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모하메드가 검을 뽑았다.
굉장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모하메드는 차분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사방에 새겨진 마법진이 발동되는 순간 모하메드의 시야가 아득해졌다.
"컥...!"
인간의 정신을 뒤흔드는 마법이 모하메드에게 쏟아졌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미 눈과 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모하메드는 기사였다.
사지가 찢길지언정, 숨이 붙어있다면 입으로라도 검을 물어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기사였다.
오른 발로 바닥을 내려찍은 모하메드가 앞을 바라봤다.
마법진의 위력이 워낙 강력한 탓에 마나로 장막을 만들어 신체를 방어해도 머리가 흔들렸다.
허나 굳게 다져진 의지를 날카롭게 세운 모하메드는 최소한의 이성을 되찾았다.
저벅 저벅
검강을 발현한 로얄가드가 살기를 뿜어내며 다가온다.
가만히 서 있다간 죽음을 피치 못하리라.
모하메드는 죽는다면 필립스 백작의 곁에서 죽어야 했다. 적어도 이런 곳에서 의미 없이 쓰러져선 안 됐다.
그렇기에 모하메드는 검을 들었다.
"크아아아!!"
괴성을 지른 모하메드가 로얄가드를 향해 돌진했다.
제국의 황궁 안에서, 검강을 발현한 두 기사가 충돌한다.
콰드드드득!!
로얄가드의 검격이 섬뜩하게 목덜미를 노려왔다.
모하메드가 연거푸 다섯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언뜻 밀려난 것처럼 보였지만, 필립스 백작가의 검술은 본디 안정적인 방어를 기반으로 한 역습 형태를 취한다.
줄기찬 공격을 방어한 끝에 로얄가드에게서 약간의 틈이 드러났다.
모하메드가 곧장 검을 고쳐잡고 횡으로 휘둘렀다.
촤악!!
로얄가드가 뒤로 크게 물러나며 모하메드의 횡베기를 피했다.
직후 로얄가드의 검으로부터 검기 다발이 터져 나왔다.
광범위하게 흩뿌려진 수십 개의 검기가 제각각 방향을 틀어 모하메드를 향해 쏟아졌다.
아랑검. 제국의 이름 높은 검술 중 하나.
모하메드는 검기가 빗줄기처럼 쏟아져 내렸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공간을 찢어내고 떨어지는 검기도 맞상대해봤는데 이따위 것에 대응 못 할 리가 없었다.
쿠웅!!
모하메드가 앞으로 가속했다.
사방을 점했던 검기가 모하메드를 추적해 앞길을 가로막았다.
모하메드가 호흡을 골랐다.
'부수지 말고 빗겨낸다.'
반발력을 최소화해야 빠르게 전진이 가능했다.
모하메드가 모방해야 할 건 지미의 검.
공간을 부유하는 수백 가지 흐름 중 하나에 몸을 맡겨 나아간다.
비록 '무아'를 체득하지 못해 완벽한 모방은 불가능했지만 흉내는 낼 수 있었다.
콰가가강!!
수십 개의 검기가 모하메드의 검을 빗겨가 벽에 충돌했다.
반발력을 거의 받지 않은 모하메드가 더욱 가속했다.
예상보다 빠르게 모하메드가 접근하자 로얄가드가 황급히 다시 검강을 발현했다.
콰앙!!
아랑검처럼 독특한 검기를 사용하는 기사를 상대할 때는 검기를 투사할 거리를 내주지 않는 게 우선이다.
모하메드는 성공적으로 거리를 좁혔지만, 로얄가드 또한 이런 지근거리에서의 전투는 익숙했다.
카가가가각!!
로얄가드의 검격이 잔상을 만들어냈다.
아랑검은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날카롭게 가속해 상대의 급소를 노린다.
허나 모하메드는 로얄가드의 뜻대로 전투가 흘러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끄드드드득!!
검격이 충돌하는 순간, 모하메드가 검강을 이룬 검기의 흐름에 역회전을 걸었다.
서로의 검을 둘러싼 마나의 기류가 거칠게 맞물리며 휘둘러지던 검이 턱턱 정지했다.
그 반동 탓에 어깨 근육이 파열될 지경이었지만 모하메드는 개의치 않고 로얄가드를 압박했다.
속도가 붙지 않은 아랑검은 제대로 된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이젠 모하메드가 사납게 로얄가드를 물어뜯으려 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마주한 로얄가드가 고요하게 분노했다.
카각!!!
일순 몸을 회전시켜 모하메드의 검을 위로 쳐낸 로얄가드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기술을 사용했다.
발톱 사이 스며든 이빨.
아랑검의 검기 방출을 억제하기 위해 가까이 접근한 적을 사냥하기 위한 비기.
언제 뽑혀 나왔는지 모를 단검이 로얄가드의 왼손에 쥐어져 모하메드의 급소를 향했다.
오른손에 쥐어진 장검 아래 숨어 은밀히 접근했기에 제때 반응할 수가 없었다.
가슴을 꿰뚫기까지 손가락 한 마디 거리만을 남겨둔 단검을 바라보며.
모하메드 또한 마지막 수를 준비했다.
츠즈즉!
관절 사이에 마나가 집약된다.
오버드라이브...는 아니다.
모하메드는 그 기술을 쓸 수 없었다.
마나를 터뜨려 신체를 가속시킨다고 한들, 그걸 어떻게 섬세하게 제어한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관절 사이에서 폭발시킨 에너지를 정밀하게 제어해서 정확한 동작으로 구현하는 건...
그래, 오로지 '극소수의 천재'만이 가능한 상식 밖의 기예였다.
때문에 모하메드의 마지막 수는 절대 오버드라이브가 아니었다.
이건 그냥, 오버드라이브의 원리를 조금 차용한 도박 수였다.
끄득!
관절 사이에 집약된 마나가 폭발한다.
폭발력이 운동에너지로 전환되며 신체가 가속된다.
모하메드는 자신이 그리는 검의 궤적이 어디로 향할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적의 머리를 가를 수도 있었고, 한참을 빗겨가 허공을 때릴 수도 있었다.
츠즉!
죽고 죽이기 위한 싸움에서.
서로의 마지막 수가 충돌했다.
콰가가각!!!!
굉음과 함께 두 기사가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바닥을 구르다 간신히 몸을 멈춰 세운 모하메드가 옆구리를 붙잡았다.
"크윽...!"
본래 가슴을 노리던 단검이 옆구리에 꽂혀 있었다.
단검을 뽑아낸 모하메드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복도 반대쪽의 자욱했던 분진이 걷히며 로얄가드의 모습 또한 드러났다.
깊게 갈라진 로얄가드의 왼쪽 어깨로부터 핏물이 줄줄 쏟아졌다.
"..."
당장 치료해야 할 중상이었으나 로얄가드는 개의치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하메드 또한 두통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와중에도 로얄가드에게 다시 검을 겨누었다.
그 순간.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만."
츠즈즈즈즈즈즉!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공간이 일변했다.
그저 황금색으로 빛났던 복도가 멀어지고 제국의 휘장이 벽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중무장을 한 수십의 기사가 위세를 드러내며 도열했다.
그리고, 제국 권력의 영원한 상징일 황좌가 모하메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하메드는 황좌에 앉은 황제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무엇을 하러 왔는지 정확히 상기할 수 있었다.
모하메드가 검을 검집에 꽂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후 황제를 향해 다섯 걸음 나아간 모하메드가 제국의 절대권력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미천한 기사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레이가 디오리카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허리를 조금 숙였다.
헌데 세리아가 레이의 어깨를 붙잡더니 다시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레이의 엉덩이가 세리아의 허벅지를 타고 무릎 쪽으로 쭉 미끄러졌다.
어설프게 누운 자세가 된 레이가 떫은 표정으로 위를 올려봤다.
조카를 내려다보는 세리아의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고모, 저도 이제 18살 입니다마아아아안..."
세리아가 레이의 뺨을 양손으로 비볐다.
레이의 뺨이 맨들맨들해질 때까지 비빈 세리아가 레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지웠어? 흉터?"
"느에. 즈번에 기회가 생겨서 지워써여."
"우리 조카, 더 귀여워졌어."
"..."
레이는 세리아와 만나는 횟수를 늘리면 세리아의 애정 표현의 강도가 좀 약해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레이가 몸의 자율권을 빼앗긴 채 축 처져 있자 보다 못한 디오리카가 헛기침을 했다.
"큼. 찐조카, 자네도 모르진 않겠지만 황실에 관한 사안은 아주 민감한 이야기네."
"예, 반드시 입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믿어 보겠네. 근데 자네는 황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저 같은 촌놈이 황가에 대해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습니까."
세리아의 품에서 꾸물거리던 레이가 무지를 가장하고 핵심을 찔렀다.
"황족의 심장에 드래곤하트를 심는다는 뜬소문이나 들어봤지요."
디오리카의 왼손이 움찔 떨렸다.
찰나의 순간이었고, 곧장 평정을 되찾았으나 디오리카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반응이면 어지간한 기사는 무조건 눈치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디오리카가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방심했군. 자네가 들은 게 마냥 뜬 소문은 아니야."
"그건... 정말 놀랍네요."
레이가 경악한 표정을 지은 채 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디오리카가 자세를 바로 잡고 말을 이었다.
"제국 고위층엔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지만, 입조심하게. 고모님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심해주십시오.."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밑에 있던 레이의 정수리가 세리아의 턱에 콕콕 찔렸다.
확답을 받은 디오리카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황족의 심장에 드래곤하트를 심는 이유는 용혈을 제어하기 위해서네."
"지금 용혈이라고 하셨습니까?!"
레이가 대충 놀라는 시늉을 했고, 디오리카는 레이의 반응을 은근히 즐기며 이야기를 풀었다.
시조룡과 황실의 역사에 관한 설명이 짧게 이어진 후 레이가 몰랐던 정보가 본격적으로 흘러나왔다.
"황가의 혈족은 수명이 길지 않네. 드래곤하트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인간의 몸에 용혈을 담아내는 게 쉽지 않은 탓이지."
대부분의 황족은 나이가 60을 넘어가면 육체적 한계를 맞이한다고 한다.
기대수명이 기껏해야 65 언저리라는 건데, 제국의 집중적인 관리를 받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짧다고 봐야 했다.
그 수명을 넘어서기 위해선 로드 급이라도 되어야 했지만, 그 초월적인 경지에 오른다는 게 선천적으로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황족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제국의 시조룡께서 남긴 드래곤 하트 또한 수십의 황족이 나눠쓰기엔 넉넉하지 않지."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 황족의 숫자는 15명 내외로 유지됐다.
황위에 오르지 못한 황족은 함부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황제조차 후계자를 우후죽순 만들어 기를 수 없었다.
만약 황위에 오르지 못한 자가 멋대로 아이를 가진 경우,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아이가 3살이 되기 전에 자결해야 했다.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군요."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황가의 어두운 면이지."
디오리카가 씁쓸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먼 옛날 그의 첫사랑이 이제는 영면에 든 황녀였기에 황가와 관계된 일에는 감성이 조금 예민해 지곤 했다.
"근래 여러 사건이 겹치며 황제 폐하를 제외한 황족의 숫자가 일곱까지 줄었네. 사실 황족의 숫자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네만..."
"정통성 말입니까."
"그래."
수명도 길지 않고 숫자도 적은 황족인 만큼 질서의 유지가 중요했고, 때문에 황위의 계승은 정통성을 매우 중시했다.
정통성이 떨어지는 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다면, 정통성이 앞서는 황족들을 모조리 숙청해야 했다.
"근데 현재 황제 폐하의 뒤를 이을 수 있는 황족들의 정통성이... 조금씩 하자가 있네. 아니면 연세가 너무 많으시거나."
"..."
레이는 골치가 아팠다.
한창 필립스 백작령을 뛰어다니고 있을 황족, 레아 또한 정통성만 보면 하자투성이였다.
기본적으로 사생아였고, 아비는 한때 황태자였으나 그 직위를 강탈당한 1황자이며 어미 되는 벨라 또한 신분이 천했다.
차라리 정통성이 확고부동한 황자가 황위를 이었다면 상황이 나았을 것이다.
제대로 된 정통성을 가진 황제에게 레아는 아무 위협이 안 되었으니, 레아의 정체가 드러나도 유폐시키는 선에서 끝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통성이 떨어지는 자가 황위에 오르면... 레아조차도 황위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레아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제국의 최정예 병력이 레아를 즉시 잡아 죽이려고 움직일 것이다.
한숨을 삼킨 레이는 백작령에 돌아가면 레아의 머리를 좀 더 쥐어박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레이가 끙끙 앓고 있는 사이 디오리카가 다 식은 찻잔을 기울였다.
"우리 가문은 포이보스 님을 지지하고 있네."
"황제 폐하의 서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리고 포이보스 님은 에른스트 님의 손녀 중 한 분과 혼약을 맺으셨지. 아직 자녀는 없으시지만, 들리는 소식으론 금슬이 괜찮다고 하더군."
여기서 또 혈연으로 묶이는군.
속으로 중얼거린 레이가 답답한 감정을 담아 물었다.
"1황자의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2황자께서는 대체 어쩌다 돌아가신 겁니까?"
"조금의 불운이 겹쳤지."
"디오리카 님, 차라리 말해줄 수 없다고 솔직히 말씀해주시지요."
2황자라는 게 불운이 조금 겹쳤다고 비명횡사할 신분이 아니었다.
레이를 잠시 바라본 디오리카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에른스트 님이 개입하셨네."
"...!"
레이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찻잔이나 기울이며 나눌 내용이 도저히 아니었다.
에른스트가 2황자를 쳤다는 건 제국이 완전히 분열되어 있다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이야기였다.
"황제 폐하와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척을 진 겁니까?"
"그건 아닐세."
디오리카가 즉답했다.
"에른스트 님은 여전히 제국을 사랑하고 황제 폐하께 충성하네. 황제 폐하께서도 에른스트 님을 여전히 아끼고 계시네. 후계 또한 곧 결정 내려 주시겠지. 내 생각엔 그래."
"...그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레이가 대놓고 불신의 감정을 드러내자 디오리카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야기가 좀 복잡하네. 아니, 복잡하진 않고... 자질구레한 측면이 있지."
너무 사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 같아 잠깐 고민한 디오리카가 말을 덧붙였다.
"자네의 시선에서 황제 폐하나 에른스트 님, 혹은 내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권력의 중추에 서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항상 얼음처럼 냉정하지는 못하네. 결국은 감정에 휘둘리는 평범한 인간이지. 그게 내 생각일세."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디오리카는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감사 인사를 전한 레이는 잠시 방에 홀로 남아 생각했다.
제국의 고위층 중에 레아를 환영해줄 존재가 거의 없었다.
'기대를 걸어볼 만한 유일한 상대가 1황자의 처형을 직접 명령한 황제라는 게 우습군.'
설령 황제가 노망이라도 나서 기적적으로 레아의 존재를 받아들여 준다고 해도, 60이 넘은 황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황위가 다른 이에게 계승되면 아무 기반도 없는 레아는 바로 숙청될 거다.
'레아야, 너는 진짜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가야겠다.'
그게 안 되면 너는 내 손에 죽거나...
네 존재가 나를 죽일 것이다.
*
사용인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벗던 스페라 프리슬란이 헛웃음을 흘렸다.
"혼약?"
스페라의 눈길이 자신의 호위기사인 셰이에게 향했다.
스페라는 차마 증조부가 노망이 났냐고 되묻지는 못했지만, 황당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헛소문은 아니고?"
"이름 있는 기사들의 증언이 많습니다."
"..."
사람이 지닌 자질에 따라 한없이 냉혹해지거나 관대해지던 에른스트를 떠올린 스페라가 지긋이 입술을 씹었다.
에른스트가 가문도 없는 촌뜨기에게 혼약 얘기를 꺼냈다는 건 그만큼 상대에게서 커다란 가능성을 봤다는 뜻이다.
허나 얼굴도 모르는 사내를 대뜸 혼약자로 들일 수는 없는 법이다.
"외출 준비해."
어디 얼마나 잘난 작자이기에 증조부를 홀렸는지 얼굴은 봐야 할 것 같았다.
황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