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아, 오셨습니까."
클레멘스가 붓을 내려놓으며 인사했다.
최근 레이의 조언 대로 그림을 그려보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꽤 취향에 맞았다.
두 다리로 걷지 못할 드높은 산맥을 화폭에 담기 위해 애쓸 때마다 뭐라 형용키 힘든 달콤쌉쌀한 감정이 가슴을 메우고는 했다.
지금 흥미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즐겁게 그림쟁이 흉내를 내는 중이었다.
레이는 다채로운 색감이 느껴지는 클레멘스의 화폭을 슬쩍 보고선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자리를 비운다는 이야기를 하니 클레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무사히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나 없다고 딴 생각하지 말고."
"하하, 절 품어줄 곳이 또 어디 있다고 딴 생각을 품겠습니까. 레이 님과 백작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는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레이는 클레멘스의 말을 적당히 걸러서 들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때 방문이 슬그머니 열리더니, 무언가가 샤샤삭 기어서 테이블로 다가왔다.
미네르였다.
사족보행으로 테이블까지 접근한 미네르는 바구니에 담겨 있던 사과를 잡아 자기 입에 물었다.
와삭!
식량을 확보한 미네르는 다시 팔다리 네 개를 전부 사용해 방 밖으로 샤샤삭 기어나갔다.
미네르의 뒷다리에 차인 방문이 쾅 닫히는 광경을 보며 레이가 콧잔등을 쥐었다.
"저건 또 왜 저래? 지가 뭐 바퀴벌레야? 대체 왜 저러고 다녀?"
"그... 기어 다니는 게 균형 잡기 더 편하다고 요즘 저러고 돌아다닙니다."
"남은 귀도 자르기 전에 두 발로 서서 다니라고 해."
레시나의 직계 후손이란 엘프가 저러고 다니는 걸 보면 백작도 머리가 아플 터다.
궁시렁거린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충고했다.
"저거 사람 방심 시키려고 하는 연기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잘 지켜봐. 얼굴에 홀리지 말고."
"네, 뭐..."
클레멘스가 설마 그럴 일 있겠냐고 웃어넘겼다.
한때 상인 노릇을 하고 다녔던 만큼 눈치는 빠르다고 자부하는 클레멘스를 향해 레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좁은 곳에 머물다 보면 사리분별도 잘 안 되는 법이야. 자신감 가지는 건 좋은데 정신은 바짝 차려."
"언제나 예리하시군요.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고."
레이가 클레멘스의 어깨를 한 번 쳐주고 밖으로 나왔다.
*
레이가 영주성 밖으로 나오니 모여있던 아이들이 손을 흔들었다.
카렌, 요하나, 루나, 데런, 이안, 루카.
모하메드의 황도 방문에 동행하는 아이들이었다.
백작가에선 젠킨슨, 알레시아, 그리고 사용인 다수가 황도 방문에 참여했다.
아이들이고 기사고 사용인이고 전부 들뜬 분위기였다.
변방 촌뜨기들이 평생을 살아가며 황도를 구경할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는가.
신이 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레이가 아이들을 불러모아 경고했다.
"이번 여행에서 귀족들과 자주 마주치게 될 거야. 모든 귀족들이 필립스 백작님이나 알레시아 님처럼 자비롭진 않으셔. 그러니까 괜히 까불지 마. 귀족한테 밉보여서 손목 발목 잘려나가도 안 지켜줄 테니까."
"..."
"기사님이나 내가 조용히 하라면 입 다물고 엎드리라면 군말 말고 엎드려. 알아들었어?"
"네!!"
기강을 한 번 잡은 레이가 애들을 마차에 태웠다.
모하메드가 새로 하사받은 군마를 끌고 레이에게 다가왔다.
말이 썩 마음에 드는 지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다 준비된 건가?"
"예, 애들이랑 저는 다 준비됐습니다."
"그럼 백작님께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출발하지."
*
모하메드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후 황도로 향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마티아스 후작가를 비롯한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된통 데었던 귀족들은 그 소식을 접하고서야 필립스 백작의 자신감을 이해했고, 또한 비웃었다.
그래듀에이트는 평범한 기사 여럿을 도륙 낼 수 있는 강력한 병기였고, 그래듀에이트가 존재하는 영지는 분명 함부로 자극하기 힘들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필립스 백작가는 단지 운이 좋았을 뿐, 지속적으로 그래듀에이트를 육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다.
당장 전쟁이라도 할 게 아니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처럼 변방의 한미한 귀족가에서 그래듀에이트가 출현하면 권세 있는 가문이 속속들이 낚아채갔다.
가뜩이나 요즘 같은 혼란한 시기엔 막대한 재화를 대가로 그래듀에이트를 영입하려 하는 세력이 많았다.
필립스 백작이 모하메드를 놓아준다면 상당한 이득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다들 그거 하나는 부러워했다.
영입 시도가 활발하리라는 모두의 예상은 적중했다.
모하메드의 일행이 필립스 백작령을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중무장을 한 기사가 사람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중앙귀족 중 한 명이 보낸 기사는 먼저 신분을 밝히며 반갑게 인사했다.
기사는 예의를 갖추며 중앙 귀족이 작성한 친서를 건네고는, 자신의 주인이 모하메드를 영입할 의사가 있음을 넌지시 내비쳤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모하메드를 신의와 명예도 모르는 자라고 모욕한 게 될 수도 있었으므로 기사의 태도는 극히 조심스러웠다.
미리 준비한 문장을 차분하게 나열한 기사는 다시 만나뵐 날이 오기를 고대하겠다며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기사가 가고 나서야 마차 안에 숨어 있던 알레시아가 벌컥 문을 열었다.
"모하메드 경! 저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믿고 있네!"
하는 말에 비해 꽤나 다급해 보이는 알레시아의 표정을 보며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 모하메드 경의 충의가 그리 가볍지는 않습니다. 아가씨께서 먼저 모하메드 경께 믿음을 주셔야지요."
레이는 알레시아를 타박해 다시 마차 안으로 집어넣고는 말을 몰았다.
그후에도 다른 귀족들이 보낸 기사가 꾸준히 찾아왔다.
백작령을 출발한지 하루도 되지 않아 마주친 기사가 벌써 다섯이었다.
알레시아는 처음엔 얼굴도 내밀지 못하고 쩔쩔매더니 이젠 바람 정령 펜리르를 타고 나와 여유롭게 기사들의 인사를 받았다.
대놓고 쏘아봐도 눈치를 보는 건 기사들이니, 재미가 붙은 듯 했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기사들에게 겁을 먹었던 아이들도 금방 적응이 됐는지 이젠 마차 창문을 열고 기사들을 구경했다.
아쉬운 입장인 건 영입 제의를 하러 온 기사들이었다.
간간이 성의를 보이겠다고 선물을 준비한 자들도 있어, 짐칸에 상자가 늘었다.
알레시아가 펜리르를 탄 채 레이 옆에 붙어 가며 감탄했다.
"다들 모하메드 경을 탐내는구나!"
"그래듀에이트는 극히 귀중한 전력입니다. 그들을 분대 단위로 운용할 수 있는 세력은 황실을 포함해도 열이 채 넘지를 못합니다."
알레시아도 머리로는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허나 모하메드를 영입하고자 이리 줄줄이 찾아오는 광경을 직접 보니 아무래도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모하메드 경과 지미에게 참 고마운 마음이 드는구나."
권력을 눈앞에 두고도 탐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이였다면 진즉 필립스 백작령을 떠났을 것이다.
새삼스레 감동한 채 미소짓는 알레시아를 툭툭 두들긴 레이가 모하메드가 타고 있는 군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가씨."
"왜 부르느냐?"
"모하메드 경을 제 값에 팔면 저런 군마 500필은 거뜬히 살 수 있습니다."
"정말이더냐?"
알레시아가 조금 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젠킨슨이 웃음을 터뜨렸고 앞서 가던 모하메드도 남 몰래 어깨를 떨었다.
레이니까 용인되는 농담이었고 레이니까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마차가 나아갔다.
*
"말씀하셨던 자에 대해 조사한 자료입니다."
두꺼운 갑옷을 차려 입은 기사, 아도이아가 노인에게 예를 갖춘 후 문서를 건넸다.
노인은 화려하게 장식된 책상 한 켠에 문서를 놓더니 주름진 얼굴로 아도이아를 바라봤다.
"따로 보고할 만큼 특이한 사항이 있는가?"
"변방에 위치해 황실의 관심 밖에 있었던 한미한 가문에서 출현한 그래듀에이트입니다. 소문만 무성할 뿐, 제대로 된 정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10년 가까이 된 일입니다만, 과거 백작령은 근방에서 '로커스트'가 사살되었습니다. 최고위 암흑 정령을 포함해 일백에 가까운 암흑 정령을 다루었던 7서클에 이른 고위마법사였습니다."
"기억나는군. 세리아였나. 발레리우스의 미궁에서 생존했다던 기사가 처음 활약한 전투 아니었나."
"맞습니다. 로커스트와의 전투에서 세리아와 고위 마법사인 다비드, 그리고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협력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물론 실질적인 토벌의 주력은 세리아와 다비드, 두 사람일 것이라 판단되었습니다만..."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다..."
로커스트는 제국조차 골머리를 앓게 할 만큼 강력한 흑마법사였다.
일백에 가까운 정령을 다뤘으니 그래듀에이트나 고위 마법사 한둘로는 도저히 뚫어내기 힘든 강적이었다.
발레리우스가 남긴 아티펙트를 덕지덕지 바른 세리아의 활약에 로커스트가 무릎을 꿇었다고 대다수가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상황이 좀 묘했다.
아무리 세리아가 최상위 아티펙트를 둘렀다고 해도 그래듀에이트 하나와 고위 마법사 한 명이 로커스트를 죽이기 위해선 기적이 필요했다.
허나 이미 10년 전에 모하메드가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닿아 있었다면.
로커스트를 토벌한 주역 중 한 명이 모하메드였다면, 조금 더 말이 됐다.
"흥미가 가는군."
이러나 저러나 노인에게 있어 새롭게 출현한 그래듀에이트, 모하메드는 눈길이 가는 기사였다.
대다수의 예상 대로 모하메드가 그저 변방에서 운 좋게 높은 경지를 이룩한 기사라면, 회유하기도 쉽고 써먹기도 쉬웠다.
촌구석에서 즐기지 못했던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에 푹 빠져 있을 테니까.
반대로, 모하메드가 정녕 10년 전에 이미 그래듀에이트에 오른 강자였다면.
"흠..."
노인이 벽에 걸린 대륙의 지도를 살폈다.
필립스 백작령은 국경과 맞닿아 있었고, 루비하 왕국과 전쟁을 벌이면 레인저에 의해 가장 처음 쓸려갈 지역이었다.
만약 모하메드가, 외적을 경계해 필립스 백작가를 수호하기 위해 온갖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스스로 경지를 감추었다면.
정녕 그러하다면.
"근래 보기 힘든 진정한 기사로군."
이리 되면 자기 사람으로 삼는 건 힘들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유쾌한 일이었다.
만족스러워 하는 노인의 기색을 느낀 아도이아 조심스레 물었다.
"모하메드 경을 이곳으로 초빙할까요?"
"됐네. 이곳으로 불러들여 봤자 폐하의 심기만 거스르지 않겠나."
"그럼..."
"그래도 얼굴은 한 번 보고 싶군. 내가 직접 찾아가도록 하지."
"준비해놓도록 하겠습니다."
아도이아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로 물러섰다.
노인은 지도 속 필립스 백작령을 바라보다 서서히 시야를 넓혔다.
이내 대륙에 넓게 번져 있는 제국의 영토가 한눈에 들어왔다.
노인의 입가에 흐릿한 웃음이 맺혔다.
"좋군."
노인의 이름은 에른스트 프리슬란.
제국의, 소드마스터.
여행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