기동까지 앞으로 20분 정도 걸릴 겁니다. 강제로 기동시킨 것이라 불안정한 탓에, 포로를 전부 데려가긴 힘듭니다."
중요한 포로가 아니면 놓아주거나, 처리해야 했다.
브랜틀리가 웃었다.
"죽여."
브랜틀리는 방어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를 볼 생각이었다.
그건 프리슬란 가문을 향한 명백한 모욕이자 도발이었다.
포로를 죽이겠다는 소리에 요새의 방어 병력들은 분노하고 흥분했으나, 적극적으로 상황에 대처하진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스페라 프리슬란이었지 듣도 보도 못한 촌뜨기들이 아니었다.
값어치 없는 포로들의 목이 잘리든 말든 대치 상황은 그대로 유지될 것만 같았다.
헌데, 그 순간 바람 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스쳤다.
쐐액!
브랜틀리의 병력들이 포로들로부터 압수한 싸구려 무기들을 모아둔 마차에서, 검 한 자루가 스스로 뽑혀 나왔다.
허공을 비행한 검이 레이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
브랜틀리의 병력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갈구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자체 추력 기능이 있는 아티펙트도 제대로 확인 안 하고 뭐했냐,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포로를 감시하던 기사 다섯이 레이를 둘러쌌다.
레이는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소년이었기에, 레이의 겉모습은 상대에게 긴장감을 주기 충분치 못했다.
고작 소년 하나가 포박을 풀고 어울리지 않는 아티펙트를 손에 쥐었을 뿐이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고, 바로 해결할 수 있었다.
레이는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크게 숨을 골랐다.
"후우..."
여기가, 선택의 갈림길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제국의 통합과 분열을 결정지을 터였다.
레이는 계속해서 고민했었다.
레이가 그저 자기 사람들을 지키고 뒤로 물러나는 데 집중하면 저들은 워프게이트를 이용해 변경백에게 가서 제국을 양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혼란과 내전의 시기가 도래할 수도 있겠지.
"..."
하지만 레이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전세계적인 재앙을 소수의 영웅만으로 맞서는 건 굉장히 힘겨운 일이 될 터다.
그렇기에 레이는 제국의 분열을 막고 통합된 제국을 택하기로 했다.
제국의 권위 아래 통합된 인류는 영웅의 뒤를 받쳐 재앙을 이겨낼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되어야만 했다.
'부디...'
레이는 바랐다.
지금 이 선택이, 세상이 아닌 나의 사람들을 구하는 길이 되기를.
스스로에게 기원한 레이가 입을 열었다.
"에리다누스."
"..."
워프게이트에 집중하던 릴리프가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600년 전 사용했던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왔으니, 제아무리 영악한 마족이라 해도 당황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레이가 잠깐 웃었다.
필립스 백작령의 사람들이, 프리슬란 가문의 사람들이, 그리고 요새를 지키던 모두가 목숨을 불태워 불경한 것들과 맞서 싸우게 만들어야 했다.
사람 머리가 터져나가고 듣도 보도 못한 마족의 권능이 코앞을 휩쓸어도 검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게 만들어야 했다.
허나 전장에서 적을 당황시키고 아군을 결집시키는 선동은 레이의 특기가 아니었다.
레이는 로필렌의 부재가 아쉬웠으나, 없는 사람을 불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스스로 입을 열었다.
"에리다누스, 600년 만에 마경에서 기어나와 또 이런 수작을 부리고 있었나."
모두가 레이의 개소리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만 '릴리프'만이, 남동부로 연결되던 게이트의 움직임을 잠시 정지시킨 채 자신만 조작 가능하도록 잠가버렸다.
레이가 릴리프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섰다.
"600년 전 영웅은 너를 놓쳤으나, 나는 너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레이의 목소리가 지하에 울려 퍼졌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레이가 실성했다고 생각했다.
레이를 포위한 기사들은 실소를 머금은 채 레이를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아니, 찔러넣으려 했지만... 얼마 못 가 움직임을 멈췄다.
"...?"
괴이한 냉기가 지면을 타고 흘러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기사들의 단련된 육감이 비명을 질러대며 주인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주춤거리는 기사들 사이에서.
코어와 서클로 증폭된 레이의 기세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모두 검을 들어라."
레이는 동화책에서 읽었던 문구를 그대로 읽었다.
동화책에서 하르시아는, 지평선 끝까지 늘어선 군단을 이끌며 이리 말했다.
"이건 명령이다. 검을 들어서, 악의 하수인과 배반자들을 베어라."
새파란 어린아이도,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도... 그 다음에 올 문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은총 아래 너희의 사명을 다하라. 어린 시절 가장 처음 무릎을 꿇고 맺었던 맹세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라."
이제는 모두가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레이를 바라본 채 불신과 경악을 토해내며 병기를 붙잡았다.
레이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웃었다.
너울지며 고조된 분위기가 폭발할 듯 차오른 가운데.
"제국에게."
600년 전 신화의 종말과 함께 소실됐던 신검이 일그러진 공간에서 뽑혀 나왔다.
"영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