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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황도를 떠나기 며칠 전.
레이는 루나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루나를 방으로 불렀다.
레이는 미리 테이블과 의자 두 개를 준비해 두었지만, 방에 들어온 루나는 레이의 허벅지 위에 자기 엉덩이를 툭 앉혔다.
요새 맨날 세리아 허벅지 위에 앉아있어야 했던 레이는 루나가 자기 허벅지 위에 앉자 머리가 아팠다.
"루나야, 저기 반대쪽 의자 가서 앉을래?"
루나가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레이도 맨날 이렇게 앉았어요."
"내가 이렇게 앉고 싶어서 앉은 게 아니거든..."
루나는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레이는 루나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외출할 때는 거의 로브로 덮고 다녀서 남들은 잘 모르지만, 흘러내리는 폭포를 연상시키는 루나의 푸른 머리카락은 사람의 눈길을 쉽게 앗아가곤 했다.
레이가 루나의 머리카락을 땋아주며 말을 이었다.
"루나, 부탁할 게 있어."
"...?"
"필립스 백작령으로 귀환할 때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말아줘."
평소 표정 변화가 드문 루나의 눈살이 대번 찌푸려졌다.
가만히 레이에게 머리카락을 맡기고 있던 루나가 뒤로 손을 휘저어 레이의 뺨을 약하게 쳤다.
찰싹!
"아야."
연거푸 양쪽 뺨을 내준 레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영감님이 눈치가 참 빨라."
눈치라기 보다는, 노회한 통찰력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영감님이라면 내가 공간검의 사용자라는 사실도 충분히... 알아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레이는 에른스트에게 힌트를 너무 많이 주었다.
힌트를 주고 싶어서 준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까발려진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너무 많은 걸 들켰다.
실력도 들켰고 쌍검술을 이용한다는 사실도 들켰다.
'에른스트라면 1황자와 관련된 정보도 꿰차고 있을 테니...'
사고가 조금만 유연하다면 충분히 정답에 접근할 수 있는 기반과 통찰력을 에른스트는 모두 지니고 있었다.
"당장은 제국의 소드마스터께서 내게 호의를 보이며 나를 지켜보고 있지만... 상황은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어."
최악의 경우 제국의 소드마스터와 정면에서 부딪쳐야 할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이 찾아왔을 때 무슨 수를 쓰든 레이는 생존하기 힘들 테지만, 다른 아이들을 도주시키기 위해서라도 히든 카드가 필요했다.
"루나, 넌 현명하고 강해. 앞으로도 더욱 강해질 거고.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제국은 이런 사실을 모른다.
히든 카드를 준비한다면, 그건 레이가 아닌 루나가 되어야 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서지 말아줘. 나 홀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왔을 때, 그때 모두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되어줘."
"..."
루나는 화가 났다.
화가 났지만 루나의 너무나 비상한 머리는 레이가 건넨 부탁의 합당함을 재빠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좀 더 화가 났다.
루나는 여전히 자신의 힘이 부족함을 느꼈다.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에 맞서 레이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선, 고리를 최소 여섯 개는 만들어야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은 아니었으나, 그 사이 또 레이가 다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스윽
루나가 레이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붙인 채로 돌아앉았다.
루나와 마주 보게 된 레이가 잠시 침묵하다 앓는 소리를 냈다.
"루나야, 이거 자세가 많이 남사스럽지 않니...?"
레이가 떫어하든 말든 의자 다리에 발을 걸어 좀 더 가까이 몸을 붙인 루나가 레이의 뺨을 움켜쥐었다.
평소 레이가 해주듯 뺨을 주물주물 매만진 루나가 서로의 이마를 콕 찍었다.
"...소중한 사람이 많아요."
"..."
"...하지만 그 사람들 모두를 합쳐도, 레이가 더 소중해요."
"..."
한숨을 삼킨 레이가 루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앞으로 다시는 보지 못할 눈부시게 찬란한 재능을 타고난 아이가, 그 어린 시절 베풀었던 은혜를 아직까지 기억해주고 곱씹어준다는 게 참...
"고마워."
고마웠다.
*
모하메드가 황실의 일정을 끝내고 돌아왔다.
필립스 백작가의 일행이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인 가운데, 레이가 물었다.
"황도에서 더 해야만 하는 일이 있나요?"
"크로포드 가문의 저택에 들러야 한다."
모하메드가 답했다.
레이는 그제야 황도로 오는 길에 카렌 때문에 트러블이 있었던 귀족을 떠올렸다.
"이름이 사첼이었나... 꼭 들러야 하나요?"
"그쪽이 먼저 실수를 인정하고 저택에 초대했으니, 우리가 적절한 이유 없이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상대를 무시한 꼴이 된다. 괜히 적을 만들기보단 잠깐 얼굴을 비추는 게 낫다."
필립스 백작의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모하메드는 사첼의 초대를 무시하긴 힘들었다.
초대에 응하는 게 힘든 일은 아니었으므로 모하메드와, 알레시아, 그리고 레이를 포함한 몇 명이 잠깐 시간을 내서 황도에 있는 크로포드 가문의 저택에 들르게 됐다.
마차를 타고 크로포드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니 사첼이 직접 나와 환영해 주었다.
"이리 들러주어서 감사하오."
"아닙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하메드는 저번보다 스스로를 낮춰서 인사를 받았다.
모하메드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니 사첼은 내심 흡족해하며 일행들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저택 안에선 가벼운 파티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저택 홀 가운데는 화려한 장식과 요깃거리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크로포드 가문과 가까운 가문의 관계자들이 파티에 참가해 여기저기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사첼이 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모하메드를 소개해 주자 가벼운 박수 소리가 울려퍼졌다.
모하메드의 인사가 끝난 후 레이가 사첼을 따로 찾아가 허리를 숙였다.
"일전의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음, 아닐세."
사첼이 웃으며 레이에게 화답했다.
내심 신분도 천한 게 건방을 떨었다고 큰 소리로 질책하고 싶었지만, 사첼은 자기 감정을 미뤄두기로 했다.
요 근래 들려오는 소문의 주인이 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실수도 있었지.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파티 재밌게 즐기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적당히 사과를 마무리한 후, 레이는 천천히 저택 홀을 걸으며 파티를 구경했다.
그러자 전혀 면식이 없었던 귀족 가문 사람들이 꽤 알은체를 해왔다.
최근 레이에 관한 소문이 황도에서 뜨겁게 오르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에게 접근한 귀족들 대부분은 혹시 모르니 안면이나 터놓자는 생각이 강했지만, 또 다른 의미로 레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부류도 있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가슴골이 깊숙이 파인 드레스를 입은 칸네비에 자작 영애가 레이에게 인사를 해왔다.
그 후로도 칸네비에 자작 영애는 레이에게 관심을 표하며 슬그머니 신체 접촉을 하고는 했다.
아무래도 그쪽 소문에 관심이 있는듯 했다.
디저트를 주워 먹던 알레시아가 그 꼴을 보고는 자기 혼자 켁켁거렸다.
손수건으로 입을 닦은 알레시아가 칸네비에 자작 영애에게 접근해서 물었다.
"잠시 귀 좀 빌려줄 수 있겠는가?"
"네...?"
칸네비에 자작 영애는 갑작스러운 알레시아의 부탁에 떫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허나 순둥순둥한 알레시아의 눈빛을 보고 마지 못해 귀를 빌려주었다.
알레시아가 주변 눈치를 쓱 살피더니 정색을 한 채 칸네비에 자작 영애의 귀에 속삭였다.
"꼬리 치지 마, 여우년아."
"?"
칸네비에 자작 영애가 잠깐 얼빠진 표정을 하더니, 이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소리쳤다.
"이봐요!"
분노한 칸네비에 자작 영애의 눈빛이 쏘아지자 알레시아가 레이의 뒤로 쪼르르 달려가 몸을 숨겼다.
"저 여자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구나아..."
"..."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레이가 알레시아의 이마에 딱밤을 먹이고는 칸네비에 자작 영애에게 사과했다.
"혹시, 저희 아가씨께서 무례를 저지르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하...!"
여기서 일 키워봤자 둘 다 개쪽이었다.
칸네비에 자작 영애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레이에게서 멀어졌다.
알레시아가 좋아했다.
"내가 이겼구나!"
"알레시아 님, 맞을래요?"
레이가 재차 알레시아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기 위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알레시아가 깜짝 놀라 디저트가 전시되어있는 곳으로 쪼르르 도망쳤다.
그후에도 레이는 주변의 관심을 자주 받았고, 그게 피곤했던 레이는 화장실을 간다는 이유를 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음..."
화장실을 이용한 레이가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바라봤다.
본래 이 주변에 경비가 서 있어야 했는데,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운 듯했다.
'올라가 볼까.'
귀족 가문이 황도에 가지고 있는 저택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절대 소홀히 관리하지 않았기에, 복도에는 값비싼 예술품들이 즐비했다.
전시된 예술품 중에선 역시나 그림이 많았는데, 보통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더 값비싼 예술품들을 배치하곤 했다.
레이는 귀찮은 파티보다 값비싼 예술품이나 좀 더 구경할까 싶어 발을 옮겼다.
잠깐 복도를 걷는 것 뿐이니, 들킨다고 해도 뒤에서 욕 한 번 먹고 끝날 일이었다.
"..."
레이는 2층 복도에 걸린 그림을 눈으로 훑고는 3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거의 다 올랐을 때 아프텔이 경고했다.
[결계입니다.]
"어, 알겠어."
굳이 결계까지 뚫고 가서 문제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리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던 레이가 제자리서 멈췄다.
"...이 결계 종류가 뭐지?"
[감지 결계입니다.]
"혹시 시각을 왜곡시키는 기능이 있나?"
[없을 겁니다.]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3층의 복도가 허전했다.
가장 값비싼 예술품들이 먼저 눈에 띄었어야 하는데, 복도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혹시 예술품 배치를 좀 특이하게 한 건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벽을 자세히 살피니 무언가가 걸려있던 흔적이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건을 뺐다고...? 황도의 저택에서?'
최근 제국의 정세가 불안하다고 하나 제국이 통째로 망하지 않는 이상 황도에 존재하는 저택이 약탈당할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귀중한 물건을 굳이 빼냈다는 건 이 저택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했다.
물론 지나치게 비약적인 해석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수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생각을 이어가던 레이가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막 화장실 앞에 레이가 도착한 순간 본래 경비를 감당하던 기사가 레이를 지나쳐 계단을 막았다.
레이는 잠시 기사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
그로부터 이틀 후 황도에 봉쇄령이 내려졌다.
소수의 허가받은 방문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방문자들은 봉쇄령이 끝날 때까지 황도를 떠나있어야 했다.
사방에서 난리가 났다.
봉쇄령이 내려진 게 문제가 아니라, 황제가 후계를 결정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였다.
모든 귀족 가문이 이 사태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수많은 귀족 가문이 외부로 나가 있는 전력들을 가문 안으로 불러들였다.
이는 알슈테인 공작가 또한 마찬가지였고, 세리아와 디오리카 역시 가주의 복귀 명령을 받았다.
곧장 떠나야 했는데, 세리아가 레이를 들어 올린 채 디오리카에게 고집을 부렸다.
"데려갈래."
"..."
겨드랑이 사이가 잡힌 채 축 처져 있는 레이를 바라본 디오리카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데려갈 거야."
"안 됩니다, 고모님."
정식으로 레이를 초대하면 안 될 것도 없지만 지금은 비상사태였다.
융통성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의미였다.
디오리카가 세리아를 살살 달랬다.
"다음에 정식으로 레이를 초대하시지요. 아, 이번 일이 끝나면 한동안 여유 있을 테니 고향으로 몇 달 휴가를 다녀오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많이 고생해주셨으니 가주님도 흔쾌히 허락하실 겁니다."
어쨌든 안 된다는 말이었다.
실망한 기색으로 레이를 돌려 잡은 세리아가 레이의 얼굴에 입을 쪽쪽 맞추었다.
한참 뒤 얼굴이 축축해진 레이를 내려놓은 세리아가 마차에 올라탔다.
레이는 옷깃으로 얼굴을 닦으며 디오리카와 인사했다.
"몸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제 고모도 잘 부탁드리고요."
"자네도 몸조심하게. 아주 위험한 시기야."
"지방 촌놈에겐 큰 상관있겠습니까."
"이제 자네는 더 이상 평범한 지방 촌놈이 아니야. 그걸 명심하게, 찐조카."
"...새겨두겠습니다, 짭조카님."
서로 웃어준 레이와 디오리카가 악수를 나누었다.
알슈테인 공작가의 마차가 떠나고, 이제 필립스 백작가 사람들 또한 그만 황도를 벗어나야 했다.
허나 필립스 백작가의 마차가 출발하기 전 손님이 찾아왔다.
에른스트 프리슬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