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에른스트가 떠난 뒤.
흐물흐물해진 알레시아가 레이의 허리를 붙잡고 계속해서 징징거렸다.
"레이, 나를 버리면 아니되느니라아..."
레이는 한숨을 쉬며 포크로 고기 조각을 하나 찍어 입에 넣었다.
나름 좋은 숙소라고 비싼 재료를 쓰긴 했는데, 마음이 심란한 탓인지 정말 더럽게 맛이 없었다.
억지로 고기를 씹어 삼킨 레이가 옆을 바라봤다.
루나가 덤덤한 표정으로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포크를 내려놓은 레이가 루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잘했어."
루나가 조금이라도 나섰으면 일이 더 피곤해질 뻔했다.
다행히도 루나는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똑똑한 아이니까, 뭐.'
굳이 일일이 주의를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처신하겠거니 싶긴 했다.
레이가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이 알레시아는 계속해서 왱왱 울었다.
"이제 와서 떠나버리면 나는 어찌하란 말이냐아...!"
"..."
남자한테 매달려 징징거리는 꼴이 남 보기에 참 추했다.
허나 알레시아로서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연인이 능력을 갖출 때까지 열심히 뒷바라지했더니 버림받았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넘쳐났다.
더군다나 이번엔 제국의 소드마스터 에른스트 프리슬란이 직접 레이에게 증손녀와의 혼약을 제의했다.
레이가 만약 알레시아를 뻥 걷어차고 떠난다고 해도 모두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계속된 알레시아의 징징거림에 레이가 콧잔등을 매만지며 말했다.
"안 떠나. 안 떠날 테니까 식사나 마저 하시죠."
"이리 안심시켜 놓고 내가 자는 사이에 야반도주를 해버리면 나는 어찌하란 말이냐아...!"
"이봐요, 아가씨. 정신 좀 차리세요."
레이가 알레시아를 이래저래 달래보는 사이.
1층 식당에 있던 기사 중 다수가 빠르게 숙소 건물을 벗어났고, 남은 기사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레이의 일행을 관찰했다.
누구 하나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시간부로 레이는 제국의 소드마스터가 직접 인정한 유망주가 됐다.
여기 있는 기사들 중 에른스트를 우습게 보고 그의 선택을 비웃을 병신은 없었다.
레이가, 제국의 소드마스터인 에른스트가 직접 인정할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음은 확실했다.
레이의 시건방진 태도를 보자니 얼마 못 가서 목이 잘릴 것 같긴 했지만, 그건 그때 가서 떠들면 되는 일이었다.
집중된 이목 속에서.
레이는 간신히 알레시아를 달래 수프를 조금 먹인 후, 일행들과 같이 계단을 올라갔다.
*
방에 들어온 레이가 아프텔의 도움을 받아 결계를 쳤다.
방음 결계가 확실히 전개된 걸 확인한 레이가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비볐다.
레이와 함께 방에 들어온 젠킨슨은 힘이 빠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소드마스터가 먼저 찾아와 필립스 백작령 사람들을 찔러보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젠킨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마 에른스트 님께서 굉장히 호의적이라 다행이야."
내 사람이 된다면 과거에 존재하는 허물 따위는 다 지워주겠다.
경지를 숨겼던 일을 포함해, 과거 네가 어떤 죄를 저질렀든 덮고 넘어가겠다.
그러한 에른스트의 뜻을 젠킨슨 또한 알 수 있었다.
에른스트가 레이의 존재를 거북하고 괘씸히 여겼다면 그 자리에서 피바람이 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하냐."
"글쎄요..."
결심을 내리기 위해선 제국의 정세를 좀 더 확실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에른스트에 신뢰를 얻는 게 가능하다면, 나중에 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활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밝혀야 할 비밀이 있었다.
'공간검...까지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어.'
공간검의 존재를 외부로 드러내면 심각한 위협에 직면할 터다.
허나 에른스트를 비롯한 제국 관계자들에게 공간검을 계승한 레이가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인체 실험을 그리했던 제국이니 공간검을 익힌 내가 얼마 못 살 거라는 건 알 수 있을 테고.'
황실에 충성을 맹세하고 제국을 향한 불순한 움직임만 보이지 않도록 조심한다면 의외로 일이 좋게 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아는 아니었다.
의도가 어떻든 황족을 숨겨 키운 건 반역죄에 해당했다.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선 당장 레아의 목을 베어 땅에 묻어야 했다.
물론 레이는 절대 그리 할 수 없었다.
"아, 시발."
필립스 백작령에 돌아가면 레아 머리부터 쥐어박아야겠다.
레이가 자기 콧잔등을 꾹꾹 누르고 있자니 젠킨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갔지만 에른스트 님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곤란해질 거다. 의심만 더 커지겠지."
"뭐, 그럼 우리 아가씨는 헌신짝처럼 버리고 소드마스터의 증손녀랑 혼약이라도 하라고요?"
"중혼하면 되잖냐."
"그래도 되겠어요? 필립스 백작 가문 따위가 건방지게 군다고 짓밟으려 하면 어쩌게요?"
"에른스트 님이 그리 무식한 분은 아닐 거다."
소드마스터라 해도 평생 검만 휘두른 인물이 아니다.
수십 년 넘게 중앙 귀족들을 상대했으니 정세를 보는 감각 또한 뛰어날 게 틀림 없었다.
"어차피 감정 없는 정략혼 아니냐. 프리슬란 가문에서도 네 약점을 손에 쥐길 원할 거다. 그 약점 역할을 우리 아가씨께서 하실 수 있겠지."
물론 돈 줄 테니 변방 귀족가의 촌뜨기들은 꺼지라고 할 수도 있었다.
만약 일이 그리 되면 필립스 백작가는 부유한 도시의 조세권 일부를 대가로 넘겨 받을 확률이 높았다.
그만해도 필립스 백작은 과거보다 다섯 배 이상의 세금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확답은 못하겠지만 말이다."
"후우... 제국 정세를 좀 더 확실히 알아보고 의논을 다시 해야할 것 같네요. 시간은 아직 있잖아요."
"그래, 그러도록 하자. 너무 거물의 눈에 띄어 버려 나도 머리가 아프구나."
두통을 느낀 젠킨슨이 미간을 붙잡았다.
한편, 레이와 젠킨슨의 옆 방에선 알레시아가 여전히 질질 짜고 있었다.
"이대로는 나의 기사를 빼앗겨버리느니라아..."
"걱정하지 말아요, 알레시아 님. 레이는 절대 알레시아 님을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으으으... 레이를 여기 데려오면 안 되었다...!"
"그만 울고 레이 좀 믿어봐요."
카렌이 옆에 붙어서 열심히 알레시아를 달랬다.
*
다음날, 모하메드의 일행은 숙소를 나와 다시 황도로 향했다.
소문이 퍼졌는지 주변의 시선이 마차를 향해 계속 쏠렸다.
물론 도시민 중 어젯밤 벌어졌던 사건을 설명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적었다.
한편 마차에 탄 알레시아는 새벽 내내 악몽을 꾼 탓에 두 눈이 탱탱 부어 있었다.
꿈에서만 열다섯 번가량 레이에게 버림 받았기에 알레시아는 어제보다 더욱 흐물흐물해져 몸을 가누지 못했다.
알레시아가 축 처져 있든 말든 마차는 나아갔다.
마차가 황도와 가까워질수록 마나에 민감한 자부터 가볍게 몸을 떨었다.
대기 중 마나의 밀도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대륙의 가장 축복 받은 땅.
감히 세상의 중심이라고도 칭해지는 대지.
황도는 바로 그 위에 세워졌다.
손에 잡힐듯이 사방에 마나가 넘쳐났지만, 이마저도 대륙의 가장 축복 받은 땅이 내뿜는 마나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황도 아래 영맥에 흐르는 마나 대부분은 인위적으로 집약되어 황도에 세워진 구조물의 동력으로 소모됐다.
계속해서 나아가다 보니 황도를 감싸는 10미터가 넘어가는 방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래 황도에 출입하기 위한 정문이 따로 존재했지만, 모하메드는 겉으로나마 황제에게 직접 초대를 받은 신분이었다.
오직 제국에 충성하는 기사를 맞이하기 위해 세워진 문이 천천히 좌우로 열렸다.
거인이라도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문이 열리며 모하메드를 마중 나온 기사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로얄가드였다.
그는 지금 황제의 대리인 신분이었기에, 모하메드는 기사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로얄가드는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에 모하메드를 태우고 황궁으로 향했다.
물론 황궁으로 초대 받은 것은 모하메드 뿐으로, 이제 남은 사람들은 따로 숙소를 마련해야 했다.
마법사들이 다가와 레이와 일행들에게 신원 확인과 위치 추적이 가능한 마법 각인을 부여했다.
절차를 마친 후 레이는 드디어 황도에 제대로 된 첫발을 내디뎠다.
필립스 백작령과 같은 하늘을 공유하는 세상에 존재하는 장소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레이는 곳곳에 세워진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탑과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의 황궁을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황도에도 당연히 숙소가 존재하긴 했는데 그 비용 감당하기가 도저히 힘들었다.
그렇다고 땅에서 노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레이는 오늘을 위해 아껴두었던 인맥을 끌어썼다.
"우리도 갑시다."
권세를 지닌 귀족 가문은 황도에도 크고 작은 저택을 마련해 별채처럼 사용한다.
이는 알슈테인 공작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중을 나온 알슈테인 공작가의 시종을 따라, 레이는 입을 쩍 벌린 아이들과 사용인들을 데리고 길을 걸었다.
꽤 오랜 이동 끝에 마침내 레이의 일행은 황도에 있는 알슈테인 공작가의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택의 문이 벌컥 열리고, 세리아가 달려나와 두 손을 뻗었다.
"조카!!"
"아, 고모. 잘 지내셔었?!"
세리아에게 붙들린 레이가 공중에 휙 떠올랐다.
레이도 이제 나이가 좀 들었다. 신장도 세리아와 거의 비슷했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레이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은 채 레이를 높이 들어 빙글빙글 돌았다.
레이는 제대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둘만 있으면 모를까 남들 다 보는 곳에서 애 취급을 당하니 마음이 급격히 심란해졌다.
"고, 고모! 저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이런 건 그만해주시며언!"
공중에 뜬 레이를 확 끌어안은 세리아가 레이의 얼굴에 연거푸 입을 맞추었다.
쪽쪽쪽쪽쪽쪽
레이는 자포자기한 채 세리아의 애정공세를 받았다.
한편 알레시아와 카렌은 가만히 세리아의 애정공세를 지켜보다 점점 더 기분이 이상해지는 걸 느꼈다.
레이도 이제 성인에 가까웠다.
헌데도 세리아가 다 큰 사내의 볼, 이마, 코, 입술에 가리지 않고 입을 맞춰대니 보는 입장에서 좀 껄끄럽고 남사스러웠다.
"이, 이제 그만 하거라...!"
알레시아가 파닥이며 세리아를 말렸다.
그럼에도 세리아는 레이를 공중에 띄웠다 잡았다 하며 만족할 때까지 입을 맞추고는 지면에 내려놨다.
제자리서 휘청인 레이가 간신히 숨을 돌리고는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자, 짐 가지고 움직여."
레이가 젠킨슨과 함께 아이들과 사용인들을 통제하는 사이 누군가가 곁으로 다가왔다.
묘하게 낯이 익은 상대였기에 레이가 어디서 보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상대쪽에서 먼저 인사를 해왔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나? 찐조카?"
"아, 짭조카 분이셨군요."
레이가 반갑게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 보니 황실 마탑에서 잠깐 얼굴을 보았던 디오리카였다.
디오리카는 웃는 얼굴로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고모님의 핏줄이 정말 대단하군. 자네가 설마 에른스트 님에게 인정을 받을 줄은 몰랐네."
"그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퍼졌습니까?"
"에른스트 님은 설령 장손이라 해도 능력이 없으면 손주 취급을 안 하시던 분이네. 그런 분이 자네에게 증손녀와의 혼약을 먼저 제의했어. 난 아직도 내가 들었던 이야기가 믿기지가 않네."
디오리카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레이는 간단히 인사를 마무리 짓고 짐을 정리한 후 디오리카와 따로 자리를 가졌다.
세리아도 그 자리에 함께했는데, 세리아는 자기가 먼저 의자에 앉고는 레이를 그 위에 앉혔다.
"..."
레이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눈앞을 가렸다.
이제는 레이도 덩치가 많이 커져 세리아의 품에 폭 안기긴커녕 세리아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지만, 그럼에도 세리아는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디오리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모님의 찐조카 사랑이 각별하시군."
차를 타서 건넨 디오리카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그 에른스트 님의 마음을 단번에 확 사로잡은 건가?"
"에른스트 님의 성격이 상당히 냉혹하신가 봅니다."
"가치 없는 자에겐 핏줄이라 해도 냉혹하다 전해지지만, 항상 그런 분은 아니시지. 자네처럼 마음에 든 사람에겐 보기보다 부드러우실 거야. 어쨌든 다행이네. 우리끼리 얼굴 붉힐 일은 없겠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디오리카가 피식 웃더니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요즘 황실의 후계 구도가 혼란스러운 건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알슈테인 가문과 프리슬란 가문은 현재 동일한 후계자를 차대 황제로 지지하고 있네."
이 정도 설명이면 레이가 상황을 이해했으리라 여기고 디오리카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레이가 세리아의 무릎 위에 앉은 채로 허리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현재 혼란하다는 후계 구도 말입니다만,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
모하메드는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황궁에 입장했다.
듣도 보도 못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아티펙트와 복잡하고 정교한 마법 결계들이 사방에 즐비했다.
모하메드는 삿된 움직임을 보이지 않기 위해 주의하며, 로얄가드가 미리 일러준 대로 일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복도를 홀로 걸었다.
직접적인 위협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모하메드는 차오르는 긴장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꾸만 침을 삼켰다.
그는 높은 경지에 오른 충직하고 강건한 기사였으나 황제라는 유일무이한 권력과의 만남은 처음이었다.
모하메드가 거대한 문 앞에 도달하는 순간 문이 스스로 열리기 시작했다.
모하메드는 고개를 낮추며 황제에게 예를 갖출 준비를 했다.
허나, 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다시 길고 긴 복도였으며, 그 끝에 서 있는 건 로얄가드의 정복을 차려 입은 한 명의 기사였다.
츠즈즈즉!
로얄가드가 뽑아낸 검에 검강이 타오른다.
쿠웅!!
바닥을 박차며 돌진해 오는 로얄가드를 향해 모하메드가 크게 당황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검을 뽑아들고서야, 모하메드는 황궁에 입장할 때 로얄 가드가 당연히 이행해야 할 무장 해제를 명령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황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