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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53화 (153/446)

153화

에른스트가 황도에 존재하는 수십 개의 황금색 탑 중 하나를 밟고 서서 어딘가를 내려봤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감각이 한참 떨어진 장소를 쉽사리 시야에 담았지만, 이내 결계가 펼쳐지며 주변의 시선을 차단했다.

에른스트는 덤덤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붉은 원이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가두듯이 흰자 위에 그려졌다.

"저 아이가 미련하게 구는구나."

에른스트가 스페라가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스페라는 감히 에른스트의 뒤를 이을 수 있다고 자신할만한 재능을 타고났으나, 그렇다고 레이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에른스트는 과연 레이가 얼마나 손대중을 해줄지 관심을 가졌지만 정작 레이는 동행했던 소녀를 앞세웠다.

"흠..."

설마 직접 가르친 제자인가.

소녀의 나이는 레이와 비슷해 보였으나 레이의 재능을 고려했을 때 또래를 직접 가르쳤다 해도 전혀 의아할 게 없었다.

저 소녀가 정녕 레이에게 선택받은 제자라면 소녀의 재능 또한 평범하진 않을 터다.

"기대해 보지."

에른스트가 입가에 흐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

"4위 결정전이다."

"..."

요하나가 레이를 빤히 쳐다봤다.

4위 결정전.

요하나는 그 생소한 단어가 주는 미묘한 불쾌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요하나는, 설마 이 새끼가 '그런 의미'로 4위를 운운한 건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불쾌한 감정이 치솟았다.

요하나가 일단 레이의 옆구리로 주먹을 휘둘러 봤다.

퍽!

"억!"

레이는 곧장 방어 자세를 취했는데, 어째 당황하는 기색은 없고 요하나가 이리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준비된 반응을 보였다.

심증을 굳힌 요하나의 주먹질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퍽퍽' 수준에서 머물던 주먹질이 얼마 못 가 '뻐억 뻐억'에 가까운 타격음을 뱉어냈다.

레이는 뒤늦게 안면에 철판을 깔고 갑자기 왜 이러냐고 지껄였다.

요하나는 입을 놀려봤자 자기만 추해질 것 같았기에 레이의 말을 무시한 채 있는 힘껏 주먹만 내질렀다.

그꼴을 보며 스페라가 작게 고개를 젓고는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호위기사인 셰이가 허리춤에 매어두었던, 클레이모어를 닮은 거대한 검을 뽑아 스페라에게 건넸다.

스페라는 자신의 신장만한 길이를 지닌 대검을 두 손으로 잡아 옆으로 늘어뜨렸다.

"장난에 어울려주는 것도 지치네요."

스페라가 레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대검 때문에 무게 중심이 흔들려 휘청이던 스페라가 이내 허리를 곧게 펴고 앞으로 가속했다.

츠즈즉!

대검의 거대한 검신 위로 마나가 휘몰아치더니 삽시간에 푸르게 타올랐다.

스페라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레이와 요하나를 동시에 베어낼 것처럼 대검을 휘둘렀다.

카각!!!

"...어머."

스페라가 깜짝 놀란 시늉을 했다.

검집에서 뽑혀 나온 요하나의 검이 스페라의 대검을 제자리서 막아서고 있었다.

스페라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요하나를 마주봤다.

방금의 일격은 힘을 빼고 휘두르긴 했으나 대검에는 검기가 서려 있었다.

말인즉슨 공격을 막아낸 요하나의 검에도 검기가 서려 있었다는 소리였다.

스페라는 요하나가 준비가 될 때까지 기대려 주겠다는 듯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났다.

요하나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레이를 째려보더니, 스페라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겉으론 평정을 찾은 것 같았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

레이의 농담이 너무 기분 나빴다. 아니, 농담이 맞긴 한 걸까?

진심을 담았다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걸까.

내가 저 녀석을 이기지 못한다면 너에게 더는 가치 없는 사람이 될 거라는 경고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저 녀석을 이기기만 한다면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사랑하는 증손녀보다도 날 우선해 주겠다는 응원이었을까?

무엇이 되었든, 요하나로선 유쾌하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끄득!

요하나가 검 자루를 억세게 쥐었다.

답을 찾지 못할 문제를 고민하기보다 치솟아 오르는 짜증을 먼저 해소하고 싶었다.

마침 적당한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대검을 쥐고 여유를 부리는 자그마한 소녀 말이다.

요하나가 스페라에게 성큼 다가섰다.

촤악!!

스페라는 요하나가 접근하자마자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미리 대검의 사정거리를 눈대중해놨던 요하나는 쉽사리 스페라의 일격을 피하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휘두른 대검을 회수하는데 소모되는 시간을 고려하면 스페라의 품에서 칼을 두 번은 휘두를 수 있었다.

허나 스페라의 대검은, 요하나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방향이 꺾여 떨어져 내렸다.

"?!"

콰앙!

요하나가 간발의 차로 대검을 피했다.

대검에 얻어맞은 흙덩이가 사방으로 비산하는 찰나 스페라가 몸을 숙인 채 빠르게 가속했다.

순간적인 가속과 함께 대검이 휘둘러지자 당황한 요하나의 방어가 조금 늦었다.

쩌엉!!!

"큿...!!"

날아가듯 밀려난 요하나가 지면을 긁으며 정지했다.

레이는 떨어진 곳에서 둘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제국의 소드마스터께서 애지중지하실만하네."

체구가 작은 16살 소녀와 거대한 대검의 조합은 분명 기형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검을 제대로 들 수나 있을까 의아했으나, 스페라는 쉽사리 대검을 다루어 요하나를 압박했다.

'저 몸뚱이에서 저만한 괴력이 잘도 나오는군.'

근육 자체의 성능이 굉장히 뛰어나고 마나를 활용한 근력 강화 효율이 어마어마하게 높다는 뜻이었다.

물론 힘만 좋다고 스페라처럼 거대한 무기를 다룰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저런 대검을 휘두르며 자세를 제어하고 무게 중심을 잡으려면 균형감각을 포함한 전반적인 육체적 센스가 말도 안 되게 뛰어나야 했다.

카가각!!

본격적으로 충돌이 시작됐다.

요하나가 스페라와 마주 검을 휘두르며 허점을 파고들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스페라는 마나장벽을 덮어씌운 대검의 크로스가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빈틈을 막았다.

역습에 실패한 요하나가 연거푸 뒤로 밀려났다.

명백히 요하나가 열세였다.

'기본기에서 차이가 벌어지는군.'

스페라는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검술들을 원할 때마다 접하고 가르침 받았다.

어쭙잖은 천재가 스페라처럼 굴었다면 제자리서 헤매다 길을 잃어버렸겠지만, 스페라는 꽤 성공적으로 수많은 검술을 체화하고 다듬어가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가고 있었다.

뭘 먹고 자랐는지 체내에 품은 마나의 총량도 어마어마했고 말이다.

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스페라는 레이가 요하나에게 해주지 못한 것을 전부 가지고 있었다.

스페라를 키워냈을 제국의 이름 높은 검술 사범들과 신식 교육에 비해선, 요하나가 받았던 훈련은 낡아빠진 구닥다리에 가까웠을 것이다.

스페라가 마나를 축적하고 코어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많은 약재를 섭취할 동안 요하나는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스페라와 요하나 사이엔 환경적인 격차가 너무 컸다.

그렇기에 레이는 요하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도..."

비록 스페라가 받은 지원엔 미치지 못하지만.

레이는 나름대로 요하나가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본래 길바닥을 전전하다 얼어죽었을 지도 모를 아이의 손을 잡고 여기까지 끌고 왔다.

"넌 할 수 있어."

스페라에 비하면 모자랐으나 요하나 역시 제국 최고 수준의 검술을 이미 경험했다.

짐승의 내장에 대가리를 박아 넣는 역겹고 힘겨운 훈련들도 요하나는 꿋꿋하게 버텼다.

무엇보다, 요하나는 스페라에 비해 나이가 두 살 더 많았다.

이건 서로가 살아온 환경의 격차만큼이나 엄청난 이점이었다.

"그러니 그만 네 실력 좀 보여줘 봐, 요하나."

특출난 강점은 다르다고 해도 종합적인 재능 수준이 비슷하다면 요하나는 분명 승리할 수 있었다.

레이가 자기 마음을 담아 크게 외쳤다.

"요하나, 여기서 지면 강등당한다!"

"..."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밀려나던 요하나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카카각!

충격을 제대로 흘리지 못해 다시 지면을 구른 요하나가 이를 갈았다.

"아이씨..."

요하나는 두 살 어린 상대에게 힘 대결에서 밀리는 게 쪽팔렸다.

그래서 아득바득 정면에서 스페라를 힘 싸움에서 이겨보자 했지만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시도였다.

"후으..."

이미 디오리카가 펼친 결계의 경계 가까이까지 밀려난 요하나가 호흡을 골랐다.

힘에서 우위를 점하는 상대를 공략하기 위한 연습이야 예전부터 주구장창 해왔다.

그걸 두 살이나 어린 아이에게 써먹어야 한다는 게 짜증났지만, 고집부리다가 패할 수는 없었다.

요하나의 기세가 다시 한 번 변했다.

톡톡

땅을 가볍게 두 번 박찬 요하나가 스페라를 살짝 빗겨가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촤악!

대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요하나는 대검에 검을 맞대더니 대검을 지지대처럼 삼고 몸을 날려서 삽시간에 스페라의 뒤를 점했다.

스페라가 곧장 뒷발을 옆으로 밀며 허리를 꺾어 후방으로 검을 휘둘렀다.

허나 요하나는 한 발 빠르게 스페라의 사각으로 몸을 굴렸다.

스페라는 허리 아래에서 섬뜩한 예기가 솟구치자 크로스가드를 몸 가까이에 붙였다.

까각!!

크로스가드가 요하나의 찌르기를 비틀어 흘린다.

요하나는 공격이 막히자마자 다시 땅을 박찼다.

가볍고 자유롭게, 요하나는 쉼 없이 발을 놀리며 사방을 점하고 헛점을 파헤쳐서 일격을 찔러넣었다.

스페라는 약해졌던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대검을 연거푸 휘둘렀다.

카가가가가각!!

여전히 스페라의 방어는 단단했고 검격의 파괴력은 강력했다.

허나 정면에서 힘 싸움을 할 때보다 전투의 양상은 훨씬 복잡해졌고, 스페라는 요하나의 움직임에 맞춰 끊임없이 디딤발의 방향을 바꾸며 온몸을 뒤틀어야 했다.

무거운 대검을 다루는 스페라에게 그런 역동적인 움직임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결국 스페라에게 확실한 빈틈이 잠깐 드러났다.

사방을 정신 사납게 거닐던 요하나의 기세가 삽시간에 정돈됐다.

쐐액!!

요하나의 검이 스페라의 대검을 빗겨 흐르며 내질러졌다.

스페라는 흡사 뱀처럼 파고드는 요하나의 일격을 분명 인지했지만 개의치 않고 요하나에게 대검을 찔러넣었다.

스페라는 이번 공방에서 서로가 상대의 살점을 뜯어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촤악!

검이 휘둘러지고, 쇄골 아래가 베인 스페라가 한 발 물러서며 요하나를 응시했다.

요하나는 무사했다.

요하나는 스페라의 역공을 머리카락 하나 굵기 차이로 회피하는데 성공했다.

일방적인 손해를 보았음을 깨달은 스페라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변했다.

"재밌네."

스페라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밝은 미소였다.

*

엑스퍼트 급 기사 간의 대련이야 황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허나 대련을 이어가는 양쪽의 나이가 열여섯 열여덟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된다면 누구나 기겁을 할 것이다.

디오리카는 안중에도 없었던 소녀가 스페라와 대등하게 검을 나누기 시작하자 얼이 빠졌다.

저게 가능한 건 기껏해야 에른스트의 인정을 받은 레이 정도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겨갔다.

디오리카가 멀리 서 있는 레이를 바라봤지만 레이는 그저 두 소녀에게 집중할 뿐이었다.

촤악!

결국 제대로 피가 튀었다.

4위 결정전을 지켜보던 젠킨슨이 몸을 움찔 떨었다.

이 결투에서 스페라나 요하나가 부상을 입는 건 큰 걱정이 안 들었지만, 요하나의 실력이 외부로 완전히 노출되는 건 매우 거슬리게 다가왔다.

"이거 괜찮겠냐?"

많은 의미가 함축된 젠킨슨의 물음에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요하나는 꿀릴 게 없으니까요."

운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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