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나한테 시비 거냐?"
"농담입니다."
레이는 그리 말하면서도 대놓고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제플린은 뒷목을 잡았지만, 레이로서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아공간에 수납된 병기는 탐색할 방법이 거의 없는 만큼 전술적인 이점이 명확했다.
모로스 외에도 아공간 검을 하나 더 소유하게 된다면 비무장을 가장한 상태에서도 언제든지 검 두 자루를 뽑아낼 수 있었다.
그래도 없는 물건을 달라고 할 순 없으니, 레이는 한발 물러섰다.
"아티펙트가 아니어도 되니, 검으로써 기능에 충실한 작품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규격은?"
"이 롱소드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레이가 허리춤에 있던 철검을 뽑아 제플린에게 건넸다.
평균적인 사이즈의 평범한 형태의 롱소드였다.
가장 많은 수의 기사들이 애용하는 사이즈인 만큼, 제플린의 아틀리에에도 비슷한 규격의 작품이 많았다.
어떤 검을 보여주어야 할지 제플린이 고민하는데 에른스트가 입을 열었다.
"제플린."
"부르셨습니까?"
"오메가 시리즈는 잘 보관되어 있는가?"
"..."
살짝 눈살을 찌푸린 제플린이 몸을 돌렸다.
"따라오시지요."
제플린은 일행들을 데리고 아틀리에의 가장 깊은 지하에 존재하는 창고로 향했다.
오메가 시리즈는 제플린과 그의 동료들이 제작한 수많은 명품들 중에서도 극소수의 하이엔드 작품만을 따로 분류해 묶은 목록을 가리켰다.
애초에 오메가 시리즈에 속하는 물건 자체가 몇 개 되지도 않았으나, 에른스트가 가리키는 오메가 시리즈는 단 하나였다.
철컥!
복도 끝에 도착한 제플린이 마법진을 활성화시키자 매끈했던 강철벽이 네 조각으로 나누어져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밀려났다.
모습을 드러낸 새하얀 방 안에는 오직 검 한 자루만이 중앙에 솟아올라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검이었다.
무광에 가까운 은색 검신과 검은색 칼자루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어떤 부가적인 장식도 붙어있지 않았다.
제플린은 시간을 들여 경보 마법을 해제한 후 검을 뽑아 레이에게 건넸다.
레이는 검을 받아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사악!
보기보다 약간 무거웠다.
무게중심은 완벽히 잡혀 있었으며,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검에 바람이 스며드는 듯한 울림이 일었다.
레이의 입가에 자연히 미소가 맺혔다.
제플린은 레이의 반응이 기꺼웠다.
레이는 겉치장과 프레스티지에 집착해 이곳에 찾아오는 대다수의 귀족들과 달리, 검이 검으로써 지니는 가치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잠시 레이를 따라 웃던 제플린이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건 그냥 검이 아니고 아티펙트다. 내가 싫어하는 놈이지."
"무슨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공간 진입이 가능하다."
"..."
레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제플린을 쳐다봤다.
장인이란 작자들은 역사적으로 물건 한두 개 꿍쳐놓고 간 보는 관습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레이의 시선에서 감정을 읽은 제플린이 인상을 구겼다.
"설명을 똑바로 들어라. 아공간 진입이 가능하다고 했지 아공간 수납이 가능하다고는 안 했다."
"그... 무슨 차이입니까?"
언뜻 듣기론 말장난처럼 들렸다.
제플린이 레이의 손에서 검을 다시 뺏어 들어 설명을 시작했다.
"아공간 진입이 가능한 건 이 검신 뿐이다. 이 검의 검신은 하르콘 합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합금도 아공간 진입 때 발생하는 차원 반발을 제대로 버티지는 못한다."
"...?"
"눈살 찌푸리지 말고 끝까지 들어. 하르콘 합금에 마법적 술식을 가미하면, 차원 반발에 의한 내부 손상으로부터 발생한 에너지를 추력으로 전환 가능하다. 이해하겠냐?"
"부서질수록 더 강한 에너지와 추력을 얻는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래. 자... 이 하르콘 합금으로 이루어진 검신을 아공간에 진입시켰다가 곧장 이탈시키는 거다. 그 과정에서 가해지는 차원반발이 검 내부를 급격히 망가뜨릴 거고..."
제플린이 천천히 반원을 그리던 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촤악!
"하르콘 합금의 내부 구조가 붕괴되며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추력을 만들어 검을 가속시키게 된다. 휘둘러질 때 검신은 반쯤 아공간화 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장갑의 방호력은 전부 무시 가능하다."
"아니..."
설명을 알아들은 레이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게 한 번 휘두르면 검이 박살 난단 말씀 아닙니까?"
"운이 좋아야 두세 번 버티겠지. 허나 위력은 확실하다. 어지간한 그래듀에이트나 마법사도 대응하기 힘들거야. 이 기술의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아공간 발도술 정도 되겠지."
"...네이밍이 좀 구리지 않습니까?"
"야이씨, 그러는 너는 뭐 좋은 생각 있냐?"
"...디멘션 엑셀러레이션(Dimension Acceleration)는 어떻습니까?"
"네 네이밍 센스도 만만찮게 구리구나."
레이와 잠시 투닥거린 제플린이 혈압 오르는 걸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로드 급이라 해도 이 기술을 모르고 있다면 당황은 시킬 수 있을 거다. 에른스트 님의 투자 아래 개발된 병기이며 그 존재 자체가 기밀이다. 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물건은 아니다만."
정말 좋은 검이긴 하지만 내장된 기술을 몇 번 쓰면 박살날 무기였다.
결정적인 순간에 몇 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박살난 검에 이름이 붙어봤자 얼마나 오래 기억될 수 있겠는가.
제플린이 레이에게 검을 다시 건네며 당부했다.
"어차피 부러뜨릴 거라면, 되도록 위대한 존재를 베어라. 실체가 사라지고 기록만이 남아서도 검의 이름이 오래 기억될 수 있도록."
"...염두해두겠습니다."
"검집은 아틀리에를 나가는 길에 적당한 걸 찾아주마."
"감사합니다."
레이가 가만히 검을 내려다봤다.
이건 단순히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병기였다.
치장만 잘해서 경매에 내놓으면 몇천만 골드는 쉽사리 뛰어넘을 것이고, 애초에 주인이 내놓지도 않을 물건이었다.
이건 에른스트가 레이에게 보내는 호의였고, 경고였으며, 족쇄이자 빚이었다.
레이는 복잡한 감정을 억지로 삼키며 다시 제플린을 따라 걸었다.
제플린은 레이에게 어떤 기능의 갑주가 필요하냐 물어보려다 고개를 저었다.
"넌 그냥 주는 대로 받아라."
"네?"
"옷이나 좀 벗어봐라. 상의는 완전히 탈의해."
레이는 시키는 대로 따랐다.
상의를 완전히 탈의하자 상체의 절반가량을 뒤덮은 화상 흉터가 드러났다.
눌어붙은 레이의 살가죽을 보며 제플린이 낮게 웃었다.
"꽤 험하게 살았구나."
"앞으론 평온하길 바라야죠."
"섭섭한 소리를 하는군."
레이가 계속 험하게 살아야 제플린이 검을 쥐여준 보람이 있었다.
레이 또한 제플린을 따라 웃었다. 굳이 제플린이 재촉 안 해도 레이의 앞길은 평탄하진 못할 예정이었다.
제플린은 레이의 체격을 측정한 후 상의와 하의가 일체화된 슈트를 하나 가져왔다.
"로얄가드에게 공급 예정인 신제품이다. 갑주의 빈틈을 보완하기 위해 안에 받쳐입는 내갑이다."
"..."
레이가 받은 슈트를 손 위에서 흔들어 보았다.
흐물흐물 펄럭이는 꼴이 아무리 봐도 금속보단 면직물에 가까운 재질처럼 보였다.
그래도 레이는 일단 군말 않고 슈트를 입었다.
슈트는 몸에 착 달라붙어 착용감은 굉장히 좋았지만, 방호력은 아예 기대하기 힘들 듯 했다.
그때 제플린이 뾰족한 지팡이 끝으로 레이의 가슴을 강하게 찔렀다.
까앙!!
"...!"
"보다시피 강한 외부 충격을 받으면 슈트가 부분 경질화된다. 찌르기나 날카로운 투사 무기에 특히 강한 방호력을 제공하고, 내열성이나 항마력도 꽤 강한 편이다. 네가 지금 입고 있는 물건은 제국의 금속 제련 기술과 마도 공학의 결정체다. 잃어버리면 난리 날 테니 간수 잘해라."
"그... 저한테 주셔도 괜찮은 겁니까?"
"책임은 네가 져야지. 어디, 마지막으로..."
벽면이 갈라지며 또 새로운 방이 드러났다.
방 안에는 검은 망토 하나가 홀로 전시되어 있었다.
레이가 물었다.
"아티펙트입니까?"
"그럼 뭐 평범한 가죽 망토를 저렇게 보관하고 있을까. 아티펙트고, 주 재질은 드래곤 가죽이다."
놀란 얼굴을 한 레이를 보고 제플린이 낄낄 웃었다.
"드래곤 가죽은 제국에 재고가 좀 있는 편이다. 뭐, 하여튼 이 녀석은 내열성, 내한성, 항마력이 우수하고 약간의 형태 변형과 자체 기동이 가능하니 외부 공격을 방어하기도 용이하며 격렬히 움직여도 걸리적거릴 일은 없을 거다."
망토에 마나를 불어넣어 기능을 활성화시킨 제플린이 잠시 고민하다 설명을 덧붙였다.
"비행...이라 부르긴 힘들겠지만 공중에서의 가속과 안정적인 활공 정도는 가능하다. 나중에 직접 테스트 해봐라."
"...이거 참 부담돼서 속이 아프네요."
"어울리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착용이나 해봐."
제플린이 복도를 걷는 길에 하나 집어왔던 검집을 던지며 말했다.
레이는 받은 장비를 하나하나 다시 착용해 보았다.
안갑 위로는 알슈테인 가문이 제공한 정복을 갖춰 입고, 그 위로 망토를 착용했으며 허리춤에는 화려하진 않으나 우아한 장식이 새겨진 검집을 묶었다.
그리 멀끔하게 꾸미고 나니 변방 촌구석에서 쏘다닐 때보다는 훨씬 기품 있어 보였다.
요하나가 입을 헤-벌리고 레이를 훑어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괜히 헛기침했다.
제플린은 내심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술식이 새겨진 종이를 한 장 더 레이에게 건넸다.
"그 망토는 영구 동력원은 없지만 대기의 마나를 빨아들여 자동으로 에너지가 충전된다. 급히 에너지 충전할 일이 있으면 마법사에게 부탁해라. 그리고... 저 아이의 검을 완성하면 다시 연락하도록 하겠다. 넉넉하게 1달 정도 잡고 기다려."
레이는 에른스트와 제플린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
요하나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알슈테인 가문의 저택에 복귀했다.
다른 아이들이 몰려든 가운데, 알레시아까지 슬그머니 나와서 요하나가 새로 맞춘 장비를 구경했다.
견갑과 각반이 변형되더니 스스로 움직여 요하나를 보호하는 모습은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다들 부러움이 가득 담긴 탄성을 연거푸 터뜨렸다.
레이는 먼저 루나에게 제플린에게 받아왔던 종이를 건넸다.
"요하나가 착용한 건 충전식 아티펙트야. 충전하는데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네. 루나가 좀 도와줄 수 있어?"
"...네, 알겠어요."
루나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루나에게 웃어주고는 허리춤에 있던 검 한 자루를 칼집째 던졌다.
요하나의 아티펙트를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던 데런이 갑자기 날아온 검을 깜짝 놀라 붙잡았다.
콰악!
"어, 형님?"
"그건 네 거야."
레이가 방금 던진 검은 아틀리에를 떠나기 직전 제플린에게 서비스 하나 더 챙겨달라 해서 받아낸 검이었다.
온갖 진상은 다 떨어보는 레이 때문에 제플린은 거품을 물려고 했지만 그래도 검 한 자루를 더 챙겨주긴 했다.
X 시리즈 바로 밑 등급의 검이었기에 어지간한 기사가 쓰기에도 충분히 명검이었다.
"데런, 조금만 더 노력해봐."
레어 고아 중에서 데런은 가장 검술 재능이 뛰어났고, 또한 노력가였다.
발전 속도를 보니 성인이 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정도만 해도 그럭저럭 천재 소리를 듣고 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데런은 감동했고, 다른 아이들은 조금 배 아픈 표정을 지었다.
레이야 항상 성과와 노력에 따라 보상을 달리했으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레이는 한숨을 푹푹 몰아쉬다 카렌에게 이리 와보라고 손짓했다.
레이가 많이 피곤해 보였기에 카렌은 걱정과 기대가 반반 섞인 채로 레이에게 다가왔다.
"왜 그래, 레잇?!"
레이가 다가온 카렌을 폭 끌어안았다.
카렌이 어버버 거리다 뭐라 한마디 하려는데 그보다 앞서 레이가 카렌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레이는 그대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오늘은 기가 정말 다 빠져나간 것처럼 피곤했기에, 레이는 두 눈을 감은 채 카렌의 살내음을 느꼈다.
레이에게 있어 벨라만큼이나 오랜 시간 함께했던 카렌이었다.
어릴 적 카렌은 레이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기 위해 애썼고, 나이가 좀 들고 나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레이의 집을 자주 찾아와 간단한 도움을 주곤 했다.
그렇기에 레이는 카렌의 살내음으로부터 추억과, 마음의 안정과, 약간의 흥분을 느꼈다.
레이가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카렌은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레이의 숨결에 단단히 굳어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다른 아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아이들은 레이가 저리 대놓고 애정표현 비슷한 것을 하는 걸 처음 보았다.
아이들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마음을 다잡은 레이는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들이쉰 후 카렌에게서 떨어졌다.
"난 들어가서 좀 쉴게."
레이가 저택 문을 닫고 사라질 때까지 카렌은 제자리서 굳어 있었고, 다른 아이들은 알레시아와 요하나, 특히 요하나의 눈치를 보느라 눈동자를 굴렸다.
요하나는 꿈도 꾸지 못한 아티펙트를 선물 받아놓고도 속이 쓰려 오는 걸 느끼며 괜히 자기 명치를 퍽 때렸다.
"짜증 나."
이 짜증이 레이를 향한 건지 카렌을 향한 건지, 그도 아니면 자기 자신을 향한 건지 요하나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좋은 재능을 타고났다 해도 요하나는 아직 능숙함이나 노련함과는 거리가 먼 18살의 소녀였다.
*
"황제 폐하께서 독대 요청을 수락하셨습니다."
"..."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왔던 에른스트가 아도이아의 보고를 받고 한숨을 푹 쉬었다.
"길었군."
그래, 긴 시간이었다.
조금 늦은 감은 있었지만, 이제 황제와 에른스트는 결단을 내리고 움직여야 했다.
독대 일정을 확인한 에른스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