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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60화 (16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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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황도를 구경한 첫날 이후에도 스페라는 계속해서 레이를 찾아왔다.

레이도 함부로 스페라를 거절하기 힘들었던 터라 결국 동행을 수락했다.

황도는 드넓었기에 제대로 구경하기 위해선 며칠 동안 많은 거리를 걸어야 했다.

스페라는 동행하는 동안 레이와도 자주 대화를 나누었지만 요하나에게 특히 큰 관심을 가졌다.

겉으로만 보면 스페라가 요하나를 '언니, 언니.' 부르며 쫓아다니는 모양새였다.

물론 신분 격차가 많이 나는 탓에 요하나는 스페라처럼 마음 놓고 웃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요하나와 스페라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스페라는 요하나의 성장 배경에 큰 궁금증을 드러냈다.

요하나는 스페라의 요청에 응해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해주었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레이의 이름이 원치 않아도 계속 튀어나왔다.

요하나의 이야기를 듣던 스페라는 자주 고개를 기울였다.

"다섯 살도 되기 전에 주변 고아를 수집... 아니, 직접 챙겼다고?"

"네. 그래서 지미가 엄청 싫어했다고 해요."

"9살 때는 깡패를 다수 제압했고...?"

"깡패 기강 잡는 게 레이 일이었어요."

"...정작 기사들에게 훈련을 받은 건 그 이후고?"

요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나는 레이가 나이 열셋에 기사 셋을 능숙하게 상대했다는 사실 같은 건 눈치껏 숨겼다.

스페라는, 굳이 세세하게 캐묻기보단 한 가지 사실만 확인했다.

"요하나, 레이가 너보다 강하니?"

요하나는 잠깐 혼자서 툴툴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강해요."

한편 알레시아는 일행들과 같이 다니며 주기적으로 스페라를 향해 으르르 거렸다.

슬슬 쿨타임이 끝났는지 다시 으르르 거리는 알레시아의 입술을 레이가 꾹 눌렀다.

알레시아를 붙들어 달래던 레이가 문득 의아함을 느끼고 물었다.

"아가씨, 지금 제가 말리는 게 재밌어서 일부러 이러십니까?"

"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꽤 괜찮은 플레이인 것 같구나!"

레이는 떠올렸다.

알레시아가 보았던 소설 속에서 개처럼 취급받고 앙앙 좋아하던 여주인공을.

레이는 떫은 얼굴로 알레시아의 머리를 가볍게 후렸다.

딱!

"아야!"

뒤통수를 붙잡은 알레시아가 화를 냈다.

"나의 기사여! 주인을 때리는 기사가 어디 있느냐!"

그리 떠들면서 나아가다 보니 이번엔 귀족이나 그에 준하는 갑부들이 이용하는 경매장에 도착했다.

합법적인 시설이었으며, 거래되는 대부분의 물건이 촌뜨기들은 감히 감당하기 힘든 액수를 자랑했다.

스페라 또한 황도에서 진행되는 경매에 참가할 수 있을 만한 자금이 수중에 없음은 마찬가지였지만, 분위기를 좀 띄울 겸 물었다.

"혹시 경매에 나온다면 꼭 구하고 싶은 물건이 있나요?"

"지금 당장은 없네요."

레이는 고개를 저으면서 스페라의 뒤에 붙은 호위들을 살폈다. 며칠 전보다 호위 기사의 숫자가 늘어나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에른스트가 증손녀의 호위 기사 숫자를 늘렸을 것 같진 않았기에 레이는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한편 스페라는 고개를 돌려 요하나에게 물었다.

"너는 혹시 필요한 물건이 없니?"

"...남자한테 좋은 거요."

갑자기 주변의 이야기소리가 뚝 그쳤다.

침묵 속에서 스페라가 눈을 깜박이다 다시 물었다.

"그... 남자한테 좋은 거라는 게..."

"제가 아는 사람이 거기가 잘 안 선다고 해서요."

레이가 뒷목이 힘차게 당겨오는 걸 느끼며 요하나를 돌아봤다.

요하나 또한 레이를 똑바로 응시하더니, 새침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왜, 찔려?"

주변 모두의 시선이 레이를 향했다.

실망, 걱정, 연민 등등 잡다한 감정이 그들의 시선에 담겨 있었다.

레이는 헛웃음을 줄줄 흘리며 자기 콧잔등을 움켜쥐었다.

'시발.'

요즘 요하나한테만 계속해서 꼽을 주기는 했다.

눈을 빨갛게 물들인 걸 보고 너무 쉬지 않고 꼽을 줬나 싶어서 반성하기도 했다.

헌데 이렇게 역공이 돌아오다니.

레이는 혼미함 속에 뒤늦게 표정 관리를 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레이는 경매장을 구경하는 내내 묘한 시선에 휩싸여 있어야 했다.

그렇게 적당히 경매장을 구경하며 나오는 길에 스페라가 물었다.

"음... 이제 어딜 가볼까요?"

스페라는 지금 경로로 가면 어떤 목적의 건물들이 있는지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레이는 여전히 묘한 시선에 휩싸인 채 답했다.

"목욕탕."

"...목욕탕이요?"

"네, 목욕탕요."

*

정말 이름 있는 고위 귀족들은 안전 때문이라도 공용 목욕탕을 이용하는 일은 없지만.

작위 없는 귀족들이나 기사들에게 황도의 공용 목욕탕은 꽤 있는 시설이었다.

시설의 편의성이 뛰어나기도 했고, 목욕탕에 몸을 담근 후 피로를 풀며 담화를 나누는 게 일종의 문화처럼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데런, 이안, 루카는 먼저 욕탕에 들어가서 몸을 담그고 있었다.

원래는 이런 시설을 이용할 신분이 아니었지만 스페라가 손 써준 덕분에 눈치껏 입장할 수 있었다.

공용 목욕탕을 이용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가리개 없이 탕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귀족답게 스스로의 육체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라를 모시던 남성 사용인들도 탕 안에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가씨의 남편 될 녀석이 과연 거기가 불구인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다.

그때, 내갑 때문에 남들보다 옷을 벗는 게 늦었던 레이가 목욕탕 문을 벌컥 열었다.

어깨를 펴고 세상 위풍당당하게 목욕탕 입구를 지나친 레이가, 어디까지나 농담 삼아 데런과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작은 성기들아."

"저 미친 새..."

데런의 속마음이 흘러나오는 동안.

레이의 목소리를 들은 모두가 어깨를 움찔 떨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들 중엔 친구와 함께 공용 목욕탕을 찾았던 세바스 또한 있었다.

세바스는 레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다시 자기 아랫도리를 내려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번 사랑은 포기해야겠군."

세바스가 욕탕에 더욱 깊숙이 몸을 밀어 넣는 사이.

레이는 시선이 쏠린 와중에도 꿋꿋하게 욕실 바닥을 걸어 욕탕에 몸을 담갔다.

가까이에 있던 스페라의 사용인들이 흠칫 놀라 거리를 조금 벌렸다.

데런이 혼자 흡족해하는 레이를 바라보다 물었다.

"형님."

"왜?"

"그... 훌륭하시긴 합니다만 그 상태로는 불능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잖습니까?"

"...그럼 여기서 세워보랴?"

"무서운 말씀은 하지 마시고요."

데런이 킥킥 웃으며 욕탕에 등을 기댔다.

증거가 되든 안 되는 레이가 이걸로 자존심을 챙길 수 있다면 데런에겐 딱히 상관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다음 날.

망측한 소문을 들은 셰이가 스페라 앞에서 분노를 토해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들려오는 소문의 내용은 스페라가 아랫도리를 보고 남자를 선택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분노하는 셰이를 보고 스페라가 깔깔 웃었다.

이런 소문이라는 게 원래 반짝 나타났다가 또 다른 소문에 덮여 금방 사라지는 법이었다.

"아.... 재밌네."

"제가 그놈을 죽여버리겠습니다."

"셰이, 증조부님께 한소리들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그런 말을 해?"

씩씩대는 셰이를 적당히 달래서 내보낸 스페라는 계속 킥킥거리다 슬그머니 자기 배꼽 바로 아래를 손가락으로 눌러보았다.

"음..."

뭐, 지금 당장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

모하메드의 일정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모하메드의 일정이 끝나면 필립스 백작가 일행은 백작령으로 귀환해야 했다.

레이는 자신이 과연 방해를 안 받고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일정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건 사실이었다.

그날도 저택을 찾아온 스페라는 레이에게 대련을 해달라고 청했다.

물론 레이는 단박에 거절했다.

"못합니다."

스페라는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들어줄 테니 다시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머리를 긁적인 레이는 남들이 접근 불가한 곳에서 단둘이서라면 검을 나눠주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스페라는 레이를 프리슬란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부지의 지하실로 데려갔다.

두꺼운 벽과 문으로 사방이 막혀있는 지하실의 한가운데에는 대련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이곳이라면 괜찮을까요? 증조부님도 이런 지하실을 훤히 꿰뚫어보실 순 없으실 거예요."

"...잠시만요."

레이가 팔찌를 톡톡 두들겼다.

아프텔이 이곳엔 감시 기능을 가진 아티펙트는 존재하지 않음을 답해주었다.

레이가 한숨을 푹 쉬며 검을 뽑았다.

"너무 부주의하신 것 아니십니까? 제가 아가씨를 해치면 어쩌시려고 이런 곳에 호위 없이 들어오십니까?"

"어차피 앞으로도 자주 한 방에 둘만 남고는 할 텐데, 걱정해서 뭐하겠어요."

방긋 웃어준 스페라가 검을 뽑아 들고 돌진했다.

레이는 검 한 자루만 적당히 휘두르며 스페라를 상대해 주었다.

스페라는 직감적으로 레이가 쓰는 검술이 주력 검술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그럼에도 레이의 검술은 굉장히 수준 높고 날카로웠다.

만족할 때까지 검을 휘두른 스페라가 숨을 몰아쉬며 부탁했다.

"한 번만 전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레이가 잠시 스페라를 바라보다 검을 옆으로 뻗었다.

이미 에른스트에게 밑천이 털린 뒤다.

본실력을 스페라에게 조금 보여준다 해서 변하는 건 없었다.

레이의 기세가 일변하자 스페라는 기뻐하며 돌진했다.

쐐액!!

검기가 서린 스페라의 대검이 휘둘러졌다.

직후 찰나의 순간 검강을 머금은 레이의 검이 스페라의 일격을 쉽사리 쳐냈다.

콰가각!!!

반발력을 이기지 못한 스페라가 손에서 대검을 놓쳤다.

자기 혼자 빙글빙글 돌며 날아간 대검이 벽에 콰악 꽂혔다.

"끄으으응..."

길게 앓는 소리를 낸 스페라가 웃는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단하네요."

그밖에 어떤 수식어를 입에 담아야 지금의 경이를 표현할 수 있을지, 스페라는 알지 못했다.

참 일방적이었던 대련을 돌아보며, 자신의 실력을 참 과신했다고 되새기던 스페라가 레이를 다시 바라봤다.

"레이, 제 증조부님께서 왜 2황자를 살해했는지 아나요?"

"저는 그런 정치적인 부분은 무지한 편입니다."

"저 때문에 그러셨어요."

"...네?"

스페라가 후후 웃더니 표정을 굳혔다.

"저 때문에 그러셨어요. 2황자는 제국에 로드 급이 더 늘어나는 걸 바라지 않았거든요."

2황자가 에른스트를 적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2황자는 제국에 굳이 로드 급이 필요치 않다고 여겼다.

만약 2황자가 황위에 오르고, 에른스트가 안식을 맞이하고, 그때까지 스페라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면.

2황자는 스페라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기 전에 손을 쓸 수도 있었다.

죄를 덮어씌우던가, 죽을 자리에 밀어 넣던가, 그밖에 방법은 많았다.

"그래서 증조부님께서는... 많이 무리한 선택을 하셨어요."

결국엔 잘 풀리긴 했지만, 황제가 2황자의 살해 사건에 가담한 에른스트를 처형하겠다고 나섰으면 누구도 말리지 못했을 것이다.

"증조부님은 자신이 발전시키고 완성시킨 검술이 후대로 이어져 더욱 위대해지길 바라셨어요. 제국을 사랑하시는 만큼 그런 갈망도 강하셨죠. 제가 증조부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뭐."

뒷말을 흐린 스페라는 조금 씁쓸한 감정을 내비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음, 당신을 저나 요하나와 같이 묶자니 많이 쑥스럽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어요."

"비꼬는 건 아닙니다만, 아가씨께선 저희처럼 천한 신분과 어울리는 게 껄끄럽진 않으십니까?"

"레이, 로드 급에 이를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건 축복같지만, 또 외로운 일이에요. 항시 감시와 경계의 눈빛을 견뎌야 하고, 동등하게 검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한 명도 구하기 힘드니까요. 그래서..."

스페라가 레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당신과 요하나를 만나 기뻤어요. 서로의 곁에 서서 같이 걸을 수 있는 친우와 반려를 만났다는 게... 정말 기뻤어요. 물론 당신은 한참 앞서 있긴 하지만..."

사뿐사뿐 다가온 스페라가 레이의 얼굴에 손을 대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 얼굴도 제 취향이고요."

"검은 잘 다루시는데 유혹에는 재능이 별로 없으시군요."

"저는 이제 열여섯 살이에요. 모든 걸 잘할 수는 없다고요."

짐짓 화난 얼굴로 휙 돌아선 스페라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제 증조부님을 닮았어요."

레이는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네?"

"당신은 제 증조부님처럼 강하고, 현명하고... 또 자기 사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죠. 우리의 만남이 강압적인 형태를 띠게 돼서 미안하긴 하지만, 나는 우리가 서로에게 '자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진심이 담긴 스페라의 고백을 들으며 레이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황제의 본격적인 숙청 작업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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