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3)
162화
레이가 한숨을 삼키며 에른스트에게 다가갔다.
레이는 자기를 에른스트가 쉽사리 보내주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에른스트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더욱 불안에 떨었을 것이다.
에른스트는 레이를 옆에 두고 울타리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본론을 꺼냈다.
"당분간은 스페라와 같이 프리슬란 가문의 영지에서 머물도록 해라. 알베미나 지역 근방이다."
"음..."
"제국이 혼란스럽다. 필립스 백작령까지 먼 거리를 이동하기 적합한 때가 아니다."
"..."
에른스트의 말이 합당하긴 했다.
지금 같이 민감한 시기에 먼 거리를 이동하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레이가 황도에 조용히 방문했다가 조용히 떠났다면 권력 싸움 탓에 유혈 사태가 발생해도 큰 상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는 지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고, 이는 결국 신변의 위협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다름 아닌 에른스트였다.
레이가 재차 한숨을 삼켰다.
레이는 저번 만남에서 에른스트에게 제국의 권력 구도가 안정될 때까지 시간을 달라 했고, 에른스트는 이를 수락했다.
허나 에른스트는 레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외부에서 보기에 레이가 에른스트의 사람처럼 보이게 꾸몄고, 또한 제국이 안정될 때까지 레이를 가까이 붙잡아두려 하고 있었다.
강압 아닌 강압이었고 선택권 없는 선택지였다.
"...에른스트 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현재 제국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황제가 결단을 내린 가운데, 각 귀족 가문들이 어떻게 상황에 대처하고 있고 황족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레이는 그런 정보를 요구했다.
에른스트는 당연히 거절하려 했다.
그런 정보를 레이가 알아서도 안 됐고, 또한 당장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정 레이가 궁금해한다면 정쟁이 다 끝나고 정보를 내주어도 되는 일이었다.
허나 에른스트는 레이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발길을 돌렸다.
"따라오거라."
*
에른스트는 자신이 사용하는 집무실 중 한 곳으로 레이를 데려갔다.
집무실에 들어선 레이는 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지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레이는 서적에서 제국의 지도를 몇 번 보긴 했으나, 에른스트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지도는 훨씬 자세하고 정확했다.
에른스트가 지도 네 군데를 가리켰다.
"황제 폐하께서 내린 귀환 명령을 받은 황족 넷 중 둘은 황도로 향할 채비를 마친 후 출발하기 직전이고, 남은 둘은 저들의 지지세력 사이에 숨어 눈치를 보고 있다."
레이는 가만히 서서 지도를 바라봤다.
황실과 제국의 주요 귀족 가문들은 서로 간의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아티펙트 내지 마법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가 봉쇄령과 귀환 명령을 정식으로 발표한 지는 시간이 그리 흐르지 않았지만, 다들 미리 정보를 들었는지 각자의 판단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
레이는 고심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제국이 강력한 중앙 집권 아래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게 유리한가, 아니면 갈기갈기 찢기는 게 유리한가.
레이가 에른스트의 협력만 얻어낼 수 있다면, 제국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게 장기적으로 훨씬 유리하다.
허나 레이가 '레아'와 같은 요소 때문에 제국과 적대하게 된다면 차라리 제국이 갈기갈기 찢기는 게 생존하기 쉬웠다.
그러나 제국이 내전 상태에 들어선다면 주변 왕국까지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그 사이 악신들이 수작을 부리면 인류는 자멸하게 될지도 몰랐다.
"..."
레이는 콧잔등을 움켜쥐었다.
레아라는 존재를 끝까지 들키지 않거나 들켜도 살아남는 게 가능한가.
분열되어버린 제국과 혼란에 빠진 주변 국가들로 재앙을 막아내는 게 가능한가.
한참 더 그렇게 제자리에 서 있던 레이가,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눈치를 보고 있는 황족들을 어떻게 끌어내실지...는 알아서 하시겠지만요."
레이는 흥미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에른스트의 시선을 눈치채고 괜히 헛기침했다.
"에른스트 님, 황제 폐하의 귀환 명령에 바로 응했다는 두 황족들 말입니다만, 기만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기만?"
"사람을 바꿔치기했다던가, 그런 거 말입니다. 변장시킨 사람을 마차에 태운 후 뒤에서 다른 일을 벌일 수도 있잖습니까."
"1황자 사건 이후 황족들의 추적과 감시가 강화됐다. 현재 황도로 향하는 황족들에게 황실의 병력이 직접 마중을 나가 신분도 확인하겠지."
그러니 본래는 사람을 바꿔치기하는 어설픈 기만책 따위는 통할 리가 없었다.
허나 에른스트는 알고 있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황제의 권위가 예전 같지 못했고 후계자의 지목이 늦어지며 여기저기 균열이 가 과거엔 상상도 못했을 허점이 드러날 수도 있으리란 걸.
"...네 말대로 대역을 내세운 황족이 있다면 무엇을 노리고 그랬으리라 생각하느냐?"
레이가 지도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손가락을 쭉 옮겼다.
이내 레이의 손가락이 제국의 두 번째 소드마스터가 지키고 있는 국경선으로 향했다.
"이쪽으로 황족이 흘러들어 간다면 골치가 아프지 않겠습니까?"
야심이 크다고 자주 이야기가 들려오던 변경백이 황족을 확보하면 쉽게 놓아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변경백과 황족이 야합해서 황명을 어긴다고 해서 황제가 군사를 일으키긴 쉽지 않았다.
제국의 정예병과 소드마스터가 존재하는 곳이다.
황제의 힘이 약해진 이때, 그들을 무릎 꿇리지 못하고 포이보스로 황위가 넘어간다면 제국이 크게 분열될 수도 있었다.
에른스트는 나름 흥미롭게 레이의 의견을 들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대비되어 있다. 남동부로 향하는 주요 길목은 정예병이 지키고 있고, 최근 그 숫자가 더욱 보강됐다."
황실 또한 변경백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물자나 사람이 함부로 남동부로 넘어가는 걸 통제하고 있었다.
과거 1황자가 남동부가 아니라 시그니 산맥을 향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레이는 에른스트의 말을 이해했지만 찝찝함을 버리지 못했다.
황도에서 짐을 뺀 크로포드 가문의 영지는 남동부에 굉장히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때문에 남동부에 인접한 세력이 수작질을 부린다면 변경백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레이의 표정을 바라보던 에른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사람을 따로 보내 황명에 응한 황족들의 신분을 다시 확인시키겠다. 남동부로 향하는 경계에도 병력을 보강하도록 하지."
에른스트도 직감에 가까운 찝찝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제국의 후계 구도는 너무나 오래 불안전했고, 불경한 마음을 품은 자들이 이런 때를 대비해 과감하고도 치명적인 작전을 계획해두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에른스트는 자신과 황제의 과격한 행보를 다른 귀족들이 대처 못하리라 여겼지만 그 반대의 경우 또한 염두해 두어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조언 고맙구나."
레이는 자신의 의견을 에른스트가 얼마나 진지하게 들었는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도 없고 세력도 없으니 이런 정치 싸움에 끼어든다고 해도 무언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에른스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품에서 이십면체 형태의 보석 같은 걸 꺼내 들었다.
"받아라."
"이게... 무엇입니까?"
"스페라에게 물어보거라."
"스페라에게 전하면 됩니까?"
"아니, 날 다시 만나기 전까지 네가 가지고 있거라."
직접 이십면체 형태의 보석을 레이에게 쥐여준 에른스트가 레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대성하지 못한 네가 다른 이들의 이빨에 찢겨나가지 않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그러니 날 믿고, 내게 협력해라."
"..."
"그럼, 기대하고 있겠다."
에른스트는 굳이 레이의 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레이는 에른스트의 집무실을 나가며 호흡을 훅훅 골랐다.
에른스트에게 빤히 들리겠으나 어차피 긴장을 숨겨봤자 숨겨지는 상대도 아니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레이는 스페라와 동행해야 했다.
*
"...그렇게 돼서 저는 스페라를 따라가야 할 것 같네요."
레이의 이야기를 들은 루나가 뒤로 다가와서 레이의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무조건 같이 따라가겠다는 의미였다.
모하메드는 고민했다.
레이만 알베미나 지역으로 보내고 남은 일행은 필립스 백작령으로 향할지, 아니면 전부 같이 알베미나 지역으로 이동해야 할지 바로 판단이 안 섰다.
"...필립스 백작령까지 거리가 머니, 지금 같은 시기에 프리슬란 가문에 몸을 잠깐 의탁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다만 황제나 에른스트가 레이라는 존재를 처분하려 든다면 그때는 답이 없었다.
레이를 두고 필립스 백작령으로 도망치듯 떠난다고 해도 레이가 황제나 에른스트의 눈 밖에 나면 필립스 백작령이 쓸려나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필립스 백작가가 소식을 듣고 대처도 하기 전에 군대가 들이닥칠 것이다.
"..."
결국 거기서 거기 같았기에 모하메드는 마지막 바람을 담아 물었다.
"레이, 상황이 나빠지면 아가씨라도 무사히 도주시킬 자신이 있느냐?"
"있습니다."
레이의 대답이 허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레이의 결의를 본 것에 만족한 모하메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동행하도록 하자."
필립스 백작에게 따로 연락을 넣은 레이의 일행은 스페라의 일행과 합류하게 됐다.
스페라는 레이의 일행과 합류하게 된 걸 많이 기꺼워했다.
젠킨슨이 레이와 나란히 말을 타고 가며 앓는 소리를 냈다.
"황도에 왔다가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그러게 말입니다."
젠킨슨도 레이도 황도에서 이렇게 밑천이 탈탈 털려 휩쓸려 다닐 줄은 예상도 못 했다.
필립스 백작령에선 위세를 부렸지만 결국 촌뜨기답게 세상 물정 모르고 시야가 좁아 빠졌었다는 방증이었다.
젠킨슨은 레이를 원망하진 않았지만 현 상황에 대해 근심이 컸다.
"레이, 필립스 백작령으로 무사히 돌아갈 자신이 있냐?"
"어... 솔직히 있다고는 못하겠는데요."
"지금 너한테 달린 목숨이 몇 개인데 자신 없다는 소리가 나와?"
"아, 예. 자신 있습니다. 자신 있어요, 마스터."
"진심이냐?"
레이가 피식 웃고는 답했다.
"어머니의 명예라도 걸까요?"
"..."
젠킨슨이 손장난을 하는 레이를 돌아보았다.
레이는 벨라가 은퇴한 후 저런 류의 농담을 하는 빈도가 늘었다.
더는 벨라가 그쪽 일에 종사하지 않는 게 꽤 달가운 모양이었는데, 젠킨슨은 레이의 신경을 긁을 만한 대꾸가 떠올라 입을 달싹거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히 입 잘못 놀렸다가 남들 앞에서 종자에게 얻어맞긴 싫었다.
레이는 젠킨슨과 조금 더 떠들다가 스페라에게 독대를 청했다.
알레시아와 셰이가 동시에 도끼눈을 했지만 스페라는 밝은 얼굴로 독대를 허락했다.
마차에 잠깐 들어가서 방음 결계를 전개한 레이가 에른스트가 주었던 물건을 꺼내 보였다.
"에른스트 님께서 빌려주셨는데 이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
스페라가 깜짝 놀라더니 답했다.
"이건 워프 게이트를 발동시키는데 관계된 물건이에요."
*
현재 마티아스 후작가의 영주성엔 황족인 마르도니스가 머물고 있었다.
그밖에도 지금까지 마르도니스를 차기 황제로 지지하던 귀족 관계자들이 영주성에 모여 회의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차일피일 후계 지정을 미루던 황제가 갑자기 강경하게 나서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다들 골치가 아팠다.
물론 대놓고 황제에게 반기를 들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가진 자는 소수였다.
일단 좀 뻗대보면서 황제 눈치를 보다가 최대한 손해를 안 보고 상황을 마무리 지을 방법을 다들 고민하고 있었다.
한편 마르도니스는 자기 나름대로 목숨을 안전하게 부지하고자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팽 당할 상황이라는 걸 마르도니스 또한 알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의견 하나는, 아직까진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당장은 황제가 강경하게 나왔으나 늙은 황제는 힘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시간은 이쪽의 편이 아닐까, 다들 그런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마티아스 후작은 머리를 환기시키기 위해 바깥으로 나왔다.
헌데 성벽 위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인상을 찌푸린 마티아스 후작이 기사들을 대동하고 직접 성벽을 올랐다.
"왜 그러지?"
"아, 저, 저기..."
마티아스 후작의 시선을 받은 병사가 성벽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검은 로브로 얼굴을 가린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성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던 병사는 바닥에 쓰러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저건 뭐하는 놈이야?"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단신으로 여기까지 와 행패를 부릴 이유가 없었다.
웬 정신병자가 찾아왔나 싶었던 마티아스 후작이 화살이나 날려서 쫓아내라, 그런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남자가 로브를 벗었다.
마티아스 후작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에른스트 프리슬란!!"
며칠 전만 해도 황도에 있다고 보고됐던 자가 아닌가.
황도에서 여기까지 주파하기 위해선 고작 며칠로는 불가능했다.
물론 초인이라 불리는 소드마스터라면 소수의 도움만으로도 먼 거리를 삽시간에 이동하는 게 가능했으나 진짜 문제는 에른스트가 이곳에 찾아온 목적이었다.
마티아스 후작이 억지로 당황을 가라앉히고 에른스트에게 큰 목소리로 목적을 물으려 했다.
허나 그보다 앞서 공기가 변했다.
"...!!!"
마티아스 후작이 반사적으로 한 발자국 물러난 순간.
에른스트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품에 있던 검을 뽑았다.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마티아스 후작이 기사에게 소리쳤다.
"당장 영주성 안의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