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요하나는 꿀릴 게 없다.
이 또한 많은 의미가 섞여 있는 대답이었다.
요하나는 레이처럼 외부 공개가 껄끄러운 기술들을 초월자에게 전해 받지 않았다.
요하나는 루나처럼 마법사들이 알았다면 환장했을 리실로테의 유산을 홀로 계승 받지도 않았다.
요하나는 좋게 말하자면 남 눈치를 봐야 할 만큼 숨겨야 할 게 없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재능에 걸맞은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재능을 외부로 드러내는 게 항상 리스크를 동반한다만...'
허나 요하나는 이미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자신의 재능을 남들에게 선보인 바 있었다.
어차피 관심을 받을 거라면 좋은 입찰자를 끌어와 경쟁시키는 게 나았다.
레이가 젠킨슨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제국의 소드마스터께서도 지금 장면을 보고 계시거나 빠르게 소식을 전해 들으시겠죠."
"그러니까 그게 괜찮을 거 같냐는 말이다."
"다들 입 모아서 에른스트 님은 재능 있는 자에겐 관대하다고 떠받들지 않습니까. 인재를 강압적으로 데려간다 하더라도 보상은 확실한 성격이라고 하시니 뭐..."
"요하나를 다른 사람에게 내줄 생각이냐."
"내주고 말고 할 거 없이 요하나는 어차피 제국의 중심에서 우뚝 설 만한 재능을 타고났어요. 마스터도 알고 계셨잖습니까. 이제 와서 남에게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쉬우세요?"
"아쉽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도 드는구나."
젠킨슨은 착잡한 감정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요하나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았으면 저리 두 살이나 어린아이를 상대로 버둥거리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필립스 백작님과 마스터를 비롯한 기사님들께서는 저희에게 너무나 과분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네 녀석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봤자 감흥이 안 생기는구나."
"종자에게 말이 심하시군요, 마스터."
낮게 웃은 젠킨슨이 다시 물었다.
"그것보다 에른스트 님이 요하나를 당장 데려가겠다고 나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뭐, 옛날처럼 제가 아무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에른스트 님은 지금 저한테 관심이 쏠려서 정신없으실 겁니다."
"결국은 네 녀석도 이곳에 발이 묶여 있단 소리 아니냐."
"...따지자면 그렇죠."
헛웃음을 흘린 젠킨슨이 당부했다.
"일이 어떻게 되든 아가씨는 잘 챙겨주거라. 그것 하나는 약속해다오."
"머리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둘 중에 누가 이길 것 같으냐?"
어린 소녀들의 대련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수준의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레이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라 확답하기엔 둘의 역량이 그리 차이 나지 않았다.
*
스페라는 상처가 늘어날수록 즐겁게 웃었다.
스페라는 지금보다 한참 어린 시절부터 걸출한 재능을 타고났다고 인정받으며 많은 투자를 받았다.
그 아낌없는 투자 덕분에 육체는 강건하게 성장했으며 체내에는 잘 정제된 마나가 넘쳐났다.
검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된 약 2년 전부터, 스페라는 성년이 되지 않은 자들 중 대결이 제대로 성립되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
그건 외로운 일이었다.
항시 수염 자국이 가득한 어른들과 검을 나누다 보니 자연히 감정이 메말랐다.
헌데 지금 이 순간.
이름도 모를 또래의 소녀가 갑자기 나타나 비등하게 검을 겨뤄주기 시작했다.
스페라는 너무나 즐거웠다.
메말라 갔던 감정이 다시금 색채를 머금고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스페라는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요하나 또한 공감해주기를 바랐다.
피슉!
다시 핏물이 튀었다.
재능으론 메우지 못할 2년의 세월이란 격차가 미묘한 틈을 만들어 스페라를 상처입혔다.
스페라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숨겨둔 기술을 어설프게 아낀다고 이 순간의 즐거움을 잃고 싶진 않았다.
고민하던 스페라는, 결국 외부에 쉽게 노출하면 안 될 비기를 꺼내 들었다.
찌직-!
기사를 비롯해 마나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직군은 모두 '개안'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개안을 통해 마나의 움직임을 시각에 담아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프리슬란 가문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고자 오랜 시간 노력했고, 마침내 에른스트 프리슬란이란 천재가 출현해 가문의 불완전한 비기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스페라 또한, 에른스트가 완성한 비기의 총체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찌지직-!
집약된 마나가 시신경을 뒤집어서 다시 한 번 스페라의 시야를 변화시킨다.
붉은 원이 금색으로 빛나는 스페라의 눈동자를 가두듯이 흰자 위에 그려졌다.
그 괴이한 변형은 미세한 공간의 일그러짐을 시각화 시켜 스페라의 뇌리에 입력했다.
스페라는 두통이 몰려오는 와중에도 쾌감을 느꼈다.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중력'과 '관성'의 벡터 값이 색상을 뒤집어쓰고 두 눈에 담긴다.
에른스트가 만인에게 스페라를 '증손녀'라 칭하게 된 확실한 계기.
두 번째 개안.
스페라는 이른 나이에 가문의 비기를 완벽하게 계승했다.
이제 스페라는, 짧게나마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요하나의 검이 본격적으로 꺾이거나 휘둘러지기 전에 그 궤적과 위력을 완벽히 예측할 수 있었다.
스페라의 입가에 웃음이 짙어졌다.
쩌엉!
요하나가 움직이고자 했던 방향을 먼저 막아선 스페라가 요하나의 틈을 파고들었다.
일순 당황한 요하나의 손이 어지러워졌다.
스페라는 요하나가 감정을 가라앉힐 틈도 주지 않고 악착같이 밀어붙였다.
파가가가각!!!
기동력이라는 요하나가 지닌 최고의 장점이 봉쇄되기 시작한다.
요하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이대로는 갇혀 죽는다.
움직임을 완전히 읽혀버린 이상 힘으로라도 봉쇄를 뚫어내야 했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찰나 간 요하나의 머릿속을 '4위 결정전'이나 '강등' 따위의 단어가 헤집고 지나갔다.
"망할 새끼..."
억눌린 감정을 토해낸 요하나가 눈을 빛냈다.
요하나는 레이에게서 오버드라이브를 어레인지한 기술을 가르침 받은 적이 있었다.
실질적인 위력은 오버드라이브에 한참 못 미쳤고 다루긴 또 더럽게 어려웠지만, 그래도 몸에 걸리는 부하가 훨씬 가벼웠다.
레이는 정작 기술을 만들어 놓고 통제하기 힘들다고 쓰지 않았지만 마나 제어력을 타고난 요하나는 그걸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콰앙!!
요하나가 검기를 이루던 마나의 일부를 변환해 폭발시켰다.
미리 칼에 파놓은 홈을 따라 폭발이 번지며 검을 가속시켰다.
쩌엉!!
요하나의 검이 순간적으로 스페라의 대검을 밀어냈다.
검기나 검강으로 한 번 변환된 마나를 다시 순간적으로 변환시켜 폭발을 유도하는 건 레이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허나 요하나는 천부적인 마나 제어력으로 그 기술을 실전에서 펼쳤다.
"흐아압!!"
"...!"
카가가각!!!
요하나가 악을 쓰며 스페라를 밀어내려 애썼고, 스페라 또한 발작하며 요하나의 앞길을 막았다.
불세출의 천재라 불려도 아직 제대로 개화도 못 한 어린 꽃봉오리들 간의 격돌이었다.
제대로 체득도 못한 기술을 억지로 사용하자 둘 모두 밸런스가 급격히 무너졌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부딪침 속에서 스페라는 공격에 힘을 싣지 못했고 요하나는 날카로움을 잃었다.
스페라는 자신이 무너져 가는 걸 자각하면서도 계속해서 웃었다.
되도록 지금 이 순간을 길게 이어가고 싶었다.
허나 두 번째 개안이 가하는 부하 탓에 머리가 쪼개질 듯한 두통과 함께 시야가 흐릿해졌다.
[너는...]
스페라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알 수 없는 감각이 몸을 덮치는 걸 느꼈다.
마치 깊은 꿈속에 잠겨 있을 때처럼, 망상에서 비롯됐을 괴이한 풍경과 확신이 찰나 간 스페라의 무의식을 뒤흔들었다.
[나의 숙적.]
누군가가 내린 기적, 혹은 저주가 맞물리며.
스페라가 이제는 빗겨가버린 운명을 훔쳐보았다.
우리의 첫 만남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이리 유쾌하지 않았다.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간대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났어야 했다.
본래의 운명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참살하기 위해 발악한... 서로의 숙적이자 죽음이었다.
콰앙!
요하나를 억지로 밀어낸 스페라가 검기가 집약된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어차피 우리가 숙적의 운명을 타고났다면 지금 그 운명을 마무리 짓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일변한 스페라의 기세에 요하나 또한 검을 다잡았다.
무언가 온다.
요하나는 위험을 직감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요하나 또한 스페라와 같이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마지막 참격을 준비했다.
서로의 코어가 한계까지 활성화되며 상대를 참살하기 위한 마지막 비기가 시전되려 했다.
허나 둘은 끝을 보지 못했다.
갑작스레 난입한 셰이가 스페라를 뒤로 잡아당기며 요하나에게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꽈앙!!
"악...!!"
스페라에게 집중하고 있던 요하나는 제대로 대응도 못 한 채 셰이의 검격을 얻어맞고 지면을 뒹굴었다.
뒤로 우당탕 미끄러지던 요하나를 레이가 재주 좋게 받아냈다.
레이가 충격을 흡수한답시고 요하나와 같이 뒤로 넘어지는 사이, 셰이가 스페라의 팔목을 붙들며 말했다.
"지나치셨습니다."
"...그렇네."
마지막 충돌은 물론 두 번째 개안 같은 비기도 남 앞에서 함부로 꺼내 보여서는 안 됐다.
스페라는 자신이 너무 신나서 날뛰었음을 자각하며 대검을 셰이에게 건넸다.
'마지막에 그건... 뭐였지?'
스페라는 한순간 찾아왔다 사라진 알 수 없는 환영들을 더듬었다.
너무나 현실 같고 잔혹했던 꿈이... 잠시 잠깐 머리속을 헤집다 사라진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을 떠올리려 해봤자 계속해서 두통만 심해지자 스페라는 고개를 저은 후 요하나와의 대련을 곱씹었다.
비등한 대련이었다.
스페라가 요하나보다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그동안 프리슬란 가의 일원으로서 받아먹은 걸 생각하면 부끄러운 결과였다.
"좋네."
실력을 겨룰만한 또래가 생겼다는 건 경각심과 함께 즐거운 감정을 일으켰다.
한편 지면을 굴렀던 요하나는 끙끙 앓으며 반쯤 눈을 뜨더니 자기가 레이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걸 깨닫고 안심했다.
아직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요하나가 멍한 눈빛으로 레이의 가슴에 얼굴을 비벼왔다.
요하나가 부리는 오랜만의 애교에 레이가 요하나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계속해서 비비적거리던 요하나가 이내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다.
"..."
뻐억!!
그대로 마운트 자세를 잡은 요하나가 주먹질을 시작했다.
레이가 기겁하며 가드를 올렸다.
"자, 잠깐...!!"
뻐억!! 뻐억!!
대여섯번 더 주먹을 내지른 요하나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요하나를 젠킨슨이 붙잡아주자 레이가 한숨을 푹 쉬고는 셰이를 쳐다봤다.
"저런 악성 훌리건 같은 년을 봤나."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인상을 쓰며 셰이에게 다가갔다.
"대련 중에 갑자기 끼어드시면 어떡합니까? 위험했잖아요."
"대련이 과열되어 제지했을 뿐이다."
"저도 제지할 생각이긴 했는데 방법이 너무 과격하시잖습니까."
셰이 정도의 실력자라면 요하나를 그렇게 날려보내지 않아도 훨씬 안전하게 제지 가능했다.
허나 셰이는 도리어 인상을 찌푸리며 겁박했다.
"끌려가기 싫으면 적당히 까불어라. 에른스트 님께 인정받았다고 해도 네 신분은 아직 기사도 못된 스콰이어다."
"하하..."
헛웃음을 흘린 레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경께서 우리 아가씨도 막 겁주고 그랬다면서요?"
알레시아가 쪼르르 다가와 레이 곁에 딱 붙어서 셰이를 째려봤다.
그새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셰이와 스페라는 알레시아를 보며 동시에 생각했다. 하는 행동이 주인 만난 개새끼 같다고.
셰이는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기세를 뿜어내며 레이에게 물었다.
"불만인가?"
"아이고..."
작게 실소한 레이가 셰이에게 마주 다가가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야."
"?"
"여기가 너희 집 안방 같냐?"
쩌엉!!!!!!
레이의 검격에 가격당한 셰이가 결계를 뚫고 날아가 울타리를 부수고 땅을 굴렀다.
아틀리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