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대 (1)
158화
제국의 수도, 드라노폴리스.
제국이 일천 년 넘게 이어질 수 있었던 근간.
제국에 위협이 들이닥치는 순간 이 드넓은 수도는 삽시간에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요새로 변한다.
로드 급 두셋이 대군을 이끌고 돌진한다고 해도 황도의 방위시스템을 공략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더군다나 황도에는 로얄 가드를 비롯한 황실기사단과 황제에 충성하는 세력이 넘쳐난다.
제국과 황권이 가장 약화된 시기에서조차 그 누구도 드라노폴리스를 넘보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제국이 존속했다.
'...근데 여기도 뚫렸잖아.'
그러니까, 원래 역사에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레이는 이곳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알지 못했다.
인류 최후의 요새로써 마지막까지 버텼는지, 아니면 마왕이 지나가는 길에 쓸려나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곳은 인류의 중심부라 부를만했고, 과거와 현대의 건축양식과 첨단 기술이 맞물려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애들한테 자극이 많이 되려나...'
레이의 일행은 오늘 알슈테인 가문 사용인의 도움을 받아 황도를 관광하고 있었다.
길을 안내해주는 알슈테인 가문 사용인의 이름은 '카틀레야'였고, 젠트리 출신이었다.
카틀레야가 황도 곳곳에 세워진 황금탑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 탑들은 영맥의 마나를 제어해 중앙 시스템으로 전송하는 역할을 합니다. 특수한 재질로 되어 있어 손상을 입히기 힘들고, 절반이 넘는 숫자가 파괴되어도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카틀레야의 설명을 들으며 레이와 레이가 데려온 아이들이 계속 길을 걸었다.
피라미드보다 좀 더 날카롭게 솟은 형태의 거대한 황궁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레이는 황국 주변의 탑 꼭대기에 배치된 포탑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몇몇 포탑의 포신은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거나 구경이 1 m가 넘어가기도 했는데, 쇳덩이로 된 포탄을 쏘아내는 용도는 절대 아닐 것 같았다.
그때 카틀레야가 높이 솟아있는 독특한 형상의 은색 탑을 가리켰다.
"저 황궁 동쪽에 세워진 탑은 용오름 의식을 진행하는 곳입니다. 새로 탄생하신 황족께서 일곱 번째 탄생일을 맞으시면, 그날을 기념해 동쪽의 탑에서 하늘 높이 빛을 밝히는 용오름 의식을 치릅니다. 저도 한창 어릴 때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설명을 들으며 헤벌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황궁을 구경한 후 다시 거리를 걷다 보니 복장을 통일한 젊은 사람들이 열을 맞춰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지스 생도들이군.'
입고 있는 정복의 문양을 확인한 레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데런이 이지스 생도들을 가리키며 카틀레야에게 물었다.
"저분들은 누구인가요?"
"이지스... 일종의 황립 사관학교 생도들입니다."
"쉽게 말해 로얄가드 양성소야."
레이가 한마디 거들었다.
작위 계승이 힘든 귀족이나 한미한 가문의 후계자, 혹은 젠트리 계층 중 재능이 우수한 자들이 주로 이지스에 입학한다.
이지스 생도들 중 특히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 추후 로얄가드를 비롯한 고위직으로 진출하고, 남은 생도들은 황실 기사단이나 군 간부 쪽으로 빠지고는 했다.
즉 이지스는, 신원 확인이 쉽고 재능이 우수한 인재들을 확보하기 위해 황실이 창설한 교육 기관이었다.
간간이 고위 귀족의 자녀들이 이지스에 입학하기도 했는데, 미리 인맥을 다지거나 인재를 빼돌릴 목적으로 입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요한 인재를 잘못 빼돌렸다간 황제에게 머리 깨지기 십상이었지만 말이다.
카틀레야와 레이의 설명을 들은 데런과 이안, 루카는 동경 어린 시선을 이지스 생도들에게 보냈다.
레이가 데런의 어깨 위를 잡으며 말했다.
"야, 너희들이 지금처럼만 꾸준히 노력하면 5년 안에 충분히 저기 입학 가능해."
"네? 정말요, 형님?"
"응."
이지스가 아주 불세출의 천재만 거둬가는 기관은 아니었다.
데런 정도의 재능이면 앞으로 2~3년만 지나도 입학시험은 통과할 수준이 되었다.
다만 신분 검사가 무지하게 까다로웠는데, 이건 세리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어쨌든 이지스는 데런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출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신분이 천해 무시는 좀 당하겠지만, 다루기 쉬워 보일 테니 윗사람들은 도리어 좋아할 수도 있었다.
"...하여튼 좀 열심히들 해봐."
데런과 이안, 루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레이는 실소를 잠깐 흘렸다.
데런이야 어린 시절부터 레이를 잘 따랐고, 요하나에 비해 훨씬 가벼운 사춘기를 겪었기에 여전히 레이를 동경하며 성실하게 훈련에 임했다.
그에 반해 이안과 루카는 좀 억지로 공부와 수련에 임하는 감이 있었다.
레이가 심심하면 갈군 탓에 게을러지진 못했지만 그래도 '동기'가 부족하다는 건 쉽사리 느껴졌다.
'이제는 알아서 열심히 하려나.'
더 넓은 세상을 보았고 새로운 목표가 생겼으니 스스로를 더욱더 채찍질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이가 세 녀석을 두 팔 안에 가두며 말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항상 뭐라고 주의했지?"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고요?"
"그래, 나중에 너희들이 어떤 위치에 서게 되든, 그게 누구의 은혜 덕분이었는지는 잊지 마."
천애 고아 녀석들이 여기까지 서는데 레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아이들의 머리를 툭툭 두들긴 레이가 요하나를 돌아봤다.
"너는 관심 없어? 나이가 문제지, 네 실력이면 지금도 입학시험은 쉽게 통과할 거고, 이지스에선 네 약점을 대부분 보완할 수 있을 거야."
다양한 고급 검술도 익혀보고, 재능에 걸맞은 지원도 받고, 인맥도 쌓고.
전부 요하나에게 필요한 요소였다.
눈치를 보던 요하나가 슬그머니 물었다.
"레이도 그럼 이지스에 입학하는 거야?"
혼자는 싫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레이와 단절되는 건 싫었다.
레이는 그때 가봐야 안다고,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이지스 생도들을 따라 걷다 보니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황도 한가운데 존재하는 광장을 10명이 넘는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 중엔 로얄가드도 있었다.
이지스 생도들을 인솔하던 교관이 기사들의 허가를 받은 후 생도들을 데리고 광장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광장 한가운데,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검 한 자루가 홀로 꽂혀 있었다.
일렬로 선 생도들이 교관의 인도에 따라 순서대로 검자루를 잡았다.
검을 뽑아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던 생도들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카렌이 물었다.
"뭘... 하는 거예요?"
"이지스 입학생이 동일하게 치르는 관례입니다."
"저 검을... 손에 쥐는 게요?"
"저 생도들은 뽑아내고 싶었겠죠."
"저 검은 아티펙트인가요?"
"그런 말은 삼가는 게 좋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성물을, 아티펙트로 분류했다간 교단의 분노를 사도 할 말이 없으니까요."
"...!"
아이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저것이, 이야기책 속에서 무수히 보았던 바로 그 성검(聖劍)이라고.
약 600년 전 당대의 팔라딘이 사용한 것이 성검의 마지막 사용 기록이다.
세상이 어둠에 물들었을 때, 엘-람의 선택을 받은 고강한 성자만이 사용 가능한 최강의 성물.
아이들은 먼 거리에서 외관만 흐릿하게 보이는 성검을 향해 경이로운 감정을 내비쳤다.
데런 또한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뒤늦게 레이를 돌아봤다.
"형님, 형님이라면 뽑을 수 있지 않을까요?"
데런에게 레이는 그만큼 위대한 존재였다. 사실, 그리 틀린 생각도 아니었고.
레이가 성검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뽑히기야 하겠지."
*
오전 내내 황도를 열심히 돌아다닌 후.
레이의 일행들은 디저트 가게를 들렀다.
황도 인근에서 보았던 가게보다 훨씬 화려한 가게였다.
디저트 가게에 입장한 알레시아가 굉장히 좋아했다.
"여기는 우리를 들여보내 주는구나!"
"..."
입뺀 안 당했다고 좋아하는 알레시아를 보며 레이는 괜히 가슴이 아팠다.
오늘 디저트 가게를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알레시아를 비롯한 일행들이 알슈테인 저택에서 그나마 멀쩡한 옷을 빌려 입었고, 또한 카틀레야가 미리 연락을 넣어놨기 때문이었다.
디저트 가게 안은 젊은 남녀가 많았다.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은 레이의 일행들에 비해서 훨씬 화려했다.
물론 레이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런 걸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점원에게 예약이 잡힌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와아..."
커다란 원형 테이블로 안내받은 아이들이 감탄하며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레이가 앉고, 레이 왼쪽에는 알레시아가 앉고, 알레시아 왼쪽에는 루나가 앉고, 그리고 레이의 오른쪽에는 카렌이 앉았다.
반대쪽엔 남자애들이 주르륵 앉았고 말이다.
"..."
뭔가 굉장히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 배치가 끝나자 요하나는 괜히 짜증이 났다.
"요하나, 어디 불편해?"
카렌의 물음에 요하나는 입을 삐죽이며 카렌과 데런 사이에 앉았다.
착석이 끝나고 곧 다양한 디저트들과 음료가 테이블 위에 세팅됐다.
레이가 손바닥을 작게 맞부딪쳤다.
"자, 이곳을 포함한 모든 관광 비용은 우리 아가씨...가 아닌 내 고모님께서 대는 관계로 다들 나한테 감사하도록."
알레시아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그것도 잠깐이었고, 얼마 안 가 다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디저트 가게 안은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 투성이였다.
가게의 그릇도, 조명도, 전반적인 실내장식도 촌구석에선 구경도 못 할 만큼 세련되고 화려했다.
음식의 감미로움은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레이가 아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홀로 중얼거렸다.
'촌놈들이 찾아왔다고 뒤에서 엄청 욕을 하겠구먼.'
그래도 아이들이 즐거우면 된 것 아닌가.
그리 생각하며 빵을 썰어 입에 넣는데 레이의 뒤에서 생소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알레시아가 뒤를 돌아봤다.
허나 테이블로 다가온 남자는 알레시아가 아닌 카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레시아가 실망하는 사이, 레이는 테이블로 다가온 남자 두 명을 살폈다.
두 남자 모두 이지스 생도의 정복을 입고 있었고, 각각 카렌과 요하나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카렌에게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저는 릴포드 가문의 세바스라고 합니다."
세바스는 인사를 건넨 후 열심히 입을 놀렸는데, 내용이야 뻔했다.
나와 내 친구가 아리따운 두 분, 그러니까 카렌과 요하나를 보고 심장이 빠르게 뛰어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름 좀 알려줄 수 있겠느냐, 뭐 그런 얘기였다.
레이는 잠깐 고민했다.
과연 요하나가 카렌 옆에 앉았기에 세트로 묶인 걸까, 그게 아니면 세바스의 친구란 놈이 진짜 요하나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답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레이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카렌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것에 비해 뒤떨어지는 차림새를 하고 있다 보니 자꾸 만만히 보고 접근하는 놈들이 생겼다.
릴포드 가문이라면 힘깨나 쓰는 귀족가였고, 세바스가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신분이 천해 보이는 카렌에게 접근했을 가능성은 낮았다.
퍽 친절하게 구는 세바스를 향해 레이가 포크를 겨누었다.
"야."
"...지금 날 가리킨 건가?"
당황한 세바스를 향해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내 마누라 좀 그만 괴롭혀. 왜 자꾸 남의 마누라에 눈독을 들여?"
"...?!"
뭐야, 이놈 마누라였어?
세바스가 놀라서 카렌을 바라봤다.
카렌이 생각지도 못했던 레이의 발언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댔다.
"서, 서방님..."
몸을 배배 꼬는 카렌을 보고 세바스가 자기가 진짜 유부녀를 꼬드긴 건가 고민하는 사이.
요하나가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쿵쿵 두드리며 레이를 바라봤다.
이쪽에도 뭐라 한 마디 해봐라, 뭐 그런 뜻이었다.
숟가락 소리를 들은 레이가 요하나와 세바스의 친구란 놈을 번갈아 보더니, 따뜻한 웃음을 머금었다.
"두 분은 잘 어울리시는 것 같은데 한 번 잘해봐요."
직후 요하나가 들고 있던 숟가락이 레이의 미간에 박혔다.
*
아도이아의 도움을 받아 황제와 독대할 복장을 갖춰보던 에른스트가 불쑥 물었다.
"아도이아, 1황자 문제와 관련하여 루비하 왕국이 입장을 번복한 적이 지금까지 있는가?"
"제가 알기에는 근 3년간 1황자와 관련된 사태에 대해 루비하 왕국이 입장을 번복한 적은 없습니다. 정확하진 않으니, 다시 알아보고 보고드리겠습니다."
"..."
1황자와 관련된 사건은 제국과 왕국 모두에게 껄끄럽게 작용했기에 유야무야 덮고 넘어간 느낌이 강했다.
국력이 약한 루비하 왕국이 적당히 굽히고 들어가며 갈등이 마무리됐지만, 그와 별개로 루비하 왕국은 일관되게 '제국이 척살대를 다시 보내 1황자를 죽였으며, 그 과정에서 드래곤 하트가 소실됐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제국이 첩자를 통해 알아본 결과 왕국 안에선 괴소문이 나돌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제국이 공간검의 복원에 성공했다는 둥, 공간검을 익힌 로얄가드가 직접 와서 타락한 1황자를 죽였다는 둥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 가득했다.
에른스트를 비롯한 제국 관계자들은 루비하 왕국이 책임을 일부 면하기 위해 고의로 국내에 헛소문을 퍼뜨린 후 제국에 책임을 묻는다고 생각했다.
되도 않는 헛짓거리를 한다고 비웃었는데...
"..."
에른스트가 지도를 보았다.
시그니 산맥, 필립스 백작령, 1황자의 도주 경로.
에른스트의 눈가가 좁아지는 순간 아도이아가 입을 열었다.
"에른스트 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닐세."
에른스트가 남은 단추를 마저 잠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