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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49화 (149/446)

149화

레이는 슬쩍 포크로 옮겨가던 손을 내려놓았다.

노인을 옆에 둔 레이는 언뜻 차분해 보였지만, 숨도 함부로 들이쉬지 않고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레이는 옆에 서 있는 노인이 자신이 생각한 그 존재가 맞는가 고민했다.

레이는 부디 자신이 착각했기를 바랐으나 이미 본능은 답을 확정 지은 후였다.

"..."

정적이 내려앉은 채 대치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변의 긴장도 같이 치솟았다.

손아귀가 찢어지도록 검을 억세게 붙잡은 기사 하나가, 마침내 용기를 이끌어내 노인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 순간.

변화가 일었다.

스스스슥!

노인을 중심으로 피어난 푸른 마나의 기류가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세상 만물에 만개해 있던 무형의 마나들이 형태를 갖추고 고개를 든다.

땅, 풀, 나무, 벽돌, 그리고 사람의 육체 속에 잠들어 있던 마나가 노인의 의지에 감응해 스스로 빛을 내며 떠올랐다.

어둠이 물러간다.

만물을 뒤덮은 마나의 기류가 넘실거리며 밖의 풍경을 푸르게 물들였다.

"커억...!"

그래듀에이트 한 명이 피를 토했다.

본래 주인에게 순응해야 할 코어의 마나가 허리를 펴고 다른 누군가를 향해 손짓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자신의 마나가 가리키고 있는 자를 다시 바라봤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저 왜소한 체격의 노인을 수식하는 칭호는 수백 가지가 능히 넘을 것이다. 허나 전부 부질 없는 말이었다.

노인을 향한 모든 찬사는 한 마디로 축약되었다.

제국의 소드마스터.

현존하는 인류의 정점이자 인간의 몸으로 초월을 이룬 자.

에른스트 프리슬란.

쿵!

노인의 정체를 알아챈 기사들이 바닥에 검을 박아넣고 우르르 무릎을 꿇었다.

갑옷이 마찰하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 후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

레이가 속에서 올라오는 핏물을 간신히 삼켰다.

코어의 마나가 자꾸만 뒤틀린다. 레이는 그제야 자신이 어떤 공간에 들어와 있는지 명확히 깨달았다.

절대권역.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초월기.

절대권역의 영역 안에서 마스터는 마나에 대한 압도적인 지배권을 행사한다.

타인의 코어에 내재된 마나까지 흐트러뜨릴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지배권을.

"..."

레이는 이 상황에서 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생전 처음 마주하는 마스터란 존재는 상상 이상으로 강대하고 이치를 벗어나 있었다.

문득 고민이 됐다.

만약에라도 일이 최악으로 수틀려, 소드마스터와 맞붙기라도 한다면.

소드마스터를 꺾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극한 상황에 처한다면.

'목숨을... 지킬 수 있나?'

레이는 결코 약하지 않았다.

공간검, 모로스, 오버드라이브 등의 기술이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 평범한 그래듀에이트보다 훨씬 강력한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조합이 갖춰지지 않은 순수 기사 전력이라면 레이를 고꾸라뜨리는데 그래듀에이트 1개 분대는 필요했다.

허나, 그럼에도 레이는 눈앞의 노인을 절대 이겨낼 수 없으리라 직감했다.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수단을 동원하고 온갖 행운이 따른다고 해도, 그 결과는 필패일 게 분명했다.

차라리 상대가 9서클 대마법사였다면 지금처럼 근접한 거리에서 미약한 확률의 승리라도 기대해보겠건만, 소드마스터의 앞에선 모든 발악이 무의미했다.

'이게 진정한 로드 급...'

로드 급에 근접했다고 떠받들어지는 자들이야 몇 놈 존재했다. 그들은 분명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서는 강자였다.

허나 진정한 로드 급은 그 차원이 달랐다.

상대는 괴물이었고, 레이는 무력했다.

레이가 고뇌하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마지막 수단을 동원한다면.'

같이 죽을 수는 있나?

가능하다.

그걸 쓴다면, 소드마스터라도 죽일 수 있다.

허나 장담할 수는 없었다. 홀로 개죽음을 당할 가능성도 3할은 될 것이다.

레이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제국에도 둘 밖에 존재하지 않는 소드마스터라지만 격의 차이가 너무 컸다.

레이는 자신이 앞으로 무엇과 싸우고 무엇을 대비해야 할지 느끼고 가슴 속에 떠오르는 회의를 곱씹었다.

한편 에른스트의 입가에는 흥미가 짙어졌다.

에른스트는 초월적인 감각으로 상대가 자신을 재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드마스터를 앞에 두고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할 작자가 제국에 과연 몇이나 될까.

에른스트는 마나의 기류를 조정해 레이의 전신을 훑었다.

레이가 지닌 팔목의 팔찌는 아티펙트였으나 현재는 작동하지 않고 있었고, 레이의 안면 또한 물리적으로 변형되거나 꾸며진 흔적이 없었다.

결국 지금 보이는 얼굴이 진짜 얼굴이란 뜻이었다.

의심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에른스트가 허공을 부유하는 마나의 기류를 날카롭게 다듬어 레이를 압박했다.

츠즈즈즉!

레이의 전신에 생채기가 새겨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전신이 난자될 것이다.

레이는 입 다물고 버텨봤자 에른스트가 압박을 그만두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고 코어를 활성화시켰다.

드드드득!

레이의 마나가 사방에 전개되며 에른스트의 압박을 밀어냈다.

에른스트는 흘러나오는 레이의 마나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극도로 정제되었으며, 또한 강력한 반발력을 지닌 마나였다.

사이한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악마와의 계약과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경지를 끌어올렸다면 절대 이런 성질의 마나를 품을 수 없었다.

압박을 그만둔 에른스트가 레이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접근했다.

"넌, 불가해한 존재군."

"..."

레이는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다.

에른스트는 레이를 바라본 채 필립스 백작령의 기사인 모하메드와 젠킨슨의 반응을 살폈다.

두 기사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허나 에른스트의 돌발적인 행동을 이해 못 하고 의구심을 내비치진 않았다.

말인즉슨 두 기사도 레이의 성취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정말 흥미롭군."

에른스트가 사방을 장악했던 힘을 회수했다.

너울지던 푸른 마나의 기류가 제자리를 찾아 가라앉는다.

절대권역이 벗겨지며, 밀려났던 어둠이 다시 바깥 풍경 위로 내려앉았다.

여기저기 숨 고르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레이 또한 그제야 참았던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에른스트의 주름진 눈가가 옆으로 휘었다.

"이름이 뭐냐."

레이는 잠시 침묵했으나, 대답을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이름은 레이라고 합니다. 성은 없습니다. 필립스 백작가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 젠킨슨 경을 마스터로 모시고 있습니다."

답변을 들은 에른스트가 레이의 이목구비를 살폈다.

신체의 발달 정도나 이목구비의 상태를 감안했을 때 많아 봐야 약관의 나이였다.

에른스트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에른스트는 자신의 뜻을 아주 함축적으로 담아낸 제안을 레이에게 건넸다.

"내 증손녀와 혼약을 맺을 생각이 있느냐?"

무릎을 꿇고 있던 기사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계보에 따르면 에른스트의 증손녀에 해당하는 인물은 몇 명 있었지만, 에른스트가 본인의 입으로 '증손녀'라 칭하는 인물은 단 한 명이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기에, 바닥만 내려다보던 기사들은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떴다.

그 찰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알레시아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맙소사, 소드마스터의 증손녀와 혼약이라니.

필립스 백작가의 데릴사위보다 비교도 불가능할 만큼 좋은 혼처였다.

만약 레이가 냅다 저 제안을 받아버리면 알레시아는 길바닥에 헌신짝처럼 버려지게 되는 거였다.

프리슬란 가문의 당주가 상대라면 남자 뺏겼다고 어디에다 하소연도 못한다.

골방에 틀어박혀 눈물만 찍찍 흘리는 어둡기 짝이 없는 미래를 떠올린 알레시아가 일생의 용기를 담아 외쳤다.

"그, 그건 절대 아니 되는- 읍!"

레이가 곧장 알레시아의 턱을 붙잡고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알레시아가 보여준 객기에 가까운 용기야 대단했지만 지금은 함부로 나섰다가 목을 보전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읍읍...!"

'얌전히 앉아 있어!'

알레시아의 턱을 뒤흔든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순간 식겁했지만 그래도 알레시아 덕분에 약간이나마 긴장이 풀렸다.

레이는 평소처럼 여유를 되찾으려 노력했다.

마음처럼 잘 되진 않았으나, 그래도 아까보단 입이 잘 떨어졌다.

레이가 억지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감사한 제안입니다만... 제가 이미 혼약을 약속한 자가 넷이나 있어서 말입니다."

그게 뭐 어쩌란 거냐.

혼약을 약속한 자가 있으면 내쫓으면 되는 거 아닌가.

다들 그렇게 생각했으나, 레이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어르신의 증손녀와 혼약한다면 증손녀 분을 다섯 번째 부인으로 들여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있던 기사들이 다시 한 번 어깨를 크게 떨었다.

저 미친놈이 대체 누구 앞이라고 시건방을 떠는가.

분노한 소드마스터에게 당장 목이 베여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에른스트의 반응은 너무나도 관대했다.

"다섯 번째라. 내 얼굴을 봐서 순서를 좀 앞당겨줄 수 없겠나?"

레이가 슬쩍 요하나를 곁눈질했다.

가만 고민해보니 확실히 융통성을 좀 가져도 될 것 같았다.

"음... 4번째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요하나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무릎 꿇은 기사들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계속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미친놈이 에른스트를 상대로 말장난을 하고 있었다.

"네 번째라..."

남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에른스트와 레이는 서로를 향해 나긋하게 웃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다. 허나 흘러넘친 긴장이 레이의 몸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에른스트는 잠시 고민했다.

약관도 안 된 나이에 저만한 경지에 올랐으며, 그 기세 또한 전장을 휩쓴 한 자루 검처럼 거칠고 예리하게 닦여있었다.

에른스트로서도 레이는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고, 또한 과거가 어떻든 반드시 거둬야 하는 존재였다.

레이가 설령 수백 수천의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귀라 해도 에른스트는 덮어줄 수 있었다.

제국에 정면으로 반역의 뜻을 내비친 중죄만 아니라면, 에른스트는 레이의 모든 허물을 지워줄 수 있었다.

증손녀와의 혼약은 그런 뜻을 내포한 제안이었다.

헌데 레이는 에른스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불가해한 재능을 가졌다고 하나 결국은 촌놈이라 사리분별이 안 된 걸까?

혹은 갑작스럽게 몰아닥치는 상황에 당황해서 혼이 나가버린 걸까?

그도 아니면, 도저히 내보이기 힘든 허물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그 이유가 어떻든 간에, 이 자리에서 급하게 답을 찾아낼 필요는 없었다.

"지켜보겠다."

황도와 황도의 인근 도시는 에른스트의 손아귀 안이었다.

레이의 위치와 레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실시간으로 에른스트에게 보고될 것이다.

레이는 도망갈 수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레이가 표정을 굳혔다.

저벅!

에른스트는 일방적인 통보 후 군말을 덧붙이지 않고 등을 돌렸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왜소한 체격의 노인이 천천히 건물을 떠났다.

기사들은 공간에 잔존한 노인의 기세가 사라질 때까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황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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