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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47화 (147/446)

147화

몇 번 야영도 하면서 황도로 향할수록 풍경이 변했다.

흙길이 아닌 잘 정비된 도로가 길게 이어지기 시작했고, 건물과 옷차림의 형태 또한 시시각각 바뀌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높이 솟은 건물이 많아졌고 옷차림은 더 화려해졌다.

어느 곳이든 음지야 없겠느냐마는, 적어도 눈에 바로 보이는 곳에선 밀려나 있었다.

필립스 백작령의 아이들은 입을 벌린 채 감탄하기도 했고 기가 죽어서 비실거리기도 했다.

허나 그 누구도 지루해하지는 않았다.

가는 길이 멀다 보니 여러 애로 사항이 있었지만, 가장 곤란했던 건 숙박비였다.

황도와 가까워질 수록 숙박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졌다.

더군다나, 제국의 권력 구도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얼마 전 물가가 한 번 더 크게 뛰는 바람에 전반적인 지출이 예상보다 훨씬 늘어났다.

본래라면 야영하는 횟수를 늘려서라도 돈을 아꼈을 것이다.

허나 모하메드의 일행은 지금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언제 남들의 시선이 따라 붙을 지 몰랐고, 때문에 품위를 훼손하는 짓은 삼가야 했다.

그리고 숙소를 두고 야영을 한다는 건 명백히 품위 없는 행동이었다.

결국 모하메드가 홀로 방 하나를 쓰는 동안 남은 아이들과 사용인들은 방 두세 개를 꽉꽉 채워 잠을 청해야 했다.

심지어 알레시아조차 카렌, 요하나, 루나와 같은 방에서 뒹굴거렸다.

레이는 현실 파악이 다시 됐다.

과거 황실 마탑으로 향했을 때는 오시리스 백작가 측에서 경비를 대주었다.

돈이 많은 오시리스 백작가이기에 충분한 여윳돈을 바탕으로 쾌적하게 황실 마탑을 다녀올 수 있었다.

황실 마탑에서 알레시아는 플로리아에게 옷가지와 장신구를 빌려 쓰기까지 했다.

허나 이번 여행의 경비는 온전히 필립스 백작이 부담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필립스 백작가는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다.

최대한 황도에 갈 인원을 줄여도 모자랄 판에 혹까지 줄줄 달고 여행길에 올랐으니 주머니 사정이 눈물 날 수밖에 없었다.

'이거 생각을 좀 잘못했네.'

레이는 이렇게까지 쪼들릴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알레시아는 애들과 같이 뒤섞여 지내는 게 나름 신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본래 받아야할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음..."

솔직히 좀 미안했다.

그래도 황도에 도착할 때까지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에 꿋꿋이 나아갔다.

황도 인근 쯤에 다다르니 풍경이 다시 한 번 변했다.

대륙에 번성한 인류의 모든 권력과 기술과 자본이 결집되어 눈앞에 만개해 있었다.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실생활용 아티펙트가 심심찮게 보이고 변방에선 들어보지도 못한 편의시설이 늘어서 있었다.

거리를 나다니는 사람들에 비하면 알레시아조차 옷차림이 꾀죄죄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알레시아 또한 입을 반쯤 벌린 채 도시를 구경했다.

누가 봐도 변방 촌놈들의 행태였다.

알레시아가 화려하게 꾸며진 건물을 하나 가리켰다.

"저기는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구나."

"어... 레스토랑 같은데요. 음식 파는 곳요."

"오, 들어보았도다!"

이쪽 세계는 전문적인 음식점을 찾기 힘들었다.

대개는 숙박업을 하며 손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식이다.

허나 황도에는 수많은 귀족들이나 그에 준하는 사람들이 드나 들었고, 그들 모두가 황도 인근에 별장을 가진 것은 아니니 레스토랑 같은 서비스 업이 꽤나 발달해 있었다.

물론 평민들은 이용하기 힘들었다.

알레시아와 아이들이 고급 레스토랑 건물 주변을 얼씬거리자 곧장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알짱거리지 말고 꺼져!!"

욕을 얻어 먹은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달려와서 감탄했다.

"나의 기사여!"

"네."

"이런 취급은 처음 받아보는구나!"

"..."

옷차림도 꾀죄죄하고 마차도 꾀죄죄하다. 덕분에 무시받는 건 일상이었다.

이 근방엔 알레시아보다 신분은 조금 낮아도 실질적인 권력이 훨씬 강한 자들 천지였다.

작위 계승이 예정된 귀족이랍시고 마냥 목에 힘 주기 힘들었다.

애초에 다들 알레시아의 차림을 보고 알레시아가 제대로 된 귀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알레시아는 입을 삐쭉대면서도 아이들과 조근조근 도시의 감상을 나누었다.

숙소를 잡으러 가는 길에도 볼거리가 참 많았다.

귀족들을 위한 온갖 편의시설들이 즐비했지만 입장도 안 됐고 돈도 없었다. 신분이 아니라 드레스 코드가 문제였다.

대부분의 가게를 지나치던 마차는 고급 디저트를 판매하는 가게에서 멈추었다.

단 냄새에 눈이 돌아간 아이들이 침을 질질 흘려대다 황급히 입가를 훔쳤다.

알레시아는 마차를 세우고는 사용인 셋과 아이들을 데리고 디저트 가게를 찾았다.

가게 안에서 취식이 가능했기에, 되도록 의자에 앉아서 디저트를 즐기고 싶었다.

허나 디저트 가게의 입구를 지키는 점원은 알레시아와 아이들의 옷차림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제대로 입뺀을 당한 알레시아가 축 처진 얼굴을 했다.

"과자를 몇 개 포장해주게나..."

곧 디저트 용 과자가 바구니에 담겨 나왔다.

알레시아가 아이들과 사용인들에게 한 번 먹어보라고 과자를 나눠주었다.

길거리에서 음식을 나누는 건 굉장히 품위 없는 행동이었지만 거듭된 개무시에 알레시아는 혼이 나가 있었다.

"냠냠냠냠."

길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설탕이 가득 든 과자를 음미하는 모습은 누가봐도 도시에 처음 와본 촌뜨기들의 것이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리 달달하고 감칠맛 나는 과자를 처음 먹어본 아이들과 사용인들은 약에 취한 듯 해롱거렸다.

알레시아 또한 감탄했다.

옛날 황실 마탑에서나 경험해본 퀄리티의 디저트를 오랜만에 다시 접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마탑에서 살이 그리 찐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때, 식사를 마치고 가게에서 나오던 귀족 하나가 카렌을 보더니 감탄하며 다가왔다.

"호오, 몸종 주제에 미색이 꽤 곱구나."

"?"

카렌이 과자를 아껴먹다 말고 덜컥 굳었다.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귀족은 카렌의 차림을 보고 이미 신분을 파악했는지 거리낌없이 카렌의 턱에 손을 가져다 댔다.

"꾸미면 훨씬 빛을 보겠군."

카렌을 포함한 아이들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레이가 함부로 나서지 말라고 몇 번이고 경고했기에 서로 눈치만 봤다.

알레시아가 짐짓 화난 얼굴로 한 마디 하려는데, 레이가 선수를 쳤다.

"당장 손을 떼지 않으면 손목을 자르겠다."

"?"

예상했던 수위를 한참 벗어난 레이의 발언에 알레시아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자중하라고 그리 당부하던 놈은 어디 갔는가?

카각!

험악한 위협에 귀족의 호위 기사 중 하나가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움켜쥐는데, 레이가 순식간에 팔을 뻗어 기사가 지닌 검의 폼멜을 같이 붙들었다.

기사는 힘으로 검을 뽑아내려 했지만 레이의 손아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남은 호위 기사들이 검을 뽑아내려는 순간 측면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섬광 그 자체보다,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그 압도적인 기세에 기사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검강을 발현한 모하메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고 제국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해 황도로 가는 길이오. 앞을 막은 이유가 무엇이오."

"..."

카렌의 턱을 잡았던 귀족, 사첼이 황급히 손을 떼고 기사들을 뒤로 물렸다.

어지간히 권세 높은 가문의 귀족이 아닌 이상 그래듀에이트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모하메드가 황제 폐하를 운운했다.

그제야 사첼은 소문으로 들었던 필립스 백작령의 그래듀에이트가 눈앞의 기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큰 실례를 했소."

웬 촌뜨기들인가 했는데 황제의 부름을 받은 기사의 일행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모하메드의 기세가 극히 날카로운 것이, 방금 건드린 몸종이 평범한 몸종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그런 관계'인건가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도, 문제가 복잡해지길 바라지 않았던 사첼은 곧장 정중하게 사과했다.

"정말 큰 무례를 저질렀소. 오늘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폐하를 뵙고 돌아가는 길에 황도에 있는 크로포드 가의 저택에 꼭 들러주시오."

"고려해보겠소."

"그럼 나는 이만 물러가겠소."

사첼은 모하메드에게 예를 갖춘 후 빠르게 사라졌다.

사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알레시아가 뒤늦게 고개를 기울였다.

"사과는 나에게 해야하지 않느냐?"

이 자리에서 일단 신분이 가장 높은 게 알레시아였다.

허나 알레시아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아무도 알레시아를 필립스 백작 영애라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 길에 돈 아낀다고 궁상을 떨며 아이들과 부대낀 탓에 몰골이 영 아니었다.

"...알레시아 님."

"음!"

"황도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냥 귀족 아닌 척하고 계시면 안 될까요?"

"나의 기사여, 설마 내가 부끄러운 건가?!"

경악하는 알레시아와 다르게, 모하메드와 젠킨슨도 레이의 의견에 조금은 동의하고 있었다.

지금 몰골로 알레시아가 자기 신분을 밝혀봤자 뒤에서 귀족 같지도 않은 촌뜨기가 돌아다닌다고 씹히기만 할 터다.

그리 씹힐 바에야 나중에 제대로 치장을 끝내고 나서는 게 낫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억울하구나...!"

끙끙 앓던 알레시아가 주먹을 떨었다.

생각해보니 카렌에게 미색도 밀린 것 같았다.

사첼이 차림새 비슷비슷한 애들 중에 콕 찝어서 카렌을 가리키지 않았는가.

"으그그긋...!"

필립스 백작령에선 나름 떵떵거리며 살았건만 어쩌다 이리 되었단 말인가.

알레시아는 제국에서 필립스 백작가의 위명과 영향력이 쥐꼬리만 하다는 걸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레이가 찡찡거리는 알레시아를 달래주고 있는데 누군가 또 다가왔다.

덤덤하게 서 있던 레이가 순간 긴장을 끌어올렸다.

날카로운 기세를 마주한 마법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준 검은 어디 가고 그런 싸구려를 허리에 차고 있지?"

눈을 가늘게 뜨고 마법사의 얼굴을 살핀 레이가 탄성을 흘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아... 설마 제플린 님?"

"내가 제대로 봤군. 혹시나 했는데 말이야. 많이 컸군."

근방을 지나가다 우연찮게 레이를 발견했던 제플린이 로브의 모자를 뒤로 넘겼다.

우락부락해서 기억에 쉽사리 남는 제플린의 인상이 훤히 드러났다.

레이가 입꼬리를 올리며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헌데 여긴 어쩐 일로...?"

"황도에 들러야 할 일이 생겨서. 그러는 너야 말로 여기는 어쩐 일이냐?"

레이는 간략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상황을 이해한 제플린이 모하메드와 짧게 인사했다.

알레시아가 슬그머니 다가와 목에 힘을 주었다.

"만나서 반갑도다. 나는..."

"귀찮게 하지 마시오."

"!"

충격을 받은 알레시아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레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 아가씨는 왜 괴롭히십니까?"

"귀찮은 걸 귀찮다고 했을 뿐이다."

제플린 정도의 마법사 장인이라면 충분히 알레시아를 무시할 수 있는 위치였다.

제플린이 만들어낸 검을 구입하기 위해 고개를 들이미는 명망 높은 기사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제플린은 레이를 향해 궁금한 걸 다시 물었다.

"내가 준 검은 어디 갔냐? 창고에 세워두라고 준 건 아닌데."

제플린의 X 시리즈.

한두 푼하는 검이 아니었다.

창고에 고이 모셔놓았거나, 혹은 팔아먹었다고 해도 이해 못할 건 아니었지만 만약 그리했다면 실망이 컸다.

뒷목을 긁적인 레이가 답했다.

"아, 그거 망가졌습니다."

"...뭐?"

제플린이 혹시나 해서 다시 물었다.

"망가졌다고? 내가 준 검이?"

"서비스로 얹어주신 거라 그런지 강도가 영 아니더군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그리 말한 레이가 하하 웃었다.

여행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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