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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41화 (141/446)

141화

리실로테가 남긴 데이터들 중에선 아프텔이 접근 불가능한 데이터도 존재했다.

오직 리실로테 본인만이 열람 가능한, 이제는 영원히 빛을 볼 일 없었던 데이터들.

그중 일부가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며 해금됐다.

해금 조건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해금을 위한 마지막 키워드가 '레시나'였음은 분명했다.

레이가 '레시나'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잠금이 풀렸으니까.

아프텔은 해금된 데이터를 통해 자신의 베이스 인격이 레시나였음을 알게 됐다.

또한 아직 해금되지 않은 데이터의 정체가 무엇이며, 리실로테가 부여한 숨겨진 임무가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레이는 그 정보를 아프텔에게 전해 듣고 백작 앞에 섰다.

"영락할 동료를 위해 준비한 리실로테의 안배가 존재해요."

과거를 잃어갈 너에게, 언젠가 바보가 되어 홀로 남아 사그라질 너에게.

기적을 믿지 않는 대마법사가 먼 훗날의 기적을 바라며 준비한 마지막 선물.

"..."

레이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백작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리실로테는 다른 영웅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해지네."

"뭐, 그래도 한때 동료였지 않습니까.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보죠."

"그래, 그랬던 것 같군."

고개를 끄덕인 백작이 무너져 내린 산에 시선을 둔 채 복잡한 감정을 내비쳤다.

"...그대는 가끔 내게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고는 해."

백작은 그저 선조로부터 이어져 온 맹약을 지키기 위해 티티를 보호하고 있을 뿐이었다.

백작은 티티를 위해 무언가를 더 희생하고 싶지도 않았고, 티티란 짐짝을 알레시아에게 물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한숨을 삼킨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 말에 의하면 결국 리실로테가 남긴 안배라는 것도 저주를 풀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과거의 영웅들도 못 했던 일이네."

"그러게요."

레이가 미간을 매만졌다.

티티를 잠식하고 있는 저주를 상기할 때면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 세계수의 저주란 것만 풀 수 있다면 백작령도 안정될 테고 울트의 타락 같은 문제도 한꺼번에 해결됐다.

600년이나 지났으니 그만 레시나를 용서하고 저주 좀 거둬가도 될 텐데, 아무래도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세계수 그거 그냥 태워버리면 안 되나요?"

레이의 헛소리에 백작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세계수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는가?"

"그냥 큰 나무 아닙니까."

"하하하..."

백작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백작은 레이가 무지해서 저런 무식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레이는 예나 지금이나 발상이 대범했고, 그 발상을 이행할 행동력 또한 있었다.

허나 세계수를 태우는 건 해서도 안 됐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게."

"다른 방법이요..."

웃고 마는 백작의 곁에서 레이는 자기 혼자 툴툴 댔다.

레시나가 죄를 저질렀다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다고 이렇게 괴롭히는가.

레시나의 죄는 '게네시스'를 멋대로 가져가 세상을 구하는 데 사용한 죄밖에 없었다.

'그게 그렇게 중죄야? 6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통에 시달리게 할 만큼?'

레시나의 행위를 전생의 지구에 빗대보자면, 미국 본토 방위를 위해 배치된 시울프급 핵잠수함을 미국 군인이 멋대로 탈취해 사용한 격이었다.

'...세계수가 지랄할만한 것 같기도 하고?'

눈을 깜박이고 있는 레이에게 백작이 물었다.

"영지에 침입한 엘프의 심문은 아직 진행 중인가?"

"아, 캐낼 수 있는 건 다 캐냈습니다."

"...빠르군."

백작은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때까지 며칠은 소요되리라 예상했다.

사람의 정신력을 깎아내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제대로 된 기사를 상대로 심문을 진행했다면 분명 보름도 모자랐겠지만, 상대는 엄마 찾는 엘프였다.

귀 없는 귀쟁이로 만들겠다고 겁을 주니 곧장 징징대던 엘프를 떠올린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심문받는 상황에 전혀 대비된 것 같지가 않았어요. 금세 질질 짜면서 아는 걸 몽땅 불더라고요"

"그게 기만일 가능성은 없다고 보나?"

"음..."

레이는 마지막으로 고민했다.

엘프, 미네르는 실력이 뛰어난 샤프슈터였고,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기사라도 그녀의 기척을 감지하기 힘들었다.

실력은 분명 뛰어났지만, 도리어 실력이 뛰어났기에 미네르는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직접적인 위협을 받은 경우가 거의 없었을 터다.

이제까지 두리번거리는 적을 상대로 원거리에서 일방적인 공격만 가했을 테니 실력에 비해 멘탈이 말랑말랑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기만처럼 느껴지진 않았어요. 걱정되신다면 엘프를 직접 살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리하지.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전부 확보했다면 엘프는 처형해야겠군."

백작이 덤덤하게 말했다.

백작령에 멋대로 침입한 것도 모자라 영주민에게 선공을 가한 엘프에게 관용을 베풀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명백히 중죄를 범한 범죄자였다.

엘프가 애새끼처럼 엄마아빠를 찾는다 해도 동정의 여지는 없었다.

"그... 백작님."

레이가 멋쩍어하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백작님께서 알아야 하실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

*

레이는 영주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작에게 미네르를 심문해서 얻은 정보를 보고했다.

미네르의 고용주는 마티아스 후작.

요하나를 회유해 영입할 목적으로 미네르를 파견.

미네르가 맡은 임무는 필립스 백작령의 전반적인 조사와 요하나의 인간관계 파악.

미네르를 지원하기 위한 인력은 존재하지만 필립스 백작령에 직접 잠입한 건 미네르 하나.

"요약하자면 이 정도네요."

마티아스 후작이 아주 질 나쁜 수작을 부린 건 아니었다.

필립스 백작령에 직접적인 해를 끼치라 명령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인재 영입을 위한 사전 조사 목적으로 미네르를 보낸 것이니까.

허나 수작을 부릴 거면 들켜서는 안 됐다.

더군다나 미네르는 자기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매튜를 살해하려 했다.

미네르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벌인 일이라지만 마티아스 후작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필립스 백작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음 같아선 백작령을 헤집고 다닌 엘프부터 처형하고 싶었는데, 일단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레이, 다시 한 번 말해보게."

"이번에 잡힌 엘프가 레시나의 직계 혈통인 것 같아요."

"확실한가?"

"아마도요."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미네르는 질질 짜면서 자기 인생살이가 어땠는지 늘어놓았다.

동정을 사기 위한 목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시작했겠지만 듣는 입장에선 지루한 신세 한탄이었다.

미네르가 얼마나 불운한 삶을 살았든 레이와 백작은 눈도 깜박 안 했을 것이다.

허나 미네르의 혈통이 문제가 됐다.

"그러니까... 레시나의 증손녀 같아요. 그 엘프가."

미네르는 자기 혈통 탓에 동족에게 멸시와 차별을 받아야 했다고 눈물을 짜냈다.

나중 가서는 자기가 그래도 인간 세상을 구한 엘프 영웅의 후손인데 자비를 좀 베풀어달라고 징징거렸다.

다른 귀족가를 찾아가 그딴 소리를 했으면 귓등으로도 안 들었을 터다.

하지만 이곳은 필립스 백작령이었다. 미네르에겐 대단한 행운이었다.

필립스 백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레시나를 수호하라는 선대의 맹약을 지키기 위해 이제껏 노력해왔던 필립스 백작이다.

맹약에서 보호해야 할 대상은 레시나 하나였지만, 레시나의 몇 안 되는 직계 후손을 직접 처형하는 건 백작에게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네르를 살려서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보고 들은 게 너무 많았다.

미네르만 어찌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미네르가 귀환하지 못했다는 건 필립스 백작가에 미네르를 추격해 제압할 만한 고위 전력이 머물고 있다는 뜻이 된다.

소문이 한 번 퍼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터다.

필립스 백작이 어쭙잖은 변명 늘어놓으며 진실을 숨기려 하면 도리어 감시의 시선이 늘어날 터다.

"곤란하게 됐군."

젠킨슨과 디디에가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 필립스 백작은 한동안 숨을 죽이고 조용히 지낼 예정이었다.

헌데 미네르를 붙잡은 탓에 계획을 완전히 바꿔야 하게 생겼다.

'책잡히기 전에 모하메드를 빠르게 황도로 보내야...'

작위와 영지를 지닌 귀족이 군사를 고용할 때는 반드시 황실에 보고해야 한다.

물론 이건 사문화된 법령에 가까웠다.

일반병과 엑스퍼트 급 기사까지는 몇 명을 거둔다고 해도 황실에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었다.

허나 그래듀에이트 급은 아니었다.

그래듀에이트 급 정도 되면 말 그대로 일인 군단이었다.

이때부터는 황실에 무조건 보고해야 했다.

휘하에 있는 엑스퍼트 급 기사가 다음 경지를 내디뎠다면 마찬가지로 반드시 보고해야 했다.

이 보고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문제가 커졌다.

물론 모하메드가 그래듀에이트의 경지에 든 건 한참 전이었지만, 경지가 오른 시점까지 다른 이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제까지 숨겨왔던 그래듀에이트의 출현을 알림으로서 의심을 거두어야 했다.

과거보다 훨씬 강도 높은 경계와 관심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백작은 그런 고민을 거듭하며 감금실로 향했다.

방음 결계를 넘어가자 곧바로 엘프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잘못 했어요, 살려 주세요, 흐허헝..."

질질 짜는 것 하나만큼은 맛깔나게 할 줄 아는 미네르였다.

미네르의 눈가는 하도 눈물을 흘린 탓에 퉁퉁 불어 있었다.

추하기 짝이 없는 미네르의 몰골을 보고 백작은 미네르의 진술을 믿어보기로 했다.

"백작님, 오셨습니까."

젠킨슨이 백작을 향해 예를 갖췄다.

"심문 내용은 정리하고 보고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사, 살려주세요!"

미네르가 백작을 알아보고 외쳤다.

"제, 제가 잘못했어요. 아는 거 전부 말씀드렸어요. 살려만 주세요. 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못 봤어요!"

저게 영웅의 후예가 부릴 추태란 말인가.

감정이 더욱 복잡해진 백작이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떴다.

"레이."

"예, 백작님. 하명해주십시오."

"저거 귀부터 좀 자르게."

"알겠습니다."

대화를 따라잡지 못한 미네르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다가, 레이가 검을 들고 다가오자 그제야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악!!!"

*

마티아스 후작은 집무실에 앉아서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필립스 백작가에서 난데 없이 선물이 포장된 상자와 함께 서신을 보내왔다.

필립스 백작령에 탐색꾼을 보낸 지 얼마 안 되어 이런 게 도착하니, 후작은 직감적으로 일이 꼬였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안전을 위해 상자를 먼저 열어 확인한 마법사와 기사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상자의 내용물이 보석은 아닌 것은 확실했다.

마티아스 후작이 천천히 상자를 열어보았다.

이내 마티아스 후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자 안에 든 건 잘려나간 엘프 귀였다.

"..."

욕지거리를 억지로 삼킨 마티아스 후작이 필립스 백작이 보낸 서신을 펼쳤다.

귀족의 예법을 칼 같이 따르며 작성된 서신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선 넘지 마라.

"이놈이 뭘 잘못 처먹었군."

마티아스 후작이 체통도 잠시 잊고 중얼거렸다.

축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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