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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48화 (148/446)

148화

제플린은 뒷목이 당겼다.

분명 호의를 베푼다고 비싼 검을 쥐여줬다.

헌데 이 빌어먹을 놈은 공짜 운운하며 품질이 영 아니라고 대놓고 빈정거리고 있었다.

대체 어디다 검을 팔아먹고 이딴 개수작을 부리는 걸까.

제플린이 이를 악물고 레이를 노려봤다.

"팔아먹고 딴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근 몇 년 사이 필립스 백작령 근방에서 내 검이 매물로 나왔다면 네놈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

"아유, 제가 제플린 님께 무슨 억한 감정이 있다고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손사래를 친 레이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일만 이천 골드'를 지불하고 구매한 검과 서비스로 받은 검이 몇 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박살 났지만, 고작 그런 일로 제플린 님을 원망할 만큼 제가 옹졸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하."

"이, 이놈이...!"

치솟은 혈압 탓에 잠깐 눈앞이 까매졌던 제플린이 레이의 멱살을 붙들었다.

"당장 검을 내놔라...! 어디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두 눈으로 봐야겠다."

제플린은 이름 높은 장인이다.

병기에 새겨진 흠집을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도 과거를 읽어낼 수 있었다.

정말 전투로 인해 망가졌는지 아니면 실수나 고의로 망가뜨렸는지 정도는 쉽사리 판별 가능했다.

허나 레이는 고개를 짧게 저었다.

"망가진 검을 가지고 다녀서 뭐합니까. 이미 폐기했습니다."

"끄윽...!"

"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쇼. 서비스로 주신 검에 애프터 서비스까지 요청할 만큼 제가 염치없지는 않습니다."

"내가 미친놈한테 검을 줬구나!!"

제플린이 레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레이는 목 근처가 점점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고민했다.

'이거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지?'

X 시리즈를 다른 이에게 팔았거나 백작령 창고에 두고 왔다고 해봐야 제플린의 호감만 잃고 관계가 단절될 테니, 모 아니면 도를 노린다는 심정으로 제플린을 도발했다.

허나 제플린의 속을 긁어 놓고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괜찮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씨, 실수한 거 같은데.'

사실 제플린을 도발한 건 충동적으로 행한 감이 컸다.

오랜 여행 탓에 피곤하기도 했고, 계속된 사람들의 무시 탓에 스트레스까지 쌓이다 보니 본 성격이 불쑥 튀어나왔었다.

어쨌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레이는 컨셉을 계속 밀고 나가기로 했다.

"제플린 님, 저희 일행 중 18살도 되기 전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천재 소녀가 있습니다. 헌데 아직 마땅히 훌륭한 검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설마 내가 제작한 검을 공짜로 하나 더 달라는 거냐?"

"하하, 그건 아니고요. 혹시 제플린 님께서 알고 계시는 훌륭한 장인 분이 있다면 소개 좀 해주실 수 있으실지..."

네 무기는 못 미더워서 못 써먹겠으니 다른 사람이나 소개해달라는 소리였다.

레이가 될 대로 되란 식의 도발을 이어가고 제플린이 눈을 까뒤집는 사이.

요하나가 모하메드에게 제플린이 누구인지 물어봤다.

모하메드는 제플린이 이름 높은 마법사이자 장인이며, 네가 선물 받은 검을 제작해주신 분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들은 요하나는 깜짝 놀라 마차로 달려갔다.

짐칸 구석을 뒤진 요하나가 이내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저기, 마법사님! 안녕하세요!! 호, 혹시 이거...!!"

요하나의 외침에 다들 고개를 돌렸다.

레이, 모하메드, 젠킨슨, 그리고 제플린의 시선이 요하나가 품에 안고 있는 박살 난 검으로 향했다.

검의 정체는 녹아내린 제플린의 X 시리즈였다.

"?!"

레이와 모하메드, 젠킨슨이 크게 당황했다.

요하나가 저 검을 여기까지 챙겨왔다는 걸 일행 중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요하나는 기대 어린 표정으로 제플린에게 물었다.

"혹시 이거 수리해주실 수 있나요?"

요하나는 자기 검이 크게 훼손되어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레이에게 선물 받아 각별한 의미가 있는 검이기에, 혹시 겉모습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까 싶어 몰래 챙겨왔었다.

허나 타이밍이 나빴다.

레이가 다급히 요하나에게 뒤로 물러나라는 신호를 주었지만 제플린이 한발 빨랐다.

슈욱!

제플린이 마법을 사용해 요하나의 검을 끌어당겨 잡아챘다.

형편 없이 녹아내려 제 기능을 상실한 검이 제플린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겼다.

X시리즈라 해도 그 본질은 그냥 금속 덩어리다.

멀쩡한 검을 용광로에 넣었다 빼도 이와 비슷한 꼴이 될 터다.

허나 검에 남아 있는 흔적을 자세히 살피면 단순히 고열에 녹아내린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이 녹아내리는 동시에 안에서 밖으로 부풀었다.'

사용자의 마나가 과도하게 주입된 상태에서 고열을 동반한 마법을 상쇄시킨다면 대충 이런 꼴이 된다.

'검기...? 아니다.'

서로를 옭아매듯 꼬여있는 궤적을 따라 검이 미세하게 부풀어 있었다.

이건 검기가 아닌 검강의 흔적이다.

제플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검강이 발현된 날붙이는 그 자체로 강력한 무기이자 방패이다.

어지간한 마법으론 흠집도 나지 않기에, 그래듀에이트를 상대할 때는 여러 각도에서 동시 공격으로 피해를 누적시키는 작전이 선호되고는 한다.

'헌데 정면에서 화력으로 검강을 깎아내고 검신을 녹아내리게 할 정도면...'

아무리 낮게 잡아도.

7서클 이상의 섬멸 마법 수준은 되어야 한다.

'대체 무슨...'

망가진 검이 산화한 정도를 보았을 때 이 꼴이 된 지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았다.

의심이 가득 서린 제플린의 시선이 레이를 향하는 순간.

모하메드가 앞으로 나섰다.

"사실."

"...?"

"내가 그 검을 빌려 갔소. 최근 성능을 확인해본다고 이것저것 실험해보다가 사고가 좀 있었소."

"종자의 검을 강탈했다? 그것참 불명예스러운 일 아닌가?"

"종자에게 그런 명검을 쥐여주기엔 아직 수련이 충분치 않소. 이해해주길 바라오."

"..."

제플린이 검의 손잡이를 살폈다.

핏물이 말라붙은 손잡이 또한 미세하게 찌그러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두려움을 씹어 삼키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의지가 거기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풍채가 거대한 모하메드와 비교적 평균에 가까운 체격을 지닌 레이는 손 크기도 꽤나 달랐다.

제플린은 피식 웃더니 레이의 코앞까지 거리를 좁혔다.

레이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제플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병기란, 전장에서 완성되는 법이다."

제플린이 결코 변치 않을 자신의 철학을 입에 담으며 눈을 빛냈다.

"피를 먹지 않고 이름을 얻는 병기는 없다. 있다 해도 그건 허명일 뿐이다."

"..."

"네놈이 어디서 뭐 하는 놈인지는 관심 없다. 무엇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지도 관심 없다. 다만 네놈이 나의 검에 이름을 새겨줄 용의가 있다면, 나 또한 한 번은 더 '서비스'를 베풀어줄 용의가 있다."

"...그것 참 영광이군요."

"급한 일이 끝나면 황도에 있는 내 아틀리에를 찾아와."

레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전문가한테 걸리니 밑천 털리는 게 순식간이었다.

제플린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도 없지만, 그냥 도망쳤다간 훨씬 곤란해질 게 뻔했으므로 레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제플린 님 공방에 아공간 수납이 가능한 수준의 병기도 있습니까?"

어처구니 없는 질문에 실소를 터뜨린 제플린이 녹아내린 검을 돌려주고는 등을 돌렸다.

"기다리고 있겠다."

"..."

멀어지는 제플린을 보고 레이와 모하메드, 젠킨슨이 앓는 소리를 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눈치를 보던 요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혹시 잘못했나요...?"

"일을 귀찮게 만들기는 했지. 앞으로 이건 다른 사람 앞에 내보이지 마. 알겠지?"

레이가 녹아내린 검을 건네주며 요하나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숙소 먼저 빨리 잡자."

머리가 아팠지만 짜증을 낸다고 해결 방법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레이가 피곤한 얼굴로 말 위에 올라탔다.

요하나는 헝클어진 자기 머리를 매만지며 복잡한 심정으로 녹아내린 검을 바라봤다.

*

황도에 진입하기 전 마지막 숙소를 잡았다.

보는 눈도 많고 정비도 해야 했기에 꽤 호화로운 숙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남은 돈이 탈탈 털리는 바람에 이대로면 돌아가는 길에 말이라도 한 필 팔아야 할 지경이었지만, 어쨌든 숙소 자체는 훌륭했다.

알레시아는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닦아내고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치장을 끝냈다.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은 알레시아가 복도에서 마주친 레이를 향해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어떠한가? 나의 기사여!"

"이제 디저트 가게에서 쫓겨나는 건 간신히 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나의 기사여!"

얼굴을 붉히는 알레시아를 향해 레이가 입꼬리를 올렸다.

"길거리에 나가시면 얼추 '평민'처럼은 보이실 것 같습니다."

"레이! 그만 놀리거라!"

낄낄 웃은 레이가 계단 끝을 손으로 가리켰다.

"시장하실 텐데 내려가서 식사 먼저 하시지요."

"으우으... 음울하구나아..."

레이는 찡찡거리는 알레시아와 함께 다른 아이들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기에 발광 아티펙트가 매달린 숙소 1층에서 숙박인들 다수가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헌데 식사를 하는 자들 중 기사들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대부분 모하메드와 안면을 트기 위해 방문한 자들이었다.

미리 만남을 준비하고 있던 기사들도 있었지만, 아까 전 모하메드가 거리에서 검강을 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흥적으로 찾아온 자들도 많았다.

기사들은 돌아가며 자신의 가문과 자신이 모시는 귀족의 이름을 밝히며 모하메드에게 인사를 해왔다.

모하메드는 밥도 못 먹고 정신없이 인사를 받았다.

레이는 애들을 앉혀 놓고 포크로 탁자를 두들기며 주변을 살폈다.

숙소를 방문한 다른 가문의 기사들은 눈치 볼 게 없다는 듯 대놓고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들 중 그래듀에이트만 열한 명...'

대규모 전장에서도 보기 힘든 전력인데, 황도와 맞닿은 도시이다 보니 변방에선 말도 안 되는 광경이 연출됐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

숙소를 찾아온 기사들은 모하메드에게 나름대로 예의를 지켰다.

변방에 위치한 필립스 백작가는 다른 가문과 이권을 다툴 일도, 원한 관계가 될 일도 없으니 기사들이 모하메드와 날을 세울 이유가 없었다.

물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느 가문에 가면 재미 없을 거란 압박이 은근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사이가 안 좋은 가문의 기사들끼리 말싸움이 붙어 흉흉한 기세를 내뿜기도 했다.

"르불루 백작 각하의 도박벽은 좀 나아지셨는지 모르겠군. 저번에도 별채를 하나 내놓지 않으셨소."

"그쪽 둘째 공자께서 치신 사고나 잘 수습되길 바라오. 잘못하면 줄줄이 엮여들 모양인데."

기사들의 신경전이 계속되자 수프를 먹던 알레시아가 수저를 내려놨다.

이 분위기에서 계속 식사를 하다간 속이 뒤집어질 게 뻔했다.

요하나와 다른 아이들도 안색이 질린 와중, 루나만이 평온했다.

보다 못한 모하메드가 헛기침을 했다.

"필립스 백작 영애께서도 나와 함께 오셨소."

주변의 시선을 받은 알레시아가 억지로 자신감을 쥐어짜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서 반갑도다!"

"..."

기사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알레시아에게 대충 인사를 끝내고 다시 저들끼리 신경전을 이어갔다.

그들에게 알레시아는 황도 구경 나온 촌뜨기일 뿐이었다. 그게 크게 틀린 판단도 아니었고 말이다.

반쯤 무시당한 알레시아가 흐물흐물하게 변해서 자리에 앉았다.

한편 미리 술을 좀 들이켰던 기사가 모하메드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난 모하메드 경이 존경스럽소. 아주 이른 나이에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기사는 주변의 이목이 집중된 것을 느끼고 기분 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싸구려 갑옷만 보아도 지원이 얼마나 열약했는지 알 수 있소. 헌데 이만한 성취를 거두다니, 정말 대단하오. 새롭게 모시게 될 분께 경의 실력에 걸맞은 지원을 받게 된다면, 분명 이른 시일 내에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다른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들이켠 기사의 말에 동조했다.

솔직하다면 솔직한 칭찬이었다. 술을 들이켠 기사도 악의를 담아 한 말은 아니었다.

허나 같은 장소에 알레시아가 있는 게 문제였다.

알레시아가 축 처진 얼굴로 말없이 수프를 휘저었다.

모하메드는 표정 관리가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들이박을 수도 없었다.

작위 계승이 예정된 변방의 귀족보다 중앙 귀족을 모시는 그래듀에이트가 실질적인 권력은 더 강했다.

레이 또한 그런 사실을 알기에 자리를 피할 준비를 했다.

포크로 쑤신 고기 조각을 내려놓은 레이가 알레시아에게 그만 일어나자고 손짓했다.

헌데, 그 찰나.

생전 처음 경험하는 질척한 기운이 머리 위를 덮쳤다.

금방이라도 목이 잘려나갈 것만 생생한 살기가 엄습하자 레이는 반사적으로 검 자루에 손을 뻗었다.

'...!'

레이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반응이 너무 빨랐다.

고작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종자가 보일 반응이라기엔 지나치게 기민했다.

그걸 인지했을 때 이미 검 자루를 손에 쥐고 있었다.

다음 순간 사방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촤자자자작!!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오른 기사들은 스스로의 본능을 믿고 망설임 없이 검강을 발현했다.

사방에서 검강이 뻗어나오자 조금 어두웠던 가게 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홀로 군단을 박살 낼 수 있다고 평가받는 그래듀에이트만 도합 열두 명이다.

그들 전부의 기세가 단 한 사람을 향해 집중됐다.

"..."

식당의 구석에 앉아있던,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왜소한 체격의 노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십의 기사가 그 한 사람을 향해 검을 겨눴다.

어지간한 기사라도 졸도할만한 기세가 노인에게 불어닥쳤다.

허나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은, 인간의 살갗은 우습게 찢어발길 검기와 검강의 수풀을 의연하게 파고들었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 용맹하다는 기사들이 겁이라도 먹은 듯 감히 노인의 걸음을 막지 못했다.

기사들은 손아귀가 찢어져라 검을 억세게 잡고도 단 한 번도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노인은 누군가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었다.

뚜벅 뚜벅 걸어서.

마침내 누군가의 앞에 도착한 노인이 흥미롭게 웃었다.

"네가."

"...."

"가장 빨랐다."

레이는 자기가 제대로 좆 됐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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