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제국의 소드마스터.
이 여덟 글자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가.
제국의 소드마스터, 에른스트 프리슬란.
그는 검 한 자루로 초월을 이룬 인류의 정점이자 프리슬란 후작가의 위명을 제국 전역에 떨치게 한 가문의 당주였다.
저 왜소해 보이는 노인의 몸뚱이엔 100년이 넘는 역사가 집약되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레이는 스스로가 오만했음을 새삼 자각했다.
레이에게 자신감을 주었던, 레이의 손에 쥐여진 '강함'은 초월적인 존재가 내린 축복과 몇 가지 기연이 맞물려 급조된 조잡한 누더기였다.
겉으론 그럴싸해 보였으나 진정한 절대자와 맞부딪쳐 보니 허술해도 이리 허술할 수가 없었다.
"..."
레이는 평정을 가장하려 했지만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표정을 굳힌 레이를 보고 에른스트가 낮게 웃었다.
"좋은 인연이 따른 모양이구나. 축하한다."
에른스트는 그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레이를 지나쳐 앞서 걸었다.
에른스트는 여유로웠고, 레이는 숨이 막혔다.
요하나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눈치를 보다가 이마 위로 식은땀이 번들거리는 레이의 옷깃을 슬쩍 당겼다.
그제야 레이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제플린 또한 일종의 신경전이 오고 가는 걸 느꼈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제플린은 지금 물건을 내어줄 생각에 들떠 있었다.
본래는 아무리 제플린이라 해도 다른 이들과 협력해서 제작한 값비싼 병기를 마구 방출할 수는 없었다.
병기 제작에 투자금이 들어간 만큼 회수를 해야 했고, 아틀리에에 존재하는 고급품들은 고위 귀족에게 비싼 값에 팔려 벽에 걸어놓는 장식품이 되곤 했다.
게다가 지엄한 제국 법령이 존재하는 이상 최신 기술이 들어간 아티펙트를 남에게 함부로 공개하지도 못 했다.
허나 에른스트가 직접 나서서 값을 치른다고 한 순간부터, 제플린은 거리낄 게 없어졌다.
앞서 걸어가던 제플린이 요하나를 돌아봤다.
"너부터 시작하자."
*
본래 제플린은 요하나에게 적당한 사이즈의 검 한 자루만 대충 던져줄 생각이었다.
레이와 요하나 둘이서만 아틀리에를 찾아왔다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허나 본격적으로 창고를 열어 재끼기로 한 이상, 제플린도 요하나가 어떤 스타일의 검식을 구사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요하나에게 적합한 장비를 선별하고, 여의치 않으면 맞춤 제작을 진행할 수 있었다.
검술 시범을 보이라는 말에 요하나가 꾸물거렸다.
검술도 받아주는 상대가 있어야 훨씬 수월하게 펼쳐 보일 수 있었다.
허나 레이는 요하나의 눈짓을 받고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괜히 요하나의 검을 받아주다가 에른스트가 레이에게서 하르시아류 검식의 흔적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바로 나가리였다.
적당히 다른 검식을 흉내 내면 해결될 일이지만 레이는 어째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레이가 환생한 이후 유례없이 쫄아 있는 사이 에른스트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검을 잠시 받아주마. 최선을 다해라."
"허어."
제플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국의 기사들 중 에른스트와 잠시 검을 나눌 영광을 얻기 위해 천금을 바칠 자가 넘쳐났다.
허나 에른스트는 재물 따위에 연연 않고 자신의 눈에 차는 극소수의 인재만을 직접 지도했다.
'저 소녀 또한 재능이 정말 뛰어나긴 한가 보군.'
제플린은 그제야 요하나에게 강한 흥미를 내비쳤다.
요하나가 감사 인사를 한 후 에른스트에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제플린은 요하나의 검술이 대단히 민첩하고 변화무쌍함을 확인했다.
검기의 충돌이 3분가량 이어진 후.
에른스트는 제자리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검을 받아주다 입을 열었다.
"스페라에게 사용했던 기술을 보여봐라."
요하나는 시키는 대로 따랐다.
마나의 폭발로 인해 가속된 요하나의 검이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에른스트는 태연하게 검을 놀리다가 요하나의 검격을 슬쩍 옆으로 흘렸다.
"우왁!"
전혀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균형이 무너진 요하나가 앞으로 굴렀다.
에른스트는 잠시 요하나가 사용했던 기술을 곱씹어봤다.
아직 미완성인 기술이었기에 어설픈 구석이 많았다.
허나 제대로 완성만 한다면 꽤 유용하고 강력한 절기가 될 것임을 에른스트는 간파했다.
"정진하거라."
에른스트의 짧은 조언에, 끙끙거리며 일어난 요하나가 다시 감사 인사를 했다.
제플린은 요하나가 사용했던 검을 받아와 살폈다.
검면에 속이 막힌 구명 몇 개가 인위적으로 뚫려 있었다.
레이가 제플린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에 마나를 터뜨려 검을 가속시키는 방식입니다."
"...희안한 기술을 쓰는구나."
원리 자체는 단순했다.
그렇기에 제플린은 쉽사리 새로운 검의 설계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검을 원하는 방향으로 가속시키기 위해선...'
양쪽의 검면에 비스듬히 세워진 구멍을 각각 네 개씩은 뚫어야 했다.
각 검면에 비스듬히 세워진 네 개의 구멍이 십자 형태를 취할 텐데, 잘만 디자인하면 작은 꽃봉오리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다.
구멍의 내부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마나가 폭발할 때 폭발력이 특정 방향에 집중되는 정도가 달라질 텐데, 이건 직접 실험해보며 결과를 도출하는 것 말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처음부터 새로 하나 만들어야겠군.'
검면에 구멍을 뚫어놓은 검 따위를 미리 만들어 놨을 리가 없었다.
제플린은 복도 양옆으로 길게 늘어진 창고 중 한 곳을 열어 적당한 검을 한 자루 꺼내 요하나에게 던져주었다.
"네 전용 검은 따로 제작해보겠다. 보름에서 한 달은 걸릴 거야. 그건 일단 예비용으로 쓰거라."
당장 내일부터 조수와 동료를 불러모아 작업 들어가도 설계부터 시작해야 하니 최소 보름이었다.
요하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제플린이 던진 검을 받았다.
제플린은 부무장으로 쓰라고 던져준 검이었지만, 당장 그것만 해도 제플린의 X 시리즈에 상응하는 물건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인사는 에른스트 님께 드려라."
그리 말한 제플린이 다시 복도를 걸어가며 레이에게 물었다.
"허큘러스란 아티펙트에 대해 들어본 적 있냐?"
"그거 저희 고모가 사용하시던 아티펙트입니다만."
"...아, 그렇군."
바로 얼마 전에 레이가 세리아 알슈테인의 조카였다는 정보를 접한 제플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 나와 동료들은 허큘러스를 대여한 후 역설계를 통해 자료를 수집했다."
"오, 그럼 허큘러스 같은 아티펙트를 양산할 수 있는 겁니까?"
"허큘러스에 집약된 기술은 대단했지만 성능만 따지자면 이름값에 못 미쳤어. 발레리우스가 욕심을 부렸는지 아티펙트 하나에 기능을 너무 많이 욱여넣었거든."
은폐장 전개, 대검에서 갑주 형태로의 변형, 사용자 변경에 따른 사이즈 조정, 거기에 자체 기동 기능까지.
"굵직하게 나눠도 주요 기능이 네 가지나 되었는데 정작 갑주로서 방호력은 형편없었지."
"아, 그러고 보니 잘 부서지긴 하더라고요."
"직접 써먹어 본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부서지는 걸 옆에서 구경은 했습니다."
레이가 정신을 다잡기 위해 자기 관자놀이를 툭툭 치는 사이 제플린이 길목을 막고 있던 결계를 풀고 더 안쪽으로 진입했다.
"허큘러스의 연구 자료를 토대로 제작한 프로토타입의 아티펙트가 있다."
잠시 일행을 멈춰 세운 제플린이 새하얀 문을 열고 홀로 창고에 들어가더니 견갑과 각반 형태의 아티펙트를 들고 나왔다.
제플린은 곧장 요하나의 왼쪽 어깨와 오른쪽 다리에 아티펙트를 착용시켰다.
우웅-!
견갑과 각반이 진동하더니 마나로 이루어진 푸른 선을 뻗어 서로를 링크시켰다.
제플린이 지팡이를 가져와 화염구를 생성한 후 요하나에게 들이대 보았다.
쩌엉!
곧장 아티펙트로부터 푸른 방어막이 전개되어 화염구를 막아냈다.
"이런 방어막 전개 기능도 있고..."
제플린이 눈짓하자 레이가 검을 뽑아 검기를 만든 후 요하나의 가슴 가까이 들이대 봤다.
그러자 요하나의 어깨와 종아리에 부착되었던 아티펙트가 삽시간에 팔다리를 타고 올라와 요하나의 흉부를 두껍게 가렸다.
"상황이 위급할 시 이렇게 스스로 형태를 변형시켜 급소를 직접 방어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지. 방호력이 아주 우수하다고는 못하겠지만 갑주 형태의 아티펙트에 비해 사용자의 운동 능력을 거의 해치지 않는 게 장점이다."
"와, 대단한데요."
레이가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제플린이 요하나의 어깨를 감싼 견갑을 툭툭 두들기며 설명을 덧붙였다.
"내부 에너지를 추력으로 전환하는 기능도 존재는 한다. 하지만 에너지 효율이 좋은 장비는 아니야. 몇 번 쓰면 마법사에게 부탁해 재충전해야 돼."
제플린이 레이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요하나에게 건네준 아티펙트를 충전할 때 사용되는 술식이 적혀 있었다.
레이는 감사를 표하고 종이를 품에 넣었다.
한편 요하나는 헤벌쭉하게 입을 벌린 채 푼수처럼 웃음을 흘렸다.
"에헤... 헤헤..."
스스로 위협을 파악해 주인을 지키는 아티펙트라니.
요하나는 이런 대단한 아티펙트는 동화책에서나 구경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헌데 그 동화책 속의 아티펙트가 지금 자기 손에 있었다.
"에헤헤..."
정신을 못 차리고 실실 거리는 요하나를 제플린이 뒤에서 밀었다.
"저리로 가라. 네 체격 정보를 정확히 입력해야 아티펙트의 기능을 완벽히 활용할 수 있다."
제플린은 사람의 신체를 스캔 가능한 기계가 있는 방으로 요하나를 밀어 넣고는 기계에서 출력되는 데이터를 받아보기 위해 옆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동안, 복도에는 레이와 에른스트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레이는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슬그머니 눈을 피하는 레이를 두고 에른스트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사람은 무릇 꿀과 채찍으로 다뤄야 하는 법이다."
"..."
레이가 포기하고 에른스트를 돌아봤다.
에른스트는 레이와 눈이 마주치며 뒷말을 이었다.
"허나 나는 네게 꿀물만 가득 타서 건넬 것이다. 이유를 아느냐?"
"...제가 충분히 영민해서 그러십니까."
"정답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짐승과 다를 게 없어, 채찍질을 당하기 전엔 누구 손에 채찍이 들려있는지조차 헷갈리곤 한다.
허나 에른스트가 보기에 레이는 충분히 영민하고 눈치가 빠른 자였다.
채찍에 살갗이 찢어지지 않는다고 자기 처지를 착각할 만큼 우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은데, 대체 무엇이 껄끄러워 아직도 망설이고 있느냐?"
"..."
레이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억누르며 표정을 관리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고, 그렇기에 미리 답변을 준비해 두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평정을 가장한 레이가 입을 열었다.
"함부로 입에 담기 거북한 내용입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국의 정세가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정세...?"
"저는 배경이 훌륭하지 못합니다. 지키고 싶은 건 많은데 가지고 있는 건 알량한 본신의 무력 밖에 없지요. 그래서 제국의 혼란이 가라앉은 후 안전하게 승리자의 뒤에 서고 싶었습니다. 에른스트 님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런 혼란이야말로 네 가치를 높일 기회일 텐데."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제 가치는 이미 충분히 대단합니다."
"하하... 옳은 말이다."
만족스럽게 웃은 에른스트가 레이와 거리를 좁혔다.
"네 생각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너를 이미 내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다. 내가 그리 만들 것이고."
"...아직 필립스 백작가에 갚아야 할 은혜가 많습니다."
"난 신의를 지키고자 하는 자를 좋아한다. 내가 내린 은혜 또한 잊지 않을 테니 말이야. 그러니 너의 입장 또한 존중해주겠다."
레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쓸어내린 에른스트가 머리를 가까이한 채 속삭였다.
"혼란은 곧 끌날 것이다."
황제가 감정이 상했다고 일을 미룬 탓에 쉽게 끝날 일이 유혈 사태로까지 번지게 생겼지만, 그래도 작은 소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조금, 조금 더 기다려주겠다. 이 늙은이를 너무 애태우진 말거라."
"알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다."
에른스트가 한 발 물러섰다.
레이와 감정의 골이 생기는 건 에른스트 또한 바라지 않았기에, 에른스트는 여유를 가지고자 했다.
그때쯤 최적화 작업을 끝낸 요하나가 방에서 뛰어나왔다.
웃음이 그치지 않는 게 어지간히 신이 난 것 같았다.
제플린도 작업을 마치고 나오더니 힘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레이에게 물었다.
"자... 이제 네 차례다, 레이. 무기나 방어구에 원하는 기능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봐라."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이 여기 있을 것이다.
말만 해봐라. 넘쳐나는 고성능 아티펙트를 아낌없이 선별해서 넘겨주겠다.
강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내비치는 제플린을 보고 레이가 답했다.
"아공간 수납."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