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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45화 (145/446)

145화

추억을 공유할 사람이 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씁쓸한 일이었다.

레이는 오래전 여의도 한강 공원에서 보았던 불꽃 축제를 곱씹어보며 조금 착잡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이 사태의 원흉이었던 불알 친구놈의 얼굴이 오랜만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퍼엉!

석양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하늘을 수놓았던 불꽃이 잦아들었다.

해가 완전히 떨어진 야밤에 불꽃을 쏘아 올렸다면 좀 더 화려하게 보였겠지만, 그리하면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화려했던 빛줄기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잠에서 막 깬 것처럼 눈을 깜박이다 환호성을 터뜨렸다.

이제 오늘 축제의 마지막 행사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넓게 거리를 벌리고 모인 가운데 모하메드가 검술 시범을 시작했다.

어스름한 배경 사이로 푸른 검기가 길게 뻗어 나오더니, 이내 서로를 옭아매며 거칠고 화려한 섬광을 토해냈다.

신비롭고 위압적인 광경에 많은 사람들이 크게 놀라 뒷걸음질쳤다.

모하메드는 몇 번 더 허공을 베어내고선 미리 준비되어 있던 거대한 바위 더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강이 낱낱이 분해되며 수십 개의 검기로 변해 바위 더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가가가강!!!!!!

그 단단했던 바위들이 폭음과 함께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미리 결계를 준비한 로필렌이 바위 파편들을 결계 안에 가두어 구경꾼들의 피해를 막았다.

같은 인간이 벌일 수 있다고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는 광경을 두고 영지민들이 필립스 백작과 모하메드를 칭송했다.

이로써 오늘의 축제가 끝났다.

내일까지 소소한 이벤트가 남아 있었지만 본 축제는 이제 마무리된 격이었다.

레이가 루나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불꽃놀이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어. 고마워. 덕분에 다들 좋은 구경 했네."

담담하게 웃은 루나가 얌전히 서서 레이의 손길을 느꼈다.

레이가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요하나를 돌아봤다.

여전히 요하나는 입이 댓 발 나와 있었는데, 그대로 돌려보냈다간 또 며칠 고생해야 할 게 뻔했다.

"요하나, 너도 가끔 좀 꾸미고 다녀. 오늘 보니까 훨씬 낫네."

"뭐래."

요하나는 툴툴거리면서도 슬그머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입꼬리가 실룩이는 모습을 레이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 적당히 인사를 마치고 헤어진 후 레이는 영주성으로 향했다.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레시아가 활짝 웃었다.

"나의 기사여!"

"뭘 여기까지 나와 계십니까."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반갑게 목소리를 높인 알레시아가 이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나이를 먹으니 신경 쓸 일만 늘어나는 것 같구나아..."

조금만 더 어렸더라도 알레시아는 평민들의 축제에 레이와 같이 참가하겠다고 떼를 써서 백작의 허락을 얻어냈을 것이다.

허나 이제 성년이 다 된 아가씨다 보니 예전보다 고집을 부릴 수 있는 범위가 확 줄어들었다.

어린 시절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던 성격이 어디 간 아니니, 알레시아로서는 이래저래 스스로를 절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사는 게 피곤하구나!"

"철이 드신 거죠."

레이가 피식 웃었다.

레이는 알레시아가 유독 직접 키운 딸내미처럼 느껴지고는 했다.

예전에는 함부로 내놓기 어려운 사고뭉치였는데, 이제는 그럭저럭 귀족가 아가씨로 봐줄 만 했다.

레이 앞에서 유난히 솔직해서 그렇지, 밖에다 내다 놓으면 내숭도 잘 떨었다.

알레시아는 레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작이 새로 들인 군마에 대해 신나서 이야기했다.

레이도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알레시아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군마란 게 원체 비쌌고, 기사가 타는 군마는 훨씬 비쌌다.

특히 기사가 타는 군마 중 품종이 괜찮다 싶은 건 사치품처럼 취급되어 가격이 자주 널뛰었다.

이번에 필립스 백작은 정말 제대로 된 군마를 세 필 구하였는데, 무게만 1톤 가까이 나가는 어마어마한 체격과 힘을 자랑하는 말들이었다.

젠킨슨의 눈이 돌아갈만 했다.

알레시아는 자기 눈높이보다 말 머리가 한참 위에 있다고 웃으며 영주성 안으로 들어섰다.

"대련이 기대되는구나."

평민들이 축제를 다 즐겼으니 이제는 알레시아 차례였다.

영주성 내부의 수련장에서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서로 실력을 겨뤄볼 예정이었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고 우승자에게 말 한 필이 수여된다.

서로 죽자고 달려들진 않겠지만, 다들 실력 차이가 크게 나진 않아서 꽤 흥미로운 대련이 될 터였다.

"누가 우승할지 궁금하구나! 레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뭐, 젠킨슨 경이 우승하겠죠."

"그래도 종자라고 마스터를 응원해 주는구나."

"응원해주는 게 아니라... 음. 이따 보시면 알 겁니다."

레이가 알레시아와 함께 영주성 내부 수련장으로 들어갔다.

*

"크아아악!!"

"비겁하다 젠킨슨!!!"

"네놈이 그러고도 기사의 긍지를 입에 담는가?!"

다른 기사들이 분노하며 젠킨슨을 힐난했다.

젠킨슨은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광소를 토해내며 모로스를 휘둘렀다.

"크하하하하!"

그 광경을 보며 레이가 자기 미간을 문질렀다.

기사가 마법사보다 템빨 효율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당연히 장비의 수준 또한 기사에게 중요했다.

더군다나 모로스는 제국에서도 몇 개 존재하지 않는 최상위 아티펙트였다.

서로 실력이 비슷하다면 모로스를 든 쪽이 상대를 그냥 씹어먹었다.

"크악!!"

젠킨슨의 상대가 이번에도 무력하게 튕겨나왔다.

모로스는 사용자가 전달하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검기의 위력 상승은 물론이고, 모로스가 운동 에너지 또한 증폭시키기에 검속이 상당히 빨라진다.

젠킨슨은 수월하게 다른 기사들을 박살내며 결승에 올랐다.

그에 반해 운이 따라줘서 간신히 결승에 오른 디디에가 울분에 차서 외쳤다.

"비겁하오, 젠킨슨 경!!"

디디에 또한 모로스 대여권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에게 빌릴 생각을 아예 못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건 너무 옹졸한 짓이라고 판단해 말도 꺼내지 않았다.

헌데 젠킨슨이 이리 뒤통수를 칠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선수를 쳤어야 한다고 이를 부득부득 간 디디에가 검을 휘둘렀다.

젠킨슨은 부끄러움 따위는 잊은 듯 연신 광소를 터뜨리며 모로스를 휘둘렀다.

지금 자기가 손에 쥐고 있는 게 신화를 이끈 제국의 신검이라 생각하니 희열이 펑펑 차올라 제대로 된 사고를 앗아갔다.

"크하하!!"

"크으윽!!"

디디에가 연거푸 밀려나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질렀다.

서로 비등한 실력을 지닌 기사들의 명예로운 대련을 바랐던 알레시아가 실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늘의 젠킨슨 경은 좀 추하구나아..."

"..."

필립스 백작 또한 떫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레이에게 가까이 와보라고 손짓했다.

레이는 군말 없이 백작에게 다가가 입을 다물고 섰다.

백작의 표정은 꽤 심각해 보였다.

본래 의도했던 대련의 양상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자 화가 난 듯 싶었다.

"레이."

"...네, 백작님."

레이가 움츠러든 채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대련을 지켜보던 백작이 세상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다음에 나도 한 번 휘둘러 볼 수 있나?"

"..."

잠깐 눈살을 찌푸렸던 레이가 혹시나 싶어 젠킨슨을 가리켰다.

"모로스 말입니까?"

"모로스 말일세."

"..."

레이가 백작을 마주봤다.

진중한 표정 속에서 백작의 눈동자만이 기대에 차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레이는 참 할 말이 많았지만, 아쉬운 건 본인이었기에 예쁜 미소를 만들어 얼굴 위에 덮어썼다.

"원하실 때 언제든지 말씀하시지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빌려드리겠습니다."

백작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

축제가 전부 끝났다.

축제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별다른 사건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기사 간의 대련에서 우승한 젠킨슨은 싱글벙글 웃으며 군마를 하사 받았다.

다른 기사들이 울분을 토했지만 이미 정해진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다.

이제 빠른 시일 내에 모하메드가 직접 황도를 들러야 했다.

필립스 백작의 지원 덕분에 아이들도 여럿 황도에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백작의 의사결정 과정에 모로스의 영향이 컸다는 걸 레이는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디..."

황도로 출발하기까지 약 일주일 정도 남은 시점.

레이는 의자에 앉아 편지지를 펼쳤다.

플로리아에게서 도착한 편지지였다.

[레이, 오랜만이야.]

남들에게 보일 가능성이 있었기에 아랫사람 대하듯 작성된 편지는 플로리아의 불평불만을 잔뜩 담고 있었다.

정체 모를 '망할 잡것'들이 항구 앞바다에 깽판을 친 탓에 아버지 골치가 아프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였다.

한동안 '망할 잡것' 욕을 하던 플로리아는 편지 말미에 가서야 레이를 향한 걱정을 내비쳤다.

사고로 인해 다쳤다고 들었는데 쾌차해라. 앞으로는 몸 조심해라. 그런 내용이 지나간 후.

마지막 줄은 특히나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엘-람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도드리고 있을게.]

"흠..."

레이가 턱을 괸 채 미소 짓고 있자 옆에 있던 레아가 외쳤다.

"연애 편지! 오빠 연애 편지 읽어!"

"동생아, '연애'가 무슨 뜻인지는 아니?"

"손 잡고 뽀뽀!"

생각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살짝 감탄한 얼굴의 레이를 향해 레아가 찰싹 달라붙었다.

"나도 갈래."

"어딜?"

"황도! 황도 같이 갈래!"

"넌 거기 가면 살아서 빠져나오기 힘들어요."

어쨌든 안 된다는 소리에 레아가 매달렸다.

"나도 갈래! 나도 갈 거야! 오빠랑 갈래!"

"..."

레이는 잠시 레아를 바라보다가, 레아가 앉을 수 있는 작은 의자를 가져와 톡톡 두들겼다.

"여기 앉아봐."

레아는 별 의심 없이 레이가 두드리는 의자에 가서 앉으려고 했다.

레아가 의자에 앉기 위해 다리를 굽히고 엉덩이를 낮추는 순간.

레이가 의자를 뒤로 빼버렸다.

당연히 레아의 엉덩이는 바닥으로 수직낙하 했다.

"와악!"

꽁!

지끈거리는 꼬리뼈를 붙잡은 레아가 주변을 둘러보다 상황을 이해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빼애애애애애애액!!!!!"

"흠..."

자지러지게 울어 재끼는 레아를 향해 레이가 손을 뻗었다.

레이는 레아의 눈두덩을 잡아 올린 뒤 붉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해독 권능을 사용했다.

레아의 피 속에 섞여 있는 용혈의 흐름이 미약하게나마 머리에 새겨졌다.

'아직은... 버티나.'

감정이 격해진 와중에도 용혈로부터 비롯된 마나의 흐름은 안정적이었다.

허나 레아의 심장에 심어진 드래곤 하트의 파편은 사정이 달랐다.

조금씩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레이의 권능이 잡아냈다.

"네가 아빠 반만 닮았으면 좋았겠는데."

"레아는 엄마 닮았어!"

레아는 우는 와중에도 항변했다.

실제로 레아는 벨라를 많이 닮아 있었다.

다만 레이는, 레아가 1황자 카리우스의 재능을 닮았기를 바랐다.

어리석고 무능했던 그의 재능을 레아가 닮기를 바랐다.

허나 레아는 똑똑한 아이였다.

지금이야 울어재끼는 것밖에 못하는 것 같았지만, 또래들에 비해 훨씬 언어능력의 발달이 빨랐다.

체내에 품고 있는 기운 또한 결코 작지 않았고 말이다.

"...그만 울어."

"빼애애애애액!!"

"같이는 못 가지만, 황도 갔다가 돌아올 때 맛있는 거 많이 사올게."

"진짜?"

"사온다고 했지 너 준다고는 안 했어."

"빼애애애애액!!"

"이게 자꾸 습관적으로 울어."

레아를 안아들어 목마를 태워준 레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집을 나섰다.

금세 레아의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와아!"

레이는 계속해서 어깨를 들썩이며 황도가 있을 방향을 바라봤다.

이번 여행은 아이들에게 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자 계획한 여행이었다.

이처럼 순수한 목적을 지니고 백작령을 떠날 일이 앞으로는 없을 터다.

그렇기에, 레이는 이번 여행길이 편안하길 바랐다.

여행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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