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처음에 축제를 벌인다고 했을 때 레이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런 변두리 영지에서 이벤트를 열어봤자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에, 기껏해야 음식 좀 먹고 떠드는 마을 잔치 수준을 생각했다.
허나 필립스 백작은 오랜만의 축제라고 꽤 많은 물자를 지미와 매튜에게 제공했다.
지미와 매튜는 용병 시절 돌아다녔던 경험을 살려 축제에 적합한 자잘한 행사를 여러 개 기획했다.
경품이나 이벤트의 부상은 백작에게 받은 예산을 이용해 준비했고, 필요한 인력을 지미 패밀리에서 차출했다.
이러다보니 축제는 꽤 그럴듯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다.
들뜬 분위기 속에서 축제가 시작됐고, 금세 여기저기서 환호와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레이는 나무 그늘 아래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또 간간이 필립스 백작과 모하메드를 칭송했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흥미가 가진 않았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레이에게 있어 이런 류의 행사는 큰 감흥을 주기 힘들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영지민들의 표정을 살피고 있자니 누군가 아장아장 걸어왔다.
레아였다.
"오빠!"
레아는 손에 닭꼬치 같은 걸 쥐고 있었다.
이번 축제에서 지미 패밀리는 곳곳에 부스를 만들어 음식을 팔았는데, 예산 지원을 받고 하는 일인지라 굉장히 싼 값에 먹을거리를 제공했다.
그걸 하나 얻어왔는지 레아는 싱글벙글하며 꼬치에 끼인 고기를 우물거렸다.
기름이 묻은 탓에 입가가 아주 번들거렸다.
"맛있냐?"
"마시쩌!"
턱 힘이 좀 부족한지 고기를 빨아먹다시피 하면서도 레아는 행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전생의 어린 시절 아파트 바자회에서 사 먹었던 닭꼬치가 생각나 피식 웃었다.
레아가 그 웃음의 뜻을 오해했는지 깜짝 놀라 한발 물러섰다.
"꼬치 내 거야. 오빠 안 줄 거야!"
"안 뺏길 자신은 있고?"
"힉!"
레아는 짧았던 인생의 스몰데이터를 통해 레이가 꼬치를 진짜 뺏어가고도 남을 오빠라는 걸 깨닫고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물론 얼마 가지 못해 철푸덕 넘어졌음은 당연했다.
꼬치가 흙바닥을 뒹구는 걸 확인한 레아가 세상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빼애애애애애액!!!"
"그만 울어. 사람들 다 쳐다보잖아."
"오빠 미워!"
"나쁜 말 하면 꼬치 새로 안 사준다."
"...오빠 좋아?"
"이미 나쁜 말 해서 안 사줄 거야."
또 속냐, 레아야.
레이가 혀를 끌끌 차자 레아가 재차 울음을 터뜨렸다.
"빼애애애애애애액!!!"
"아이고, 시끄러워라."
레이가 귀를 막는 흉내를 내며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벨라가 멀지 않은 거리에서 레이와 레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울려놓고 도망가면 한 소리 들을 게 뻔했기에 레이는 현실과 타협했다.
"그만 울어. 꼬치 새로 사줄게."
두 번이나 속은 레아는 이번에는 혹시나 다를까 싶어 울음을 그쳤다.
"진짜?"
"진짜."
"진짜로?"
"진짜로."
"오빠 좋아!"
레아가 와다다 달려와서 레이에게 앵겼다.
레이는 레아를 품에 안은 채, 둘을 지켜보고 있던 벨라에게 적당히 수신호를 보냈다.
얘는 내가 1시간쯤 놀아주겠다는 뜻이었는데, 레이의 메시지를 이해한 벨라가 흐뭇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벨라가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한 레이가 레아의 이마에 딱밤을 갈겼다.
딱!
"그만 떨어져."
"빼애애애액!!"
레아가 레이의 가슴팍을 콩콩 두드리며 화를 냈다.
그래도 품에서 떨어지려 하진 않았기에, 레이는 레아를 좀 더 편하게 안아주며 길을 걸었다.
"꼬치집 어디 있어?"
"저오오오오기?"
"그래, 한번 찾아보자."
길을 걸으며 레이는 레아의 정수리를 살폈다.
은백색의 머리뿌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다시 검게 염색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흰 머리 같은 것도 보였다.
레아의 머리카락은 염색이 잘 벗겨졌다.
이게 염색 기술이 좋지 않아서인지 레아의 머리카락이 유별난 탓인지 알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상태를 보니 염색 주기를 더 빨리하거나 마법적인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았다.
"레아."
"응!"
"시원하게 삭발할까?"
"삭발이 뭐야?"
"머리카락이 아빠처럼 되는 거야."
물론 지미가 아직 대머리는 아니었다. '아직'은 말이다.
지미의 헤어 스타일을 떠올린 레아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 삭발 싫어! 아빠 싫어!"
"으음... 동생아. '아빠'처럼 머리 밀지 않으면 나중에 '아빠'처럼 될 수 있어요. 막 산 타고 도망가야 돼."
"삭발 싫어어어!"
레아는 레이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지만, 어쨌든 소중한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건 싫었다.
레아가 완강히 저항하자 레이가 낄낄 웃으며 목마를 태워주었다.
머리를 밀어버리라는 건 정말 농담이었다. 다른 방법은 찾아야겠지만 말이다.
레아는 레이의 어깨 위에서 신나 가지고 꺅꺅 소리를 질렀다.
여기저기 헤맨 끝에 레이가 꼬치를 판매하는 부스를 찾아냈다.
워낙 저렴하게 꼬치를 판매하는지라 한 사람당 하나씩만 구매할 수 있었다.
레이가 꼬치를 하나 구매해 레아에게 주었다.
레아는 입 주변을 기름투성이로 만들며 행복한 얼굴로 꼬치를 우물거렸다.
"마시쩌!"
"천천히 먹어. 나중에 배 아프다고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레이가 레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 지미 패밀리의 일원이었던 꼬치 판매원이 물었다.
"하나 더 줄까?"
"괜찮아요. 뭐, 오늘은 고생 좀 해주세요. 문제 생기면 지미한테 얘기하고요."
"알겠어. 너도 고생해라."
애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중얼거린 꼬치 판매원이 다시 열심히 꼬치를 구웠다.
레이는 레아가 꼬치를 충분히 우물거릴 때까지 잠시 부스 앞에서 기다렸다.
헌데 마침 반가운 얼굴이 다가왔다.
"어머, 레이."
축제에 참가해 여기저기 둘러보던 리파가 눈웃음을 흘리며 레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뵙네요."
"아, 리파. 축제 구경하고 있었어?"
"네, 방금 화살 던지기라는 걸 하고 왔어요. 아쉽게도 상품은 얻지 못했지만요. 근데..."
레아를 내려본 리파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혹시 이 아이가 레아인가요?"
"응."
"정말 많이 컸네요!"
아직 말도 못할 때 레아를 한 번 봤던 리파다.
리파가 호들갑을 떨고 있자니 레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안녕? 옛날에도 귀여웠는데 더 귀여워졌구나!"
리파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레아가 외쳤다.
"언니도 예뻐. 예쁜 언니!"
"오늘 치장하고 나온 보람이 있네."
손수건을 꺼낸 리파가 레아의 입을 닦아주며 기분 좋게 웃었다.
레아는 초면과 다를 바 없는 리파와 낯을 가리지 않고 재잘재잘 떠들었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리파와 레아를 번갈아 바라본 레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슷한 처지끼리 통하는 게 있나보군.'
하늘을 바라본 레이가 흐뭇하게 웃었다.
칼, 거기선 잘 지켜보고 있나요?
카리우스 그 씹새끼는 지옥에 잘 도착했나요?
손을 한 번 흔들며 안부를 전한 레이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마침 리파가 레아에게 레이를 열심히 칭찬하고 있었다.
"너희 오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착한 사람인데?"
"...착해?"
"너희 오빠가 정말 많은 사람들을 구했어."
"오빠 나빠."
"그런 말 하면 못 써요."
오빠를 자랑스러워 해도 된다고 몇 번이나 당부한 리파가 레아를 놓아주었다.
레이는 리파에게 요새 디나르에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고선, 슬슬 가정을 꾸릴 때가 되지 않았냐고 농담과 진담을 반반씩 섞어 물었다.
리파는 조금 곤란해하며 적당히 웃어넘기곤 레이와 헤어졌다.
레아를 등에 태우고 멀어져 가는 레이를 보며 리파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레이는 매력적이고 능력 출중한 남자였으며, 리파 또한 레이에게 호감이 있었다.
허나 리파가 붙잡기엔 레이의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났다.
몇 번 호감을 표해도 봤지만 레이는 철벽을 쳤고 말이다.
슬슬 첫사랑을 향한 마음을 놓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리파가 회색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등을 돌렸다.
이제는 흐릿해서 잘 떠오르지 않는 아버지의 얼굴이 오늘따라 좀 그리웠다.
*
레이는 레아를 목 위에 태운 채 머리카락 한참 쥐어뜯긴 후에 벨라를 만났다.
레아를 다시 벨라에게 인도한 레이는 곧 젠킨슨과 만났다.
레이가 잠시 젠킨슨과 함께 나무 밑동에 걸터앉았다.
"마스터, 축제에 수상한 사람은 못 보셨나요?"
"수상한 놈이야 많지."
축제를 연다고 하니 멀리서도 구경꾼이나 상인이 좀 찾아왔다.
그들 중 불순한 의도를 지닌 방문자가 없을 수는 없었다.
미네르처럼 권력자가 보낸 탐색꾼 또한 존재할 터다.
"그래도 아직은 조용하더구나."
축제의 말미쯤 모하메드가 직접 나서서 검강을 뽑아내 표적을 베어내는 이벤트가 계획되어 있다.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올랐음을 만인에게 증명하는 것이다.
다른 귀족이 보낸 탐색꾼들은 직접 그 이벤트를 확인하고 필립스 백작령 내에 그래듀에이트가 출현한 것이 거짓이 아님을 보고할 터다.
"그쯤하고 알아서 돌아가겠죠."
그래듀에이트가 존재하는 영지에 어쭙잖은 수작을 부렸다가 들키면 망신이었다.
이미 마티아스 후작이 망신을 당하지 않았는가.
젠킨슨도 레이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들었겠지만, 모하메드 경이 황도에 들러야 한다."
"음..."
제국의 수도, 드라노폴리스.
드라노폴리스라는 이름보다는 황도나 제도라 칭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듀에이트가 되면 다 들러야 합니까?"
"권세 있는 가문의 사람일 경우 황실에 보고만 올리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안 된다는 거군요."
"한미한 가문의 기사가 소드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닿는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잖느냐."
새롭게 경지를 개척한 기사가 황실에 직접 찾아가 황제나 황제의 대리인 앞에서 경지를 증명하고 제국에 충성할 것을 다시 맹세한다.
그게 일련의 과정이었다.
복잡한 일은 아니었지만, 황도를 왔다갔다 하는 과정에서 영입 전쟁이 벌어진다.
황실, 그리고 권세 있는 귀족 가문들.
그들은 기사에게 주인을 바꿀 것을 종용하며, 기사의 실력과 잠재성에 따라 재화나 영지, 혹은 계승 가능한 작위까지 보상으로 제시한다.
"물론 기사가 본래 모시던 주인과 가문에게도 막대한 재화를 대가로 건네지."
그리하여 어디까지나 모두의 합의 아래 소속을 옮기는 것이다.
그러니 기사가 충성할 주인을 바꾼다고 해도 특별히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뭐, 저희랑 관계 있는 얘기는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필립스 백작은 모하메드를 신뢰하고 아꼈으며, 모하메드는 백작에게 충성하며 오랜 시간 스스로 경지를 숨겼다.
남들이 이간질한다고 끊어질 얄팍한 관계가 결코 아니었다.
"근데 레이, 황도에 들릴 때 아이들을 동행시키고 싶다고?"
"네, 좀 더 넓은 세상을 구경시켜주고 싶네요."
시야를 넓혀주고 싶었다.
야망과 향상심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그래야 발전하기 위해 더욱 발버둥칠 테니.
레이는 아직 어리고 재능 좀 있는 아이들을 대부분 챙겨갈 생각이었다.
물론 젠킨슨으로선 걱정이 좀 됐다.
"헛바람만 들지 않겠냐?"
"제가 잘 다독여야죠. 주먹으로 두들겨서라도."
"하하."
젠킨슨은 묘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뛰어난 아이들을 기껏 가르쳐 놓았더니 다들 자기 재능 찾아 필립스 백작령을 떠나버리면 어떡하나, 그게 걱정됐다.
젠킨슨의 마음을 읽은 레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가둬놓을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은혜를 아는 아이들이에요."
"그래도 필립스 백작령을 위해 남아주었으면 한다. 너무 탐욕적이냐?"
"아니요. 마스터께선 필립스 백작가의 기사님이지 않습니까. 마스터께선 당연히 그리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세요. 저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끔찍한 소리를 하는군."
가볍게 웃은 젠킨슨이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 마티아스 후작가에서 받은 보상금으로 백작님께서 군마 세 필을 구하셨다."
"아하..."
군마 두 필 날려 먹은 걸 상기한 레이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젠킨슨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모하메드 경과 지미에게 한 필씩 하사하실 것이다."
지미가 그정도의 대접을 받는 건 당연했다. 물론 다른 기사들 입장에선 입이 좀 쓰긴 하겠지만 말이다.
"마지막 한 필은 기사들끼리 대련을 해서 우승하는 자에게 하사하시기로 했다."
"힘내시길 바랍니다, 마스터."
젠킨슨의 실력은 대단했지만 필립스 백작가의 다른 기사들 또한 역량이 출중했다.
젠킨슨이 우세는 점할 수 있다고 해도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상대는 없었다.
그러니 젠킨슨이 우승해서 군마를 하사받기 위해선 운이 좀 따라야 했다.
"레이."
"네, 마스터."
"약속을 이행할 때다."
"...?"
"검 빌려다오."
잠깐 얼을 탄 레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기사로서의 긍지 같은 건 어디다 팔아먹으셨습니까?"
축제와 함께하는 이벤트성 매치를 사기템 들고 찐텐으로 들이박겠다는 젠킨슨의 의지에 레이가 혀를 내둘렀다.
"좀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좋은 장비를 준비하는 것도 기사의 능력이다. 그리고 나는 군마를 얻어야겠다."
"나이가 드실 수록 치사해 지는군요, 마스터."
어쨌든 빌려주기로 했던 거니 빌려주긴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