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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55화 (155/446)

155화

레이는 남에게 실력을 내보이기 꺼려했다.

육체 나이에 비해 지나친 성취도 문제였지만, 검강 발현이 가능할 만큼 코어를 회전시키면 심장에 걸리는 부하가 상당했다.

그렇기에 반드시 서클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서클을 본격적으로 활용하면 사방이 얼어붙는 건 금방이었다.

냉기를 방출하며 검강을 발현하는 레이를 보고 하르시아 코스프레를 한다고 웃고 넘어갈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터다.

때문에 레이는 방금 셰이를 공격할 때 최대한 짧게 끊어쳤다.

검이 뽑혀 나오는 찰나 코어의 회전을 한순간 가속시킨 후 오버드라이브를 사용한 것이다.

셰이는 레이의 일격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쩌엉-! 소리와 함께 셰이가 튕겨져나간 뒤.

스페라는 코앞에서 벌어진 충돌의 후폭풍 탓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걸 느끼며 기겁했다.

'뭐지...?!'

섬광이 번쩍이더니 셰이가 튕겨 나갔다.

스페라는, 대련 직후라 아무리 피로가 쌓여 있다 해도 레이의 동작을 완전히 놓쳤다는 것에 경악했다.

스페라가 얼을 타고 있는 사이 레이는 알레시아와 장난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알레시아 님 괴롭힌 사람 때찌 했어요."

"역시 나의 기사로구나!"

스페라는 정신이 혼란한 와중에도 알레시아를 바라보며 주인에게 간식 받아먹는 개새끼 같다고 생각했다.

한편 결계와 울타리를 부수고 땅을 구른 셰이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걸 느끼며 무릎을 세웠다.

셰이 또한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레이가 방금 가한 일격의 정체가 무엇인가.

위력만 보면 분명 검강에 가까웠다.

허나 상식적으로 레이가 검강을 사용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차라리 정체 모를 아티펙트를 사용한 기습이었다는 게 훨씬 그럴듯했다.

셰이가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봤다.

레이의 기습을, 셰이는 스페라의 검으로 막았다.

자기 검도 제대로 구분해서 뽑지 못했다는 건 기사로서 상당한 굴욕이었다.

뿌득!

이빨을 갈아낸 셰이가 분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뒤 상황이야 어쨌든 레이는 일개 스콰이어 주제에 스페라의 호위 기사에게 선공을 가했다.

이는 호위 기사뿐만 아니라 스페라를 직접적으로 위협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촤악!

자기 검을 뽑아든 셰이가 검강을 발현한 후 금방이라도 돌진해올 것처럼 레이에게 기세를 투사했다.

그 찰나 강력한 기운이 셰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쩌엉!!!

힘에 밀려 튕겨져나가는 셰이를 보며 레이가 중얼거렸다.

"여기 너희 집 안방 아니라니까."

이곳은 알슈테인 가의 저택이다.

알슈테인 가의 영역이었고, 또한 세리아 알슈테인이 이곳에 존재했다.

그리고 세리아는 자기 조카에게 대놓고 살기를 드러낸 상대를 가만히 방치할 생각이 없었다.

세리아가 검강을 뽑아든 채 셰이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자 셰이는 당황해서 외쳤다.

"자, 잠시만, 세리아 알슈테인 경!"

세리아는 셰이의 외침을 가볍게 씹고 돌진했다.

쩌엉!

쉽사리 셰이의 검을 옆으로 쳐낸 세리아는 곧장 셰이의 멱살을 잡고 엎어 쳤다.

쿠웅!

"어억!"

셰이는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세리아는 셰이라 해도 함부로 대하기 정말 어려운 상대였다.

비록 밖에서 업어온 사람이지만, 어쨌든 세리아는 알슈테인 가문에서 항렬이 무지하게 높았다.

정확히는 당주와 동일한 항렬이었고, 본신의 실력은 말해봤자 입만 아팠으며, 가문에서 영향력도 이제는 상당히 강했다.

셰이가 어버버하는 사이 땅바닥에 처박히고 있자 디오리카가 달려와 세리아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이고, 고모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디오리카가 세리아를 붙잡고 질질 끌려다니기 시작하자 스페라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가와 상황을 중재했다.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자 스페라는 디오리카에게 우선 사과했다.

이곳은 황실이 일정 기간 동안 알슈테인 가문이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한 땅이었다.

헌데 알슈테인 가문의 땅에서 알슈테인 가문이 초대한 손님들에게 먼저 건방을 떨었으니 실수했음은 분명했다.

물론 레이의 역량이 수준 이하였다면 스페라는 끝까지 자존심을 부렸겠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증조부가 왜 갑자기 혼약을 운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스페라가 먼저 낮추고 들어가자 디오리카 또한 감사를 표했다.

상황을 정리한 스페라가 저택을 떠나기 전에 요하나에게 인사했다.

"이름이 요하나라고 했지?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길 바랄게. 오늘 즐거웠어."

"가, 감사합니다."

요하나는 스페라를 어려워하는 기색을 내비치며 인사를 받았다.

요하나에게 스페라는 그저 힘 좋은 귀족일 뿐이었다.

스페라는 요하나에 이어 레이와 인사했다.

"증조부님께선 사람 욕심이 많으세요. 그쪽을 절대 놓치지 않으실 거예요. 증조부님은 당신이 인정하신 사람에겐 아낌없이 베푸는 분이시니, 잘 생각해봐요."

레이를 향해 살짝 웃어준 스페라가 알레시아를 돌아봤다.

알레시아는 레이 곁에 딱 붙어서 아까처럼 으르르르 거리고 있었다.

스페라는 개의치 않고 알레시아의 손을 붙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스페라는 알레시아의 얼굴을 자주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레이의 재능이 정녕 스페라를 한참 뛰어넘었다면, 레이가 스페라와 혼인한 후 부인이나 첩실을 몇 명 더 들여도 에른스트는 관대하게 용인해줄 확률이 높았다.

아이는 스페라가 가장 먼저 가져야 한다는 조건쯤은 걸겠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리된다면 알레시아와도 부대끼고 살아야 할 확률이 높았다.

스페라는 마지막으로 대련을 도와준 디오리카에게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한 후 저택을 떠났다.

알슈테인 가문의 저택에 흐르던 묘한 긴장감이 드디어 사라졌다.

레이 또한 안도하며 요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잘했어."

요하나는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레이는 내심 뿌듯한 감정을 느끼며 요하나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요하나는 복잡한 감정 탓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레이의 가슴을 퍽퍽 쳤다.

그러면서도 레이의 손을 직접 잡아 떨쳐내진 않았기에, 레이는 계속해서 요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디오리카를 보았다.

"디오리카 님, 요하나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따라오게. 직접 안내해주겠네."

"정말 감사합니다."

레이는 요하나를 데리고 디오리카를 따라가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리할 수 없었다.

세리아가 레이를 들어서 자기 허리춤에 끼웠기 때문이다.

조카에게 도움을 주었으니 이제 이 조카는 한 시간 동안 자기 거였다.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지만 세리아 혼자 그렇게 정했다.

레이는 세리아에게 납치되어 가며 디오리카에게 요하나를 잘 부탁한다고 외쳤다.

점점 멀어지는 레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디오리카가 요하나를 돌아봤다.

"...가자꾸나."

디오리카는 제대로 된 치료소에 들르기 위해 사용인들에게 마차의 준비를 명령하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알슈테인 가문이 고모님께 섭섭하게 굴지 않았어서 다행이군.'

세리아를 처음 가문에 들일 때 신분이 천한 외부인에게 지나치게 큰 혜택을 부여하는 게 아니냐고 논란이 많았다.

헌데 그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세리아는 알슈테인 가문이 가진 레이와의 강력한 연결고리였다.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직접 인정한 레이의 잠재성을 곱씹은 디오리카가 웃음을 머금었다.

*

스페라가 알슈테인 가문의 저택을 들렀다가 돌아간 다음 날.

레이는 틱틱거리는 요하나를 데리고 제플린의 아틀리에, 그러니까 공방을 찾아갔다.

원래는 여유를 가지고 들를 생각이었는데 제플린이 늦게 찾아왔다고 꼬장 부릴까 봐 우선적으로 일정에 넣었다.

레이와 요하나는 알슈테인 가문에 속한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헤매지 않고 아틀리에를 찾을 수 있었다.

"하..."

제플린의 아틀리에에 도착한 레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거대한 대장간 같은 공간을 상상하며 찾아왔는데 작은 성처럼 생긴 건물이 레이를 맞아주고 있었다.

예상 못 한 광경을 보며 레이가 중얼거렸다.

"땀 냄새랑 용광로랑 수증기는 다 어디 갔어?"

"그런 게 여기도 있긴 하다만, 너는 내가 담금질만 하는 줄 아냐?"

제플린이 정문에서 걸어나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 이름이 꽤 떠들썩하던데. 임자에게 제대로 걸렸더구나."

"떠들썩한 건 못 느끼겠던데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뭐, 그렇긴 하겠네요."

"근데 얘는 왜 데려왔냐?"

제플린이 요하나를 가리켰다.

요하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제플린은 인사에 답하지 않고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레이에게 보냈다.

레이가 요하나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주며 입꼬리를 올렸다.

"재능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이 아이라면 제플린 님의 작품에 이름을 새겨 역사에 남길 수 있을 겁니다."

"..."

"얘가 몸 성장도 어느 정도 끝나서 보호대라도 맞춰주고 싶은데 남는 물건 좀 있나요?"

"네가 날 아주 호구로 아는구나."

피식 웃은 제플린이 말을 이었다.

"난 내 눈으로 본 게 아니면 안 믿는다. 그 재능이란 걸 내게 증명해 봐라."

"음..."

잠시 고민한 레이가 입을 열려던 차에 누군가 말을 가로챘다.

"그 소녀의 재능은."

노인의 목소리가 레이의 뒤에서 들려왔다.

"내 증손녀에 비해서도 떨어지지 않네."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른스트가 직접 요하나의 재능을 보증하자 제플린이 요하나를 다시 내려다봤다.

어지간하면 자기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제플린이었지만 에른스트의 보증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랐다.

가까이 다가온 에른스트가 제플린에게 당부했다.

"이 아이들에게 쓸만한 물건 좀 보여주게. 값은 내가 치를 테니."

"흠..."

제플린이 고민하는 사이 에른스트가 요하나에게 먼저 인사했다.

"반갑구나."

"안녕하세요."

"내 증손녀가 널 알게 되어 정말 좋아하더구나. 스페라는 보기보다 외로운 아이니, 네가 좋은 경쟁자와 친우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요하나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사이, 제플린이 끼어들었다.

"에른스트 님, 저 안에 수십만 골드는 우습게 넘는 물건들이 즐비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건 값을 에른스트가 치른다기에 나온 물음이었다.

에른스트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걱정하지 말게. 어차피 내 수중에 다시 돌아올 물건들이니."

가만히 서 있던 레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내 사람이 되던가, 내 사람이 되지 않으면 조져버리겠다는 경고를 참 고상하게도 돌려 말하는군.'

이러나 저러나 물주 역할 해준다는 데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사양한다고 에른스트의 관심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제플린은 세 명의 손님을 데리고 아틀리에로 들어갔다.

"아공간 수납이 가능한 장비가 있냐고 물었지?"

"네."

제플린이 레이를 잠깐 바라보더니 낮게 웃었다.

"이 아틀리에 안에는 없다. 왜 없는지 아냐?"

"음... 글쎄요."

"여느 이야기꾼들은 과거의 기술을 잃어버린 탓이니 뭐니 헛소리들을 하는데 진짜 원인은 소재가 부족해서 그렇다."

시간이 흘러 실전된 기술이야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극소수였다.

마법사들이 자기 지식을 꽁꽁 싸매길 좋아하긴 하지만 황실 마탑의 존재가 핵심적인 마법 지식의 소실을 방지했다.

삐걱거리면서도 마법 공학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었고, 때문에 과거보다 전반적인 기술 수준이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는 않았다.

아공간 수납?

그런 기능을 넣기 위해선 마법사 다수의 조력을 받아야 했기에 비용은 엄청 깨졌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아공간 진입을 버틸만한 성질을 가진 소재가 극소수라는 점이었다.

"옛날에 그런 소재를 다 써먹은 탓에 이제는 구하기가 굉장히 힘들지."

"아, 그렇군요."

제플린의 이야기를 레이가 그럭저럭 흥미롭게 듣고 있는데 에른스트가 레이에게 물었다.

"무기를 구하러 왔느냐?"

"네, 그렇습니다."

"검이 몇 자루나 필요하지?"

"한 자루면 족합니다."

어설픈 걸 서너 자루 받아가느니 제대로 된 물건을 하나 받는 게 나았다.

에른스트가 레이의 허리에 묶여 있는 품질이 그럭저럭 괜찮은 철검을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네겐 검 두 자루가 필요할 텐데."

레이가 자리에서 멈춰 섰다.

에른스트는 다시 한 번 레이의 몸을 훑었다.

왼손잡이, 오른손잡이, 그리고 어떠한 무기를 다루느냐에 따라 근육이 발달하는 형태는 조금씩 달라진다.

눈대중만으로 아주 섬세한 구분은 불가능했지만, 에른스트는 상대가 검을 한 자루만 휘두르는지 두 자루를 휘두르는지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에른스트의 눈에는 레이에게 검 두 자루가 필요했다.

레이가 가지고 있는 검이 정녕 허리춤의 철검 하나가 끝이었다면, 어떻게든 이 아틀리에에서 제대로 된 검 두 자루를 얻어가려 했을 것이다.

헌데 한 자루로 만족하겠다는 건...

"네가 목숨 같은 무기를 품에서 놓고 다닐 만큼 안일해 보이진 않으니, 흠."

에른스트가 자기 혼자 답을 유추해 납득했다.

"남은 한 자루는 아공간에 들어가 있나 보구나."

"..."

레이가 속으로 생각했다.

아, 정말 토할 것 같다고.

아틀리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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