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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52화 (152/446)

152화

황좌에 앉은 황제가 모하메드를 내려봤다.

이미 모하메드의 신분 조사는 끝나 있었다.

황실의 조사관은 모하메드의 신분을 의심할만한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

황도로 향하는 길에 신분을 바꿔치기한 것도 아니다.

모하메드가 황궁에 발을 들인 직후 고성능 탐색 마법이 그의 몸을 훑었지만 그 어떤 물리적 마법적 위장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또한 모하메드는 정신이 혼란한 와중에도 필립스 백작가가 가신들과 공유하고 있다고 보고된 검법을 사용했다.

만약 모하메드가 신분을 속이기 위해 얄팍하게 필립스 백작가의 검법을 익혔다면, 방금 전의 전투에서 몸에 익어있던 다른 검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모하메드는 필립스 백작가의 가신 기사가 맞았다.

"..."

침묵이 이어지자 모하메드는 피가 바짝 마르는 듯했다.

이제 모하메드도 황궁에 들어선 후 벌어졌던 일련의 과정이 시험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시험에서 모하메드는 타의에 의해 모든 역량을 쏟아냈다.

로얄가드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역량을 말이다.

뚝뚝

크게 갈라져 핏물이 떨어지는 어깨를 움켜쥔 로얄가드가 뒤로 물러났다.

황제는 패배한 로얄가드가 실력이 결코 부족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로얄가드가 약간 방심은 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모하메드는 놀랄 만큼 강했다.

모하메드는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닿은 지 한참의 시간이 흐른 기사였으며, 제한된 지원으로도 로얄가드에 비견되는 실력을 쌓은 인재였다.

저 재능을 가지고 진즉 권세 있는 귀족가에 줄을 댔으면 지금쯤 꽤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

황제는 일종의 경이를 느꼈다.

황실의 조사관도, 근 200년 안쪽의 기록들도 필립스 백작령을 궁핍한 깡촌이라 표현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려한 명예와 재화를 포기하고 그런 곳에 스스로를 가두었단 말인가.

황제가 입을 열었다.

"필립스 백작령을 지키는 게... 경에게 있어 가치 있는 일인가?"

모하메드는 황제의 저의를 꿰뚫어 볼 수 없었지만 울컥한 감정을 앞세워 답했다.

"필립스 백작령 또한 엄연히 제국의 국경을 지키고 있습니다. 루비하 왕국의 레인저들이 호시탐탐 필립스 백작령을 넘어 제국을 유린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인가?"

"폐하, 필립스 백작령은 제 고향이자 제가 사랑하는 땅입니다. 설령 가치 없다 한들 그곳을 지키고자 하는 제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여전히 그 마음은 변치 않았는가?"

필립스 백작령을 떠나, 고도로 발전되어 만개한 제국의 도시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음에도 여전히 그 마음은 변치 않았는가.

모하메드가 망설이지 않고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쿵 소리와 함께 핏물이 번져 나왔다.

그게 모하메드의 답변이었다.

노쇠한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황제는 미래를 그리기보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많아졌고, 또한 예전보다 감성적으로 변했다.

황제의 삶을 살아가며 저리 욕망에 초탈하며 신의를 우선하는 기사를 몇 명이나 보았던가.

"지은 죄가 작지 않다."

"..."

모하메드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권세 있는 가문의 기사가 경지의 상승을 늦게 보고했다고 해도 중벌을 받진 않았다.

허나 모하메드처럼 배경 없는 기사는 황제가 반역죄를 들먹이며 죗값을 치르라 명해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모하메드의 예상보다, 황제는 관대했다.

"지은 죄가 작지 않으나, 경이 보여준 신의를 높이 사 이번만은 죄를 묻지 않겠다."

황제는 모하메드에게 죄를 사해주고, 죄를 사해준 대가 또한 요구하지 않았다.

황제는 모하메드에게 물러가라 명했고, 모하메드는 얼떨결에 로얄가드에게 끌려가다시피 물러났다.

"..."

황제는 가라앉은 얼굴로 모하메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짐을 위해 목숨을 바칠 기사들은 넘쳐나나, 황제라는 껍데기를 벗은 내게 지금과 같은 충성을 보일 기사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던 황제는 자신이 늙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제국을 이끌던 날카롭던 이성은 빛을 잃고 인의 따위를 곱씹으며 과거를 추억하는 병든 늙은이만 이 자리에 남아있었다.

황제가 10년만 젊었더라도 모하메드를 저리 보내주진 않았을 것이다.

'끝이 보이는군.'

이제는 그만 제국을 위한 선택을 단행해야 했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이 때가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폐하."

로얄가드 한 명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프리슬란 후작이 황제 폐하께 독대를 요청했습니다."

몇 년째 계속되는 독대 요청을 받은 황제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

모하메드는 답답한 감정을 숨긴 채 황궁을 나왔다.

황제는 모하메드의 죄를 사하겠다고 했으나, 모하메드는 황제의 진실된 저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황제의 마음이 변해 곧장 끌려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하메드가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마차로 향했다.

헌데 황실을 받드는 시종들이 마차에 상자를 하나 싣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셨소."

금 한 상자였다.

모하메드는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다.

어쨌든 모하메드의 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정된 숙소에 머물며 황도의 역사 깊은 장소를 순회하며 의식을 치르는 절차가 남아있었다.

이제는 사문화되다시피 한 전통이었지만, 뒷배경 없는 모하메드는 그걸 전부 이행해야 했다.

앞으로 열흘은 걸릴 일이었다.

"...잠깐 멈춰주게나."

마차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던 모하메드가 마차를 세웠다.

모하메드가 마차에서 내리자 젠킨슨이 레이를 데리고 다가왔다.

"모하메드 경, 황제 폐하는 무사히 알현했습니까?"

"별문제 없었네."

옆구리에 구멍 뚫린 걸 제외하면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 참 자비로우시더군."

"성군으로 이름 높지 않으셨습니까."

"이야기꾼의 찬미가 폐하의 위대함을 제대로 담지 못했더군."

듣는 귀가 있는 만큼 적당히 황제를 칭송한 모하메드가 레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하메드나 레이나 그리 안색이 좋지는 못했다.

"아가씨는 잘 모셨나?"

"예, 지금 알슈테인 공작가의 저택에 계십니다."

"다행이군."

알슈테인 공작가의 저택이라면 안심할 수 있었다.

거기 문을 박차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숫자가 결코 많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모하메드가 아가씨를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고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

디오리카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며 직접 정문으로 나가 손님을 맞았다.

에른스트 프리슬란의 증손녀, 스페라 프리슬란이 정중히 예를 갖췄다.

"이리 연락도 없이 찾아와 죄송합니다."

"괘념치 마시오. 스페라 양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하겠소."

디오리카의 환대에 스페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 증조부님의... 말씀 때문에 갑자기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 찐조... 아니, 레이 때문에 찾아오셨나 보오. 레이는 잠시 자리를 비웠소. 금방 돌아온다고 했는데, 안에서 기다리겠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스페라를 저택으로 안내하며 디오리카가 물었다.

"필립스 백작 영애가 지금 접견실에 있는데, 만나보겠소?"

"...네, 그리하겠습니다."

스페라는 필립스 백작가란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나 고민하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라는 접견실에 들어서고 나서야 '레이'가 몸담고 있던 한미한 변방 귀족가의 이름이 필립스였음을 떠올렸다.

알레시아는 디오리카에게 스페라를 소개받자마자 머리털을 바짝 세우고 으르르르 거리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스페라는 가문에서 잘 관리 받은 탓인지 알레시아의 예상보다도 미색이 뛰어난 소녀였다.

이제 나이가 열여섯이라고 하는데, 중앙 귀족다운 품위가 자연스럽게 묻어나왔다.

알레시아는 반드시 물리쳐야 할 숙적의 출현에 긴장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으르르 거렸다.

나름의 견제 행위를 이어가는 알레시아를 보고 스페라는 생각했다.

'비 맞은 개새끼 같군.'

정확히는 하나 남은 개뼈다귀를 지키려고 애쓰는 비 맞은 개새끼 같았다.

알레시아는 스페라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외쳤다.

"레, 레이는 나와 먼저 혼약을 약속했도다! 어, 어찌 남의 남자를 탐하려 하느냐!"

"저도 증조부님의 결정에 떠밀려 이곳에 들른 겁니다. 따질 것이 있으시거든 제 증조부님을 찾아가 말씀하시지요."

"그, 그건...! 어, 어쨌든 나는 이 혼약을 인정하지 못하느니라!"

알레시아는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피력했으나 스페라는 귀를 닫은 채 찻잔을 들었다.

말 상대를 해주는 것도 어느 정도 급이 맞을 때 일이었다.

스페라는 '어디서 짐승이 짖는구나' 정도의 감흥을 가진 채 차의 향을 음미하는 데 열중했다.

스페라는 그야말로 알레시아를 개무시했지만, 스페라의 호위 기사인 셰이는 알레시아가 주제도 모르고 왈왈대는 게 굉장히 거슬렸다.

슬며시 인상을 구긴 셰이가 기세를 날카롭게 세워 알레시아에게 집중시켰다.

"으끅!"

순간 숨이 턱 막힌 알레시아가 딸꾹질을 했다.

알레시아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숙적을 앞에 두고 추한 꼴을 보일 수 없다는 일념으로 자리에서 버텼다.

허나 상대는 제국의 소드마스터 에른스트가 직접 선별해 증손녀의 호위를 맡긴 강자였다.

셰이는 알레시아가 더는 까불지 못하게 작정하고 찍어눌렀고, 알레시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구역질을 하려 했다.

그 순간.

셰이가 전장에서 갈고 닦은 날카로운 직감이 급히 경고를 보냈다.

"?!"

촤악!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낸 셰이가 알레시아의 옆을 돌아봤다.

그 어떤 무장도 갖추지 않은 작은 소녀가 가라앉은 은색 눈동자로 셰이를 마주 보고 있었다.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언뜻 봐서는 가녀리고 나약해 보였다.

허나 셰이의 직감이 보내는 위협의 농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가파르게 치솟고 있었다.

방심하면 죽는다.

아니, 선공을 가하지 않으면 분명 죽는다.

생존을 위해선 먼저 검이라도 휘둘러야 했다.

셰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

"..."

"셰이!!"

"...?!"

셰이가 놀란 얼굴로 옆을 돌아봤다.

그제야 셰이의 눈에 스페라의 찌푸려진 표정이 보였다.

스페라가 짐짓 화난 목소리로 셰이를 질책했다.

"무례가 지나쳐."

알레시아를 위협하는 건 상관없었다.

알레시아가 위협을 당해 오줌을 질질 흘렸다 한들 손가락질받는 건 알레시아가 될 터였다.

허나 알슈테인 공작가의 저택에서 함부로 검을 뽑은 건 문제가 있었다.

셰이가 뒤늦게 납검하며 다시 알레시아의 옆에 서 있던 루나를 돌아보았다.

섬찟하게 목을 죄었던 존재감이 귀신처럼 사라져 있었다.

'착각? 착각이었다고?'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지만... 아직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가할 수 있는 압박이라기엔 믿기지가 않았다.

셰이가 혼란에 빠져 스스로의 감각을 의심하고 있는 사이, 문밖에서 다른 이의 말소리가 들렸다.

"스페라 프리슬란? 아이고..."

레이의 목소리였다.

모하메드를 만난 후 저택에 돌아온 레이가 스페라의 소식을 듣고 접견실로 찾아와 문을 두들겼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디오리카가 입장을 허락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레이가 의자에 앉아 있던 스페라와 눈이 마주쳤다.

스페라가 방긋 웃으며 찻잔을 내려놨다.

"안녕하세요."

"...아가씨께서 에른스트 님이 말씀하셨던 '증손녀'되시나 보군요."

"맞아요. 스페라 프리슬란입니다."

스페라가 레이의 얼굴을 훑었다.

겉으로 생긴 건 그럭저럭 봐줄 만했기에 나중에 살이 부대낄 일이 생겨도 크게 괴로울 걱정은 없어 보였다.

스페라가 레이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잠깐 얘기 좀 나누시죠. 단둘이서."

언뜻 듣기엔 정중했다.

허나 의자에 앉아 명령조로 말하는 스페라의 모습은 충분히 고압적이었다.

레이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방의 분위기를 살피고는 생각했다.

초장에 기강 좀 잡아야겠다고.

"스페라 프리슬란."

"?"

"난 나보다 약한 자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스페라의 사선에 앉아 있던 디오리카가 마시던 차를 푸흡 뿜었다.

디오리카가 사레에 들려 끅끅 거리는 사이 스페라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증조부님께서 범상치 않은 자를 제 짝으로 고르셨군요."

미친 새끼란 욕을 고상하게 돌려서 말한 스페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잘 됐네요. 저도 그쪽 실력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대화는 검부터 나눈 후에 해도 괜찮겠죠. 디오리카 님, 부탁드려도 될까요?"

"크흡... 알겠네. 안뜰로 가지. 결계를 펼쳐 주겠네."

디오리카의 협력을 약속받은 스페라가 먼저 안뜰로 향했다.

레이도 백작령에서 끌고 왔던 애들을 우르르 데리고 안뜰로 향했다.

"자, 흔치 않은 기회니까 너희들도 잘 봐둬."

스페라를 잡것들의 교보재처럼 취급하려는 레이의 태도에 셰이의 짜증은 다시 한 번 하늘을 찔렀다.

허나 스페라는 덤덤했다.

시골 촌뜨기들의 시선 따위를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는가.

스페라의 정신은 오로지 레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헌데 레이는 검 대신 요하나의 팔목을 잡아서 끌고 오더니,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요하나를 스페라와 마주 보게 세웠다.

"?"

요하나가 상황을 이해 못 하고 레이를 돌아보자 레이가 요하나의 어깨를 가볍게 쳐주었다.

"자, 요하나. 이제부터 집중해. 4위 결정전이다."

운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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