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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42화 (142/446)

142화

이 새끼가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마티아스 후작의 심정을 요약한 한마디였다.

이번 일은 분명 항의할만한 사안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필립스 백작의 태도가 너무 강경했다.

힘 없는 게 죄라고, 권세 높은 가문 앞에서 목을 빳빳이 세워봤자 손해 보는 건 필립스 백작이었다.

마티아스 후작은 당황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마음 같아선 직접 필립스 백작가에 쳐들어가 깽판을 치고 싶었지만 마티아스 후작은 능력을 인정 받은 귀족가의 수장답게 물건 몇 개를 때려 부숨으로써 안정을 되찾았다.

"..."

화를 가라앉히고 나니 의구심이 찾아왔다.

미네르를 대체 어떻게 탐색하고 추적해 죽였는가?

미네르는 실력이 뛰어난 샤프슈터였고, 좋게 말해 신중했으며 나쁘게 말하면 겁이 많았다.

어쭙잖게 설치다가 기사들에게 포위당할 엘프는 아니었다.

근데 대체 어쩌다가 귀만 잘려 돌아왔는가.

마티아스 후작은 고민에 빠진 채 일단 답신을 썼다.

오해가 좀 있었던 모양인데 화 풀어라, 뭐 그런 내용이었다.

물론 적반하장 식으로 증거 있냐, 지금 싸움 거는 거냐, 누구 사주 받고 이러냐고 따지고 들 수도 있었다.

허나 요새 정세가 민감했기에 괜히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았던 마티아스 후작은 한 발자국 양보하기로 마음 먹었다.

"..."

답신을 작성한 마티아스 후작은 다시 열불이 나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 던졌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고 손해도 적지 않았다.

화해의 손길을 내민 이상 재화도 몇 푼 쥐여줘야 하니 속이 끓었다.

마티아스 후작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이성을 최대한 끌어올려 가문 인장을 답신에 찍었다.

*

클레멘스는 필립스 백작령에서 꽤 만족하며 지내고 있었다.

상인으로 활동하며 얻었던 지식과 노하우를 되새기며 책으로 정리하는 일은 꽤 즐거웠다.

필립스 백작이 레이를 믿고 클레멘스에게 실무를 몇 개 맡겨 주었기에 가시적인 성과 또한 거둘 수 있었다.

외출이 제한되는 걸 제외하면 대접도 꽤 좋았던지라 하루하루를 나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클레멘스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복도를 걸었다.

얼마 전 레이를 만났을 때 살이 쪘다고 한소리 들었던 탓에 몸 관리에 유념하고 있었다.

헌데 지팡이 짚고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복도 끝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쿵! 쿵!

소리가 계속 가까워졌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클레멘스가 제자리서 기다리고 있자, 이내 복도 끝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수려한 외모를 지닌 엘프였다.

근데 가만히 보니 귀가 하나 잘려나가고 없었다.

복도로 들어선 엘프는 클레멘스를 향해 걸어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꿔 비틀거리다 벽에 머리를 쿵 박았다.

쿵!

"악!"

머리를 싸매고 뒷걸음질 친 엘프가 이번엔 반대쪽 벽으로 가 머리를 쿵 박았다.

쿵!!

"아악!!"

이마를 꽤 세게 부딪친 탓에 발라당 엎어지는 엘프를 보며 클레멘스는 생각했다.

'병신이 하나 더 늘었군...'

방향 감각이 어딘가 잘못된 건지 엘프는 바닥에 쓰러진 채 쉽사리 일어서지 못하고 복도를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클레멘스가 병신 엘프를 향해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사이 레이가 나타났다.

"어, 클레멘스."

"안녕하십니까."

"갈수록 얼굴이 피는 걸 보니까 지내기는 괜찮은가 봐?"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클레멘스와 악수를 한 레이가 여전히 쿵쿵 거리는 엘프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클레멘스, 귀 없는 귀쟁이가 왜 없는 줄 알아?"

"...글쎄요?"

"야생에서 다 도태됐거든."

쿵!! 쨍그랑!!

"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복도의 탁자 위에 놓여있던 꽃병이 깨져 나갔다.

혀를 끌끌 찬 레이가 중얼거렸다.

"귀쟁이를 귀쟁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었네. 몸뚱이가 아니라 귀가 본체였어."

귀 하나만 잘라내도 저 꼴인데 두 개 다 잘라냈으면 땅을 기어 다니며 제자리를 빙빙 돌았을 게 틀림없었다.

레이는 미네르를 복도에 방치한 채 클레멘스와 방으로 향했다.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 겁니까?"

"냅둬. 금방 적응할 거야."

귀를 두 개 다 잘랐으면 모를까, 하나만 잘라냈으니 뒤틀린 균형 감각에 적응만 하면 일상생활까지는 가능할 터다.

'저 정도면 많이 봐준 거지.'

아무리 미네르가 레시나의 후손이라 해도 엑스퍼트 급 기사까지 기만 가능한 샤프슈터를 멀쩡히 활개치고 다니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귀 하나를 잘라내는 건 최소한의 조치였다.

'결손된 귀가 영원히 복구는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엘프의 귀는 인간의 귀보다 훨씬 복잡한 기관이고 신성력의 효력이 잘 듣지 않는 엘프의 특성상 복구하는데 많은 시일이 소모되겠지만 어쨌든 영영 불구가 되는 건 아니었다.

"뭐, 클레멘스 네가 잘 지내는 것 같으니 다행이고..."

방에 들어가 클레멘스와 마주 앉은 레이가 열려 있는 문 너머로 복도를 바라봤다.

미네르는 여전히 벽과 바닥에 몸을 가져다 박으며 물건을 부수고 있었다.

단단한 과일을 손에 잡은 레이가 신경질적으로 미네르에게 던졌다.

퍽!

"악!!"

"야, 그만 자빠지고 기어서라도 일로 와 봐."

미네르가 세상 서러운 표정으로 바닥을 기어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서 있을 때보단 훨씬 방향과 균형이 잘 잡혔다.

기어가니까 편하네, 이딴 생각을 하던 미네르가 자기 처지를 상기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비열하고 잔혹한 인가안..."

'저게 아직도 주제 파악이 덜 됐네.'

서럽게 징징거리는 모습이 어쩐지 옛날 알레시아를 떠올리게 했다.

'못 배운 천민'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때의 알레시아 말이다.

그래도 그때의 알레시아는 나이가 어려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지, 나이를 150 처먹은 엘프가 저러고 있으니 보기 참 깝깝했다.

"엘프는 다 저렇게 철이 없나..."

레이가 중얼거리다 말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프텔이 눈을 번뜩이며 레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

침묵하던 아프텔이 모습을 감췄다.

"저저 동족이라고 편들어주는 거 봐."

인간 썰어 재낄 때는 한마디도 안 하더니.

혀를 끌끌 찬 레이가 사과를 씹어먹었다.

그 사이 간신히 방에 도착한 미네르가 의자 위로 기어 올라와 엉덩이를 붙였다.

꼴에 엘프라고 그 난리를 치고도 의자에 가만히 앉은 모습을 보니 그럭저럭 봐줄만 했다.

"야, 미네르."

"...네."

"그림 그려볼래?"

"왜요...?"

"거장의 풍모가 느껴져서."

앞뒤 없는 레이의 헛소리에 미네르가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클레멘스를 돌아보았다.

"너도 시간 남으면 그림 좀 그려봐. 예술 좋잖아, 예술."

"하하, 이 몸으로 예술은 무슨 예술입니까."

"무슨 말이 그래. 창작은 고통에서 나오는 법인데."

"그런 격언은 처음 들어보는데... 그럴듯하군요."

"클레멘스, 나중에 굳은 몸뚱이로 누워서 신세 한탄만 할 게 아니라면 몰입할 취미가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겠어?"

레이의 의도를 이해한 클레멘스가 잠시 정색했다.

굳어가는 오른쪽 허벅지를 쓰다듬어본 클레멘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참 사려 깊으시군요."

비꼬는 게 아닌 순수한 감탄이었다.

전생의 기억이 있는 레이는 이 세계의 사람들보다 정신 건강을 비교적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게 꽤 깊은 배려로 느껴졌기에 클레멘스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건 고민해보겠습니다."

"필요한 도구나 서적 있으면 말하고. 그 정도는 지원할 수 있도록 백작님께 말씀드려 놓을 게."

"네, 알겠습니다."

"그래."

레이는 클레멘스가 마음에 들었다.

클레멘스는 적어도 겉으로는 항상 감사를 표하고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는 인간이었다.

상인답게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드러내지만 않으면 상관 없었다.

그에 반해 미네르는 눈빛부터가 대놓고 불순했다.

레이가 먹던 사과를 신경질적으로 미네르에게 던졌다.

퍽!

"아악!"

"그 눈빛 좀 어떻게 하지?"

"씨이..."

"...서로 인사나 해. 여기서 생활하다 보면 간간이 마주칠 거야."

"안녕하세요, 클레멘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클레멘스가 먼저 손을 내밀자 미네르가 마지 못 해 그 손을 맞잡았다.

그 모습을 보며 레이가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미네르에겐 레시나에 관해 알려주지 않았다.

미네르를 전혀 신뢰할 수도 없었고, 또한 미네르가 레시나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역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면 진짜 짐덩이만 백작가에 하나 늘어나는 셈인데, 이 철 없는 엘프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레이는 괜히 골치가 아팠다.

*

루나의 고위 마법에 직격 당해 무너져 내린 산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빠르게 산을 복구해야 소문 퍼지는 것도 억제하고 나중에 책 잡힐 일도 줄일 수 있었다.

때문에 루나는 주기적으로 레이와 함께 시그니 산맥으로 가서 매지컬 노가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오늘도 로필렌과 레이와 시그니 산맥의 초입에 도착한 루나는 지면에 마법진을 그려나갔다.

레이가 루나의 뒤를 따라다니며 핀잔했다.

"루나, 이런 고화력 마법을 함부로 쓰면 안 돼."

"..."

루나도 할 말은 있었다.

당시 레이는 미네르에게 무력하게 납치당했다.

단편적인 상황을 보았을 때, 레이 정도의 강자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미네르는 분명 위협적인 적이었다.

때문에 루나는 변수를 줄이기 위해 곧장 전개 가능했던 가장 강력한 마법을 미네르의 머리 위에 퍼부었다.

그러니 이 사달이 난 첫 번째 원인은 루나가 아닌 레이였다.

"..."

루나의 뺨이 슬그머니 부풀어 올랐다.

레이가 낄낄거리며 빵빵하게 부푼 루나의 볼을 잡아당겼다.

이제는 제법 여인 태가 나는 루나였지만 레이에겐 여전히 귀여운 소녀처럼 느껴졌다.

루나의 볼에서 바람을 뺀 레이가 미리 준비한 상자를 꺼냈다.

"오시리스 백작령에 갔을 때 장신구가 싸게 나와서 나눠주려고 잔뜩 사왔어."

혹시 오해하지 말라고 미리 선을 그은 레이가 상자를 열어 머리 장신구를 보여주었다.

레이가 상자를 내밀자 루나는 멀뚱히 레이의 눈을 바라봤다.

루나의 의도를 이해한 레이는 눈썹을 한 번 추켜올리곤 머리 장신구를 꺼내 들었다.

제대로 매달 줄을 몰라 이리저리 헤매던 레이가 간신히 루나의 옆 머리에 장신구를 고정시켰다.

어설픈 손길이었지만 루나는 만족한듯 미소를 머금었다.

"...고마워요."

"음... 가서 카렌한테 다시 해달라고 해야겠다."

아쉬워 한 레이가 영주성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슬슬 마을로 내려가 봐야 했다.

오늘은 필립스 백작령에 축제가 있었다.

필립스 백작의 충직한 기사이자 소드 엑스퍼트였던 모하메드가 얼마 전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을 축하하는 축제였다.

물론 모하메드가 그래듀에이트의 경지를 개척한 건 한참 전이었다.

그걸 그대로 밝혔다간 황실의 분노를 감당해야 하니, 이렇게 눈속임을 하는 거였다.

눈속임이라 해도 축제는 축제였고, 필립스 백작이 축제를 위한 물자를 지원해 주었기에 다들 들떠 있었다.

'황도에도 한 번 들려야 한다고...'

입을 삐죽 내밀어 본 레이가 루나를 돌아봤다.

"그만 가자, 루나."

"네."

레이의 뒤를 루나가 졸졸 따랐고, 그 뒤를 로필렌이 따라 걸었다.

변방에 위치한 필립스 백작령에서 자주 보기 힘든 이벤트니 산 좀 메우겠다고 축제를 즐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축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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