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등가의 소드마스터-159화 (159/446)

독대 (2)

159화

숟가락을 던져 레이의 미간에 명중시킨 요하나가 곧장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주먹을 휘둘렀다.

레이가 '농담, 농담이었다고!' 따위의 변명을 연거푸 외쳤지만 요하나는 뚝심 있게 레이의 턱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그렇게 소란을 떨었으니 가게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거게에서 쫓겨난 후, 카틀레야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레이의 일행을 바라보더니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 대신 잘못을 사과했다.

한편 밖으로 나온 요하나는 레이를 등진 채 홀로 씩씩거렸다.

레이가 아직 덜 얻어맞았는지 슬그머니 요하나에게 다가가 깐족거렸다.

"야, 우냐?"

쩌억!

그대로 레이의 정강이를 걷어찬 요하나가 주먹으로 레이의 갈비뼈 아래를 후렸다.

뻐억!!

"끄억...!!"

레이가 허리를 굽힌 채 끅끅대자 알레시아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정색했다.

"나의 기사여, 속으로는 한 명을 편애해도 겉으로는 평등을 유지해야 가정이 평화로운 법이니라. 자꾸 그러다가 야밤에 칼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

알레시아의 정론에 할 말이 없어진 레이가 잠시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고통이 가신 후 허리를 일으킨 레이가 다시 요하나에게 다가갔다.

요하나의 눈동자는 섭섭함과 짜증 탓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레이는 얼른 요하나의 뒤로 돌아가 요하나를 두 팔로 붙잡았다.

요하나가 팔꿈치로 레이의 복부를 쿡쿡 찍었고, 레이는 장난이 심해서 미안했다고 적당히 요하나를 달랬다.

그렇게 놀고 있는 사이 세바스와 세바스의 친구가 가게 밖으로 나와 레이에게 소리쳤다.

"이봐, 너 뭐하는 놈이야?"

세바스는 썩 불쾌해 보였다. 레이가 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장난질을 쳤다고 생각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알레시아가 슬그머니 레이 옆에 붙어 속삭였다.

"나의 기사여, 내가 저들의 무례를 지적하면 혹시 사과하고 물러갈 것 같으냐?"

"무시당하지 않을까요? 차라리 카틀레야가 나서서 알슈테인 가의 손님에게 무슨 무례냐고 따지는 게 더 효과 있을 것 같은데요."

"..."

알레시아가 흐물흐물해져서 뒤로 물러났다.

레이가 쟤들을 어찌 쫓아낼까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서 아직 덜 여문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 목소리의 주인, 스페라 프리슬란을 바라봤다.

알레시아 또한 스페라를 확인하자마자 자동 반사적으로 으르르 거리기 시작했다.

레이가 곧장 알레시아의 입술을 가볍게 잡으며 타박했다.

"어허, 밖에서 그러시면 안 돼요."

제지당한 알레시아가 시무룩해졌다.

레이는 알레시아의 입술을 놓아주곤 스페라를 마주봤다.

"안녕하세요, 스페라 님. 혹시 절 찾아오셨나요?"

"네."

"무슨 일로...?"

피식 웃은 스페라가 답해주었다.

"같은 침실을 쓰기 전에 미리미리 거리를 좁혀두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겠나요?"

스페라의 답변을 들은 알레시아가 재차 으르르 거리기 시작했다.

알레시아의 입술을 다시 잡은 레이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스페라가 자의적으로 여기까지 찾아왔을 것 같지는 않았고, 에른스트의 입김이 강하게 서려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현재 황도 사람들 사이에서 에른스트가 증손녀의 짝을 결정했다는 진위를 알기 힘든 소문이 돌고 있었다.

제국의 고위층이라면 그 소문이 진실임을 금방 알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헌데 스페라가 직접 찾아오는 모습을 이렇게 남들에게 보여버리면 그 뒤로는 어찌 될지 뻔했다.

지금도 세바스와 그의 친구가 레이와 스페라를 보고 소문이 어쩌구 저쩌구 서로 쑥덕대고 있었다.

레이로서는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쉬지 않고 압박하시는구만.'

에른스트는 남들에게 레이가 자기 사람이라고 완전히 낙인을 찍으려 하고 있었다.

레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다.

당장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체념한 레이가 스페라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기왕 이리 뵙게 된 거 황도 구경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

주변에 사람을 전부 물린 황제가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감각이 예전 같지 않은 탓인지 세상에서 가장 값비쌀 찻물의 감미로움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 9서클 대마법사와 함께 로드 급이라 칭해지는 강자들.

로드, 그러니까 오버로드 급이란 명칭은 칭송과 경계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스스로 원하든 원치 않든 찬탈자로 변모해 버리곤 했다.

때문에 군주에게 있어 소드마스터란 양날의 검이었다.

소드마스터는 그래듀에이트 수십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는 명실상부한 최강의 초인이었기에, 군주는 로드 급의 막강한 힘에 취하면서도 항상 찬탈의 위협을 받았다.

"..."

황제가 찻물을 다시 머금었다.

에른스트는 황제에게 있어 최강의 검이자 믿음직한 수하였다.

에른스트는 제국에 충성했고 자기 세력을 확장시키는 데 큰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에른스트와 오랜 시간 좋은 관계가 유지되다 보니 황제는 안이해졌고 거기서 실수를 했다.

황제는 에른스트의 무력을 항상 경계했지만, 정작 에른스트가 어떤 성향과 욕구를 지녔는지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고, 결국 이러한 실책이 '그날'의 참사를 일으킨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날로부터 과거를 되짚어보던 황제가 1황자를 떠올렸다.

"차라리 1황자에게 황위를 잇게 할 걸 그랬군..."

무능하지만 눈치는 괜찮은 편이었으니, 미리 권세 높은 귀족 가문들의 힘을 좀 빼놓고 황위를 잇게 했으면 주변에 휘둘리면서도 그럭저럭 자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2황자는 유능하고 잔혹했으며 강경한 면이 있었다.

2황자는 제국에 로드 급은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을 자주 내비치곤 했다.

제국의 힘은 이미 강대하니 굳이 분란을 유발한 만한 로드 급의 존재가 필요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한 2황자의 성향이 에른스트가 손을 쓰는 계기가 됐다.

에른스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국에 직접적인 반기를 든 모양새를 취했고 2황자를 살해했다.

황제가 과거를 되돌아보는 사이 에른스트가 허가를 받고 방으로 들어왔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에른스트는 잠시 당황했다.

독대라고 해도 황제에게 간신히 목소리가 닿을만한 거리에서 진행될 줄 알았는데, 황제가 앉아있는 방 안은 테이블이 다섯 개는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아담했다.

황제가 손짓했다.

"서 있지 말고 이리 앉게."

에른스트가 자리에 앉자 황제가 주름진 손으로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2황자가 변을 당한 지도 시간이 많이 지났군."

"폐하께서 그 일의 죗값을 치르라 명하시면 소신은 목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황제가 조소했다.

목을 내놓겠다는 게 진심이든 아니든 에른스트가 황제의 입장을 모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에른스트 경 혼자였다면, 나는 어떤 희생을 치르든 경을... 처단했을 걸세."

허나 제국에는, 마경과 인접한 국경을 수호하는 변경백 한 명이 존재했다.

그는 강대한 군사력을 지닌 소드마스터이자 야심이 강하다고 판단되는 인물이었다.

"...에른스트 경, 부탁이 있네."

"하명하십시오."

"내 사후에도 황실과 제국의 영토를 지켜주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이 되는군. 경은 제국제일검이지만, 변경백은 경보다 더 오래 살 것 아닌가."

소드마스터의 수명은 일반인에 비해 약 2배 정도 길다.

150년 정도 살아갈 수 있었는데, 에른스트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약 30년이었다.

짧은 시간은 아니었으나 변경백은 에른스트보다 30년은 더 정정할 터였다.

에른스트가 황제를 마주보며 말했다.

"제 증손녀가 제 역할을 이어받을 것입니다."

확답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불세출의 천재라 불린 인재들 중 끝내 로드 급에 다다르지 못한 채 스러진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어린 시절 높은 경지를 개척했다고 해도 무조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허나 에른스트는 자기 증손녀가 언젠가는 반드시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하리라 믿었고, 황제 또한 에른스트의 안목을 신뢰했다.

황제가 에른스트를 앞에 두고 낡은 웃음을 흘렸다.

나이가 들수록 분노, 배신감, 원망 같은 감정이 흐릿해지고 좋았던 추억만 곱씹게 된다.

황제는 몇 년 동안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려 제국을 방치했고, 이제는 늦게나마 결단을 내려야 했다.

"새로운 황태자를 책봉할 걸세."

"원하시는 후계를 말씀해주시면 포이보스가 아니더라도 지지하도록 하겠습니다. 포이보스는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아니, 포이보스를 황태자로 책봉할 걸세."

황제는 포이보스가 자기 자식이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남은 황족들 중 포이보스가 가장 영민했고 사리에 밝았으며 무난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에른스트 경,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네."

만약 2황자가 죽은 그 시점에서 포이보스를 황태자로 책봉했다면 그럭저럭 갈등을 최소화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허나 황제가 후계 구도를 방치한 사이 권력자들은 각기 다른 황족에게 줄을 대며 균열이 커졌다.

황제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지금부터라도 점진적인 교통정리가 가능했겠으나 이젠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포이보스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바로 눈을 감았다가는 제국이 갈기갈기 찢어질 만큼 갈등이 커질 것이다.

포이보스의 정통성이 떨어졌기에 더욱 그랬다.

결국엔 과격한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었는데, 유혈 사태를 동반한 대규모 숙청 또한 항상 강한 반발이 일었다.

이 반발을 충분히 억누르기 위해선 황제가 앞으로 5년은 황위에서 버텨야 했지만 황제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포이보스를 제외한, 권력자들이 줄을 댄 황족들을 깡그리 유폐시키거나 죽여야 했다.

"...내 잘못이지."

상황이 이리 극단적으로 치달은 건 분명 황제의 실책이었다.

잠시 침묵한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듣게."

현재 황제와 포이보스를 제외한 여섯 명의 황족 중 나이가 지긋한 두 명은 알아서 근신하고 있었다.

남은 네 명이 문제였는데, 그들에게 크고 작은 세력들이 들러붙어 이미 확고하게 파벌이 형성된 상황이었다.

"네 명을 전부 황도로 불러들일 걸세."

황제의 호출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황족과 귀족들이 모르진 않을 터다.

황제의 호출에 응한 황족은, 유폐되는 건 피하지 못하겠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황제의 호출에 응하지 않은 황족이었다.

"에른스트 경."

황제가 품에서 국새(國璽)를 꺼내 내밀었다.

제국에서 국새가 대체 불가한 의미를 가지진 않으나, 황제가 국새를 건넨다는 건 자신의 권위를 빌려주겠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황명을 어긴 황족의 목을 베어오게. 부차적인 피해는 최대한 줄여서."

에른스트에게 국새를 직접 건네준 황제가 당부했다.

"또한 드래곤하트를 반드시 회수하게."

안 그래도 수량이 적은데 1황자 사건처럼 드래곤하트를 자꾸 소실했다간 감당이 안 됐다.

자리에서 일어선 에른스트가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어쩌면 이건 황제의 함정일지도 몰랐다.

허나 에른스트는 제국에 충성했고, 또한 황제의 현명함을 믿었다.

이제 와서 에른스트를 쳐내려 해봤자 제국이 더욱 갈기갈기 찢기는 꼴밖에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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