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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64화 (16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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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스페라가 벌레 씹은 표정으로 레이를 바라봤다.

만남을 가진 후 스페라가 처음 보여주는 표정이었지만 레이는 스페라가 그러거나 말거나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채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거 내 아가리가 문제인가?'

그냥 생각이 가는 대로 지껄인 건데 곧장 말이 씨가 되어 버렸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이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전에 지미가 용주골의 의미를 묻기에 dragon princess lair라고 시답잖은 말장난을 한 번 쳤더니 몇 년 뒤에 웬 눈 시뻘건 동생 녀석이 튀어나오지도 않았던가.

레이는 치솟는 짜증 탓에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나 설마 지금 짬 맞은 건가?'

에른스트가 지금 이 시간에 습격이 감행되리라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스페라나 워프게이트가 노려질 가능성이 있다는 건 분명 염두에 두었을 터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를 스페라와 같이 묶어 워프게이트가 존재하는 곳으로 보냈다는 건, 겸사겸사 터렛 역할도 좀 하라는 소리였다.

'내가 짬을 맞다니...!'

필립스 백작령에선 항상 남에게 짬을 때리는 데만 익숙했던 레이다.

허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미 같지는 않았다.

자기 혼자 괴로워하는 레이를 스페라가 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얼마 안 가 정신을 차린 레이가 한숨을 푹푹 쉬며 에른스트가 준 보석 같은 걸 흔들었다.

"아가씨, 일단 이게 정확히 뭐하는 물건인지 빠르게 설명 좀 해주시죠."

*

젠킨슨은 평온하게 말을 몰다가 깜짝 놀랐다.

갑자기 날카로운 기세들이 사방에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마차를 호위하던 자들이 전부 병기를 뽑아들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마차를 포위한 습격자들의 은폐장이 벗겨졌다.

일백은 훌쩍 넘어가는 병력들이 마차의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젠킨슨을 비롯한 모두가 적들을 확인하고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저만한 숫자의 병력을 제국 내에서 완벽히 은폐해 이동시키기 위해선 고서클 마법사의 조력을 비롯해 셀 수 없는 사전작업이 필요했다.

그러고도 들킬 확률이 절반은 될 터였고.

허나 저들은 성공적으로 이곳에 도착했고, 젠킨슨을 비롯해 필립스 가문과 프리슬란 가문 관계자들을 포위했다.

젠킨슨이 검기를 발현한 채 긴장을 끌어올리고 있는데 레이가 다가와 바로 옆에 붙었다.

"마스터."

"레이...!"

"하아, 돌겠네요."

레이는 사방을 포위한 적들의 기세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나 일반병으로 머릿수만 채운 게 아닐까 기대했지만, 기세를 보니 죄다 고급 병종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암암리에 사람을 바꿔치기해가며 결집시킨 병력임이 틀림없었다.

'그래듀에이트가 넷, 남은 기사들도 기세나 무장을 봤을 때 정예이고, 마법사 다수에 성기사들까지 붙었군.'

조합이 제대로 갖춰진데다, 상대 측 마법사들은 이미 전투 준비를 마쳤다.

상황이 이리되면 전투의 난도가 급격히 치솟는다.

'...저기 있군.'

레이는 적들을 둘러보다 은발을 묶어올린 붉은 눈의 소유자를 찾았다.

황족이었다.

레이는 자기 추측이 대충 맞았음을 확인하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시발.'

이제 와서 스페라와 모르는 사이니 보내주세요~ 라고 지껄여 봤자 통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저들은 빠르든 늦든 스페라를 제외한 필요 없는 자들을 처형할 게 뻔했다.

충돌은 예정된 일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실력을 숨길 수도 없었다.

"..."

레이가 검 자루를 매만지며 고민했다.

레이는 자기 전력을 전부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루나 만큼은 아직 외부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루나와 계약한 정령의 도움만 받는 선에서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레이가 답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데 옆에서 아프텔이 불쑥 나타났다.

[마스터.]

"...?"

[저 인간... 기억 속에 있는 자입니다.]

아프텔은 황족과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측근 중 한 명을 가리켰다.

레이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누구 기억?"

[레시나의 기억입니다.]

600년 전 활동했던 엘프의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

당연히 진짜 '사람'일리는 없었다.

레시나의 기억 속의 인물과 아프텔이 가리키는 자가 정말 동일인이라면...

"엘프야?"

[아닙니다.]

"...마족이라고?"

[그렇습니다.]

"아, 갈수록 태산이군."

레이가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아프텔은 황족의 곁에서 백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인간의 신분을 오벨리스크의 데이터를 끌어와 조회했다.

상대의 이름은 릴리프.

에실론 왕국 출신이며 백색 마탑의 수석 마법사이자 단기간에 높은 성취를 거둔 천재였다.

물론 위장을 위한 신분일 게 분명했다.

[저것의 원(源) 종족은 알 수 없으나 극히 위험한 마족입니다. 육체 일부를 원하는 형태로 재구성할 수 있고 이치를 벗어난 마법을 사용하며 기만 작전에 능합니다. 600년 전에 저 마족 탓에 왕국 두 개가 공멸하다시피 했습니다.]

"잠깐만."

레이는 일단 권능을 사용해 '릴리프'라는 신분을 가진 자를 바라봤다.

처음엔 다른 인간들과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였으나, 권능이 강력하게 발현되자 릴리프의 모습이 두 겹으로 박리되어 비쳤다.

껍데기를 뒤집어쓴 무언가를 확인하고 레이는 권능을 껐다.

"인간은 아니군. 근데 형태 변형이 가능하다면서 600년 전 사용했던 얼굴을 그대로 들고왔다고?"

[그대로는 아닙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하관 부분만 기억 속 데이터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운이 좋았군."

얼굴을 변형시킬 때 귀찮기라도 했던 탓인지 하관 윗부분만 다시 조각한 모양이었다.

그렇게만 해도 누구도 저게 동일한 존재임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600년의 공백기를 가졌지 않은가.

허나 아프텔은 온전히 보존된 레시나의 기억 데이터와 저것의 얼굴을 정확하게 대조 가능했기에 꼬리를 잡은 것이다.

[600년 전엔 놓쳤습니다. 이번엔 잡아 죽일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그래서, 저건 얼마나 강해?"

[마경 안에서는 로드 급에 필적합니다.]

레이가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긴 채 아프텔을 돌아봤다.

아프텔이 설명을 덧붙였다.

[마경 밖에서는 전력의 20% 정도를 발휘하는 게 최대지만... 현 시기를 고려했을 때 짧은 시간 50%까지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600년 전에 로드 급에 필적했다고?"

레이의 저의를 알아들은 아프텔이 고개를 저었다.

[순리를 거슬러 무한한 시간을 얻었다고 무한히 강해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악마의 힘을 받아들여 마족으로까지 개화한 개체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 자아가 매몰되어 결국 행동 원리가 프로그래밍된 악마의 인형 수준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니 과거에 비해 유의미한 발전을 이루진 못했을 겁니다.]

"..."

레이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루나."

바로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나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레이는 젠킨슨과 모하메드 또한 가까이 접근하게 한 채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나, 일단 우리는 항복해서 포박당할 거야. 하지만 적들이 우리 중 누구 하나라도 처형하려고 들면 바로 움직여. 정령 전부 소환하고 사용 가능한 가장 강력한 마법을 적들의 지휘부에 꽂아버려. 내가 그 사이 다른 사람들의 포박을 풀게."

지금 이대로 맞붙으면 포위된 채 마법부터 얻어맞을 것이다.

그러니 항복을 가장했다가 역습해서 난전을 유도하는 것도 괜찮은 작전이 될 수 있었다.

허나 레이가 진짜 노리고 있는 건 이곳에서의 역습이 아니었다.

"만약 저들이 우리를 바로 처형하지 않고 워프게이트까지 데려간다면 그때는 네가 다른 일을 해줘야 해."

그 후 자세한 설명을 끝마친 레이가 에른스트에게 받았던 이십면체의 보석 같은 물건을 루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부탁할게."

루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젠킨슨은 레이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주변을 견제하는 척하며 물었다.

"일이 그렇게 잘 풀릴까?"

"잘 풀리게 만들어야죠."

워프게이트에는 다수의 방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니 적들을 워프게이트까지 끌어들인다면 자연히 가두는 모양새가 된다.

적들이 워프게이트만 활용하지 못하게 한다면 퇴로도 끊고 방어 병력의 도움 아래 적들을 섬멸시킬 수 있었다.

전력 차가 현격한 이곳에서 들이박는 것보다는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

물론 일이 생각처럼 안 풀릴 경우, 바로 검을 뽑아야 했지만.

레이는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한 후 적들과 대치하고 있는 셰이에게 소리쳤다.

"그만 검 내려놓고 항복합시다!!"

"...!! 헛소리 말고 닥쳐라!!"

"숫자가 우리보다 몇 배는 많은데 어떻게 싸워요?! 여기서 개죽음당하고 싶어요? 그냥 항복해요!!"

"저 머저리 새끼가...!!"

"항복하자니까요!!"

레이가 대놓고 소리치자 주변에서 동요가 일었다.

셰이가 분노를 토했지만 스페라가 제지했다.

"셰이, 검 내려놔. 전력 차가 너무 커."

"아가씨, 저는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었고, 그것이 제 명예입니다. 부디 제 명예를 더럽히지 말아 주십시오."

"셰이, 부탁할게. 내가 너를 향한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길 원치 않는다면 나를 위해 검을 내려놓아 줘."

스페라의 계속된 설득에 셰이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검을 버렸다.

셰이를 시작으로 모두가 하나둘 병기를 버렸다.

투항이 확인되자 적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레이는 긴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적들이 투항한 자들에게 다짜고짜 검을 휘두를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일이 발생하는 순간 레이는 모로스부터 뽑아내 황족의 목을 칠 생각이었다.

"..."

긴장이 흘러넘치는 가운데.

적들은 일단 투항한 자들을 순차적으로 포박하기 시작했다.

가장 위협적이라고 판단된 기사들부터 포박이 진행됐다.

적들은 기사들의 무장을 전부 해제시킨 후 두껍고 무거운 형구를 손목과 목에 채웠다.

기사들에게 채운 형구는 마나와 반응하면 폭발하는 특수한 금속으로 만들어졌는데, 형구를 찬 기사가 마나를 활성화시키면 형구가 안쪽으로 폭발하게 제작되어 있었다.

기사의 경지가 그래듀에이트 정도 되면 죽일 수는 없겠지만 손목과 목에 큰 손상을 입은 기사들은 제대로 된 전투를 이어나가는 게 절대 불가능했다.

금속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던 기사들의 포박이 끝난 후.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밧줄 같은 것으로 포박됐다.

레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운이 좋군.'

적들은 스페라의 일행을 적극적으로 검사했다.

단단히 포박하고 무기를 회수해 따로 수납했으며 마차 또한 꼼꼼히 뒤졌다.

그에 반해 필립스 백작가 일행은 마차 수준부터 행색까지 촌뜨기티가 바로 났고, 이는 적들을 방심시켰다.

요하나나 루나 같은 딱 봐도 어린 소녀들은 비교적 가볍게 포박되었으며, 레이의 검은 다른 싸구려 무기들과 뒤섞여 대충 한곳으로 치워졌다.

레이는 자신과 요하나의 검집을 미리 바꿔놓았다는 것에 안도했다.

검을 뽑아보지 않았으니 싸구려 검집 안에 가려진 검의 진가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포박이 전부 끝나자 이 사태를 주도했을 황족, 브랜틀리가 스페라에게 다가갔다.

"네가 스페라 프리슬란이군."

"..."

"얌전하게 있어. 헛수작 부리면 팔다리를 다 잘라서 데려갈 테니까."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끝나버린 전장 위를 둘러본 브랜틀리가 피식 웃었다.

"정말 필요한 건 너 하나인데... 나머지는 어떡할까."

프리슬란 가문의 관계자까지야 챙겨가서 나쁠 게 없다지만, 필립스 백작가 사람들은 정말 쓸 곳이 없었다.

"이것들은 여기서 처분하고 갈까."

그래, 그게 합리적이었다.

레이 또한 동의하는 바였기에 코어와 서클의 급격한 회전을 준비했다.

'모로스를 뽑아서, 저놈 목 먼저 친다.'

레이의 눈에 서늘한 살기가 흐르기 시작한 찰나, 스페라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무슨 용무지?"

브랜틀리 옆으로 고개를 돌린 스페라가 레이를 빤히 바라봤다.

레이는, 이제 와서 스페라가 우리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말할까 봐 조금 겁먹었다.

이제는 남들이 보기에 레이가 살기 위해선 스페라와 잘 아는 사이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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