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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44화 (144/446)

144화

"마스터, 혹시나 해서 묻는데 대련이란 게 남들 보는 곳에서 합니까?"

그러면 좀 곤란했다.

하르시아의 공간검은 실전된 지 600년이 지났지만 영웅들의 신화가 계속해서 화자 된데다 '도약 검기'의 특성이 워낙 독특해서 일단 사용하면 누구나 다 알아봤다.

제국의 신검 모로스 또한 오랜 시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 형태와 특징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남 앞에서 함부로 썼다간 분명 뒷말이 나올 터였다.

레이의 물음에 젠킨슨이 코웃음을 쳤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당연히 공개적인 장소에서 하는 대련은 아니었다.

애초에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 전력을 그리 쉽사리 남들에게 드러낼 리 없었다.

젠킨슨의 설명에 레이가 작게 혀를 찼다.

결국 백작가 식구끼리 소소하게 하는 이벤트성 매치에 사기템 들고 찐텐으로 들이박겠다는 거 아닌가.

"뭐, 이따 말씀하세요. 빌려는 드릴 테니."

"표정은 왜 그따위냐?"

"우리 마스터가 참 옹졸하구나 싶어서요."

"다 네놈한테서 배운 거다."

피식 웃은 젠킨슨이 몸을 돌렸다.

잠시 쉬었으니 다시 순찰을 돌아야 했다.

"난 그만 가보마."

"예, 고생하세요."

레이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

보통은 평민들이 즐기는 축제에 기사들이 직접 나서서 경비를 서지는 않는다.

기사들이 그리 만만하고 값싼 병종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열리는 축제는 모하메드가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음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런 날 축제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건 모하메드의 명예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다.

때문에 기사들은 축제에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분위기를 해치는 자가 없는지 돌아가며 순찰했다.

그러자 간 큰 좀도둑들이 간간이 잡혀 나왔다.

"크아아아아악!!!"

소매치기를 하다 걸린 남자가 젠킨슨에게 손목이 통째로 바스러졌다.

백작령 영지민은 아니고 외부인이었는데, 젠킨슨은 사람을 시켜 소매치기범을 끌고 가게 하고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이런 잡범들은 으레 2~3명이 협업하고는 하니 주변에 공범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소소한 사건 사고와 함께 축제는 계속 진행됐다.

레이가 미리 약속을 잡아둔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자 카렌과 요하나가 나타났다.

카렌은 평민이 구하기 힘든 실크 재질의 외출용 드레스를 입고 손을 흔들었다.

드레스 치고는 디자인이 되게 간소했지만 그쪽이 도리어 레이의 취향에 가까웠다.

카렌도 드레스를 훑는 레이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치맛단을 매만지며 말했다.

"알레시아 님이 빌려주셨어."

"잘 어울리네."

담담한 레이의 칭찬에 카렌이 몸을 살짝 꼬며 해맑게 웃었다.

"알레시아 님이 빌려주시면서, '나의 기사여, 순서는 꼭 지키거라.'라고 전해달라 하셨어."

"..."

레이가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 카렌이 옆에 와서 꼭 붙었다.

부푼 가슴을 은근히 팔뚝에 치대며 눈웃음을 흘렸는데, 13살쯤 뭣도 모르고 하던 유혹보다는 훨씬 매혹적이었다.

잠깐 고장난 레이가 제자리서 눈을 껌벅이고 있자, 요하나가 심기 불편한 눈으로 그 모습을 쳐다봤다.

요하나도 오늘 나름 옷차림을 신경 썼다.

향수도 뿌리긴 했는데, 레이가 저번에 '꿉꿉한 땀내' 따위를 운운한 게 영 거슬렸다.

또 다시 그딴 망언을 하면 대가리를 후려버릴 것이라 다짐하며 다가갔다.

고장났던 레이가 요하나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아, 요하나. 루나는 어디 갔어?"

얼굴을 보자마자 레이가 루나부터 찾자 요하나의 미간이 잠깐 구겨졌다.

허나 요하나는 차마 섭섭함을 티 내지 못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로필렌 님이랑 뭐 준비할 거 있다고 갔어."

"아, 로필렌 님이랑."

루나가 로필렌과 함께 준비한 이벤트를 상기한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슬그머니 카렌을 옆으로 밀어내고선 다 같이 축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카렌이나 요하나나 이런 축제를 경험할 일이 거의 없었기에 많이 들떠 있었다.

둘 다 지미 패밀리가 마련한 여러 이벤트에 열심히 참가했는데, 아무래도 그 이벤트라는 게 몸 쓰는 일이 많았다.

몸 쓰는 일에 요하나는 거의 독보적인 재능을 발휘했고 말이다.

딱!

화살을 던져 열 번 연속 구슬을 맞추는 데 성공한 요하나가 상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상품을 관리하던 남자가 우는 얼굴로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가 고개를 쓸쩍 끄덕이곤 요하나를 끌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적당히 좀 해. 준비된 상품 다 털어먹으려고?"

"안 그래도 한 번만 더 던지고 그만하려고 했어!"

요하나는 틱틱 대면서도 레이가 이끄는 대로 다시 거리를 걸었다.

그럭저럭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도중 카렌이 물었다.

"레이, 우리 정말 황도를 구경하러 갈 수 있는 거야?"

"아직 확정된 건 아니야."

애들 한 명당 황도를 왕복할 여행 경비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필립스 백작이 감당해야 했는데, 필립스 백작 입장에서 속만 쓰린 지출이었다.

레이가 부탁하면 되도록 들어주기야 하겠지만, 좀 염치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러면 장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하나...'

이젠 몸 위에 덧댈 게 확실히 필요하긴 했다.

어쭙잖은 수준의 방어구는 있으나 마나인데, 갑주 형태의 고급 아티펙트는 찾는 것도 힘들고 부르는 게 값이었다.

이걸 필립스 백작에게 부탁하는 건 이래저래 무리가 있었다.

'...고모한테 좀 물어볼까.'

레이가 고민하고 있는데 카렌이 손을 잡아오며 말했다.

"이번엔 나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 레이랑 같이 여행하고 싶어."

황도까지 왕복한다면 또 한참 얼굴을 못 볼 게 뻔했다.

오시리스 백작령에 갈 때는 요하나만 레이와 동행했다.

카렌은 이번에야말로 레이와 함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싶었다.

로멘틱한 상상에 부풀어 있는 카렌을 보고 레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카렌, 여행이란 게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아. 요하나도 처음에만 싱글벙글했지 중간에 얼마나 유난을 떨었는데."

필립스 백작령이 변방에 위치한 탓에, 황도까지 가는 길에 중간중간 야영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려면 길거리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해야 했는데, 볼일을 볼 때도 안전을 위해 서로 충분히 보고 들을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허나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향하던 당시 요하나는 볼일을 볼 때마다 유난을 떨었다.

"나보고 저 멀리 꺼져 있으라고 얼마나 짜증을 내던..."

쩌억!!!

요하나의 주먹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무방비하게 요하나의 주먹에 직격당해 턱이 돌아간 레이가 제자리서 휘청였다.

요하나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다 외쳤다.

"진짜 미쳤나 봐!!!"

씩씩 거린 요하나가 지면에 쓰러진 레이를 두고 몸을 휙 돌렸다.

멀어지는 요하나와 쓰러진 레이를 번갈아 본 카렌이 조심스레 말했다.

"이번엔 레이가 잘못한 거 같아..."

"끄읍...."

고통에 몸부림 친 레이가 뺨을 붙잡은 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어쨌든... 여행이란 게 카렌 생각보다 불편할 거라고..."

"그, 그래도 루나가 같이 가니까 괜찮지 않을까...?"

"아, 그렇긴 하네."

결계 같은 걸 잘 활용하면 여행 중에도 프라이버시는 적당히 지킬 수 있었다.

역시 마법이 있으면 편하다고 중얼거린 레이가 카렌과 같이 요하나를 찾아 걸었다.

허나 한참을 찾아도 안 보여 반쯤 포기하고 있던 와중, 가까운 곳에 악기 소리가 들렸다.

"레이, 저기 가보자!"

카렌의 손에 이끌려 다가가니 노래 대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조잡하게나마 악사 여럿이 악기를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평소 목청 좀 괜찮다는 말을 듣던 사람들이 나무 단상 위에 올라가서 목소리를 토해내는 모습을 보며 카렌이 물었다.

"레이도 참가해 볼래?"

"나는 별로."

레이는 딱히 노래에 흥미가 없었다.

또한 여느 소설의 주인공처럼 히로인에게 탄성을 내뱉게 할 만큼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쪽 세상에서 그럭저럭 통할 노래 몇 개가 떠오르긴 했지만, 굳이 나설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레이가 고개를 젓자 카렌이 아쉬워하며 중얼거렸다.

"레이는 노래도 잘할 것 같은데."

"카렌, 나는 그렇게 다재다능하지 않아."

"그래도 나중에 한 번 들려주라. 들어보고 싶어."

레이가 히히 웃는 카렌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단상 위로 무언가가 아장아장 기어 올라갔다.

레아였다.

레아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목을 가다듬는 시늉을 했다.

긴장을 풀듯 몸을 한 번 부르르 떤 레아는 앙증맞은 율동과 함께 노래를 시작했다.

"아기 트롤 뚜루루뚜루~ 귀여운 뚜루루뚜루~ 산속 뚜루루뚜루~ 아기 트롤!"

이 세계의 동요를 열심히 부르는 레아를 보며 다들 진한 웃음을 머금었다.

카렌 또한 입을 가린 채 어쩔 줄 몰라하며 방방 뛰었다.

"어떡해! 너무 귀여워!"

"흠..."

초롱초롱한 눈빛, 앙증맞은 율동, 그리고 발음이 줄줄 새는 와중에도 그럭저럭 음정이 맞는 노래.

그래, 귀여운 아이였다.

누가 보아도 볼을 비비고 싶어할 만큼 귀엽고 똑똑한 아이였다.

그렇지만 레이는 레아에게 크게 정이 가지 않았다.

레이는 확신했다.

이미 단명할 운명이었지만, 레아는 나의 삶을 높은 확률로 더욱 단축시킬 것이라고.

"..."

레이는 자기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일종의 억울함에 가깝다는 걸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괜히 콧잔등을 만지작거리던 레이의 팔을 카렌이 슬그머니 당겼다.

어느새 레아의 장기자랑은 끝나 있었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 실실 웃은 레아가 아이에겐 높은 계단을 걸어 내려가다 넘어졌다.

지미가 여유롭게 레아를 잡아 다시 세워주었다.

행사가 계속 이어지고, 카렌도 단상에 올라가 수줍어하며 짧게 노래했다.

이런 변두리에 노래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있을 리가 없었지만, 카렌의 음색은 꽤나 매력적이었다.

남자들이 카렌을 보며 특히나 환호했다.

드레스를 입은 카렌이 눈웃음을 치며 살랑살랑 손짓할 때는 다들 자지러지는 시늉을 했다.

허나 영지민 중에서 카렌에게 선을 넘어가며 치근대는 사람은 없었다.

그랬다간 레이에게 뼈가 박살날 수 있다는 걸 동네 바보도 알고 있었다.

적당히 노래 대회가 마무리되고 우승자가 발표됐다.

레아였다.

레이가 중얼거렸다.

"필립스 백작령에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군..."

지미 패밀리가 기획한 행사의 우승자가 지미의 딸내미(아님)라니.

참으로 속 보이는 결과였다.

허나 레아는 어른들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상품을 받아 좋다고 뛰어다녔다.

포장된 상품의 부피에 비해 쉽사리 들고 다니는 걸 보니 봉제 인형 같은 것이라 추측 가능했다.

레아에게 다가간 레이가 덤덤하게 상품을 뺏어 들었다.

"압수."

"빼애애애애애액!!!"

습관적으로 레아를 울린 레이가 다시 상품을 돌려주었다.

레아가 상품을 들고 지미를 향해 도도도 달려가 뒤에 숨었다.

레아를 안아든 지미가 실소를 터뜨렸다.

"동생은 왜 자꾸 괴롭혀?"

"장난 친 거예요, 아빠."

"..."

레아 앞에서만큼은 레이가 '아빠'란 호칭을 입에 담아도 꾹 참고 견뎌야 했다.

지미가 어깨를 가늘게 떠는 사이 지미 패밀리에 속한 무리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외쳤다.

"곧 불꽃놀이를 시작합니다!!"

이 세상의 불꽃놀이는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소량의 화약을 이용한 얄팍한 쇼에 불과했다.

허나 오늘은 다를 것이다.

레이의 묘사를 바탕으로, 루나와 로필렌이 레이가 전생에서 보았던 불꽃놀이를 마법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변방에선 보기 힘든 꽤 훌륭한 이벤트가 될 것이다.

레이는 열심히 거리를 뒤진 끝에 요하나를 찾아내 몇 대 더 얻어맞고 하늘을 구경하기 괜찮은 자리를 잡았다.

날이 슬슬 저물어 간다.

태양이 지평선과 맞닿았을 때쯤 작은 불꽃 하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 펑! 소리와 함께 형형색색의 불꽃이 화려하게 하늘을 수놓았다.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입을 벌린 채 하늘을 가득 메운 불꽃에 압도되었다.

오직 레이만이 홀로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옛날 생각나네."

축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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