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날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요?"
여자의 물음에 마법사가 아티펙트를 만지작거리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너도 나 싫어하잖아?"
"싫어하죠. 애초에 당신이 정 떨어지는 행동을 자주 했잖아요."
"니들이 한 병신 짓은 생각 안 하고?"
"필요한 일이었어요."
"내 앞에선 잘난 듯이 굴었지만, 너희들은 죄다 병신이었어."
마법사가 은폐해놓았던 서클을 하나씩 활성화시키며 중얼거렸다.
"그러니 그놈도 그렇게 뒈졌고 너도 지금 그 꼴이지."
킥킥거리던 마법사가 이내 평소처럼 표정을 지웠다.
여자는 점점 더 숫자를 불려 가며 회전하는 서클을 바라보다 착잡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의미가 있나요? 이런 짓이."
"의미 없어."
마법사는 단언했다.
지금 하는 짓거리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선 기적이 몇 번이고 필요했고, 마법사는 본디 기적에 기대는 족속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작디 작디 작은 우연이 겹치고 겹쳐.
먼 미래에 네가 나의 후예에 닿는다면.
"...그리 된다면 꼭 전해주렴."
내가 남긴 지식으로 날 뛰어넘어.
내가 닿지 못했던 별의 힘을 움켜쥐고.
"반드시 ...를 죽여버리라고."
*
귀쟁이의 심문 시간이 다가왔다.
귀쟁이의 공범이 있다면 수작을 또 부릴 수가 있으니 빠르게 심문을 끝내야 했다.
용병 시절 간간이 이런 일을 해야 했던 지미가 심문을 맡고, 레이와 젠킨슨이 지미를 돕기로 했다.
레이가 감금실로 가며 물었다.
"엘프는 약점이 어디예요?"
급소, 혹은 문화적으로 중시하는 신체 부위.
그리고 엘프에겐 둘 모두 해당되는 기관이 하나 있었다.
지미가 자기 귀를 잡아당기며 답했다.
"여기야."
엘프의 귀는 대단히 섬세하고 복잡하며 민감한 기관이었고, 덕분에 엘프는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감지 능력을 지닐 수 있었다.
엘프의 귀가 일종의 레이더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레이가 자기 귀를 만지작거리다 흠칫 놀랐다.
"그러니까 성감대라는거군요."
"너 요즘 뭐 발정기 왔냐?"
"제가 아주 말 안 되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감각이 민감한 기관이면 결국 그쪽 역할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뭐 그딴 소리를 하는 레이를 보고 지미가 미간을 잡았다.
"그리 궁금하면 직접 가서 한번 핥아봐라."
"에이, 농담입니다, 농담."
복도를 걸어가는 남은 시간 동안 지미, 레이, 그리고 젠킨슨은 간단하게 심문 방법을 논의했다.
"지미와 제가 나쁜 역할을 맡을게요."
"그럼 나는 뭘 하라는 거냐?"
"지미와 제가 열심히 겁을 주면 마스터께서 기사답게 우리를 말리는 척하며 엘프의 마음을 얻는 거죠."
"...괜찮은 방법이군."
쑥덕대며 작당 모의를 한 셋은 감금실 앞에 도착해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지미가 가장 앞서서 감금실 문을 쾅 열고 들어간 후 엘프 주변을 감싼 방음 결계를 통과하며 외쳤다.
"어이, 귀쟁아!"
꽤나 껄렁껄렁한 태도였다.
그렇게 심문이 시작됐다. 허나 엘프는 지미와 레이의 압박에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미네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필립스 백작령을 헤집고 다녔다가 두 눈으로 본 게 너무 많았다.
여기서 입을 다물어도 죽을 터였고, 입을 열면 더 빨리 죽을 터였다.
미네르는 자기 이름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지미는 심문이 쉽지 않으리라는 판단에 망치를 꺼내 들었고, 레이는 단검을 뽑아들었다.
레이가 엘프 뒤로 다가가 날카롭게 빛나는 단검을 귀 위에 가져다 댔다.
"이봐, 귀쟁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귀 없는 귀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수가 있어."
레이의 말을 듣고 지미가 껄껄 웃었다.
귀 없는 귀쟁이라니.
미네르는 모멸과 공포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순간 레이가 단검을 재빠르게 휘둘렀다.
촤악!!!
거친 바람 소리가 미네르의 귓가를 헤집고 지나갔다.
식겁한 미네르가 하얗게 질린 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꺽꺽댔다.
허나 잘려나간 귀가 바닥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레이의 단검은 귀를 얇게 스쳤을 뿐이었다.
단검이 만들어낸 작은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잔뜩 오그라든 엘프의 모습을 보며 레이와 지미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뒤늦게 자기 귀가 무사한 것을 알아챈 엘프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 이 악마 같은 인간놈들...!!!"
엘프의 눈동자에 가득 맺혔던 눈물이 결국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엘프답게 수려한 외모를 지닌 미네르가 서럽게 우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감정을 움직이기 충분했다.
허나 상대가 안 좋았다.
지미와 젠킨슨은 분명 선인이었지만 일의 우선순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인간들이었다.
영지에 해가 될 엘프의 눈물 따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레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레이는 엘프가 울자 머뭇거리긴커녕 도리어 신나하며 낄낄거리는 흉내를 냈다.
그 악독한 레이의 모습에 미네르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흐윽! 흐읍! 흐허어엉...!"
무섭고 고독했다.
미네르는 여기서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세계수에게 저주받아 쫓겨난 하이엘프의 직계 혈통이었던 미네르는 살아가며 동족들의 은근한 멸시와 차별을 받아야 했다.
그게 싫어서 인간들의 제국으로 떠났다.
자기 실력이면 그래도 인간들 사이에서 힘 좀 주고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실제로 권세 높은 귀족 가문에 고용되어 나름대로 대접 받고 생활하기도 했다.
헌데 간단하리라 여긴 임무를 수행하다 괴물 같은 놈들에게 붙잡혔고, 이제는 명예를 능욕당하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춥지도 않은데 몸이 벌벌 떨렸다.
정을 떼었다고 여겼던 고향과 가족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어, 엄마...!! 나 집에 갈래, 흐어엉...!"
'흠...?'
레이는 조금 당황했다.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 무장된 군인을 상정하고 감금실로 들어왔는데 엘프의 멘탈 나가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리 되면 굳이 복잡하게 굿 캅 배드 캅 작전을 쓰며 마음을 흔들 필요가 없어 보였다.
'...한 번 잘라볼까?'
중성화한 고양이처럼 귀를 절반 잘라내기만 해도 아는 거 모르는 거 다 토해내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단검을 매만지고 있는데 누군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
레이가 고개를 들어 사람 형상을 취한 빛 무리를 바라봤다. 아프텔이었다.
아프텔은 아주 떫어 보이는 표정으로 레이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아프텔의 저런 표정은 유물을 부수겠다고 따지고 들었을 때나 한 번 보여준 표정이었다.
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또?"
[마스터.]
아프텔이 레이와 엘프를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마스터께선 종족차별주의자이십니까? 귀쟁이 같은 종족차별적인 멸칭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
저 AI가 어디 고장이 났나.
레이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벌렸다.
허나 레이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프텔은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엘프에게 귀는 소중한 기관입니다. 함부로 손대지 마시지요. 마스터는 야만인입니까? 어찌 그리 야만적이고 미개하게 구십니까?]
"아니, 대체..."
아프텔에게 따지고 들려던 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문득, 과거 황실 마탑의 오벨리스크에서 아프텔과 나누었던 대화가 머리를 스쳐갔다.
- 이봐. 너는... 아니, 널 만든 주인도 마법사 아니었나? 왜 그리 마법사를 싫어해?
- 제 현명한 주인님은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마법사가 심각한 성격 파탄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제 인격은 리실로테 님 본인이 아닌 제삼자의 인격을 베이스로 제작되었습니다.
- 제삼자가 누군데?
- 모릅니다.
"제삼자..."
아프텔의 반응을 보았을 때 아프텔의 베이스가 된 인물은 엘프다.
600년 전 대마법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엘프.
리실로테가 자신의 인격을 대신해 채택할 만큼 신뢰했던 엘프.
고민을 거듭한 끝에 레이는 한 가지 가능성에 닿았다.
"설마 네가... 네 인격의 원본이..."
젊은 시절 리실로테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는 엘프의 인격을 바라보며, 무심코 뒤로 한 발 물러선 레이가 탄식을 토했다.
리실로테가 굳이 자신의 인격을 복제하지 않고 타인의 인격을 담아둔 이유를 이제야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아프텔'의 베이스가 되는 인물이자, 대마법사 리실로테가 먼 미래에 누군가에게 다시 전하고자 했던 인격.
"네 원본이... 레시나였군."
600년 전 세상을 구하고도 세계수의 저주를 받아 영락한 영웅의 또 다른 잔재가, 여기 있었다.
*
시그니 산맥에 도착한 필립스 백작이 반쯤 내려앉은 산 하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고작 레이의 장난질로 인해 벌어진 사태라기엔 지나치게 시끄럽고 거대했다.
일단 산을 어설프게나마 복구해놓긴 해야 했다. 이런 최고위 마법의 실험 흔적쯤 되는 걸 방치해두면 두고두고 책잡히기 좋았다.
루나가 남긴 상흔을 한참 바라보던 백작이 중얼거렸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백작이 짜증 서린 얼굴로 레이를 돌아보았다가, 이내 수긍했다.
이 어마어마한 마법의 흔적을 보고 있으면 없잖아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마법사란 이만한 기적을 행할 수도 있는 건가..."
이게 바로 기사보다 마법사가 중하게 대접 받는 이유였다.
흔히들 엑스퍼트가 5서클 이하 마법사를 상대 가능하고, 그래듀에이트는 고위 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한다.
마법사가 전투를 대비하지 못했다면 이는 옳은 이야기다.
도리어 대비되지 않은 마법사는 기사에게 쉽사리 사냥당했다.
8서클 마법사라고 단숨에 8서클 마법을 전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간단한 종류의 8서클 마법이라 해도 제대로 전개하려면 몇 시간은 술식을 짜야 했다.
허나 막대한 재화와 시간만 있다면, 마법사는 술식을 미리 전개해서 준비해두는 것이 가능했다.
루나의 경우도 몇 주에서 몇 개월에 걸쳐 조금씩 아공간에 고정시키고 압축해놓은 에너지 덩어리를 이번 마법에 전부 소비했다.
이게 마법사와 기사의 차이였다.
기사에게 몇 개월의 시간을 제공해봤자 실력을 조금 갈고 닦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준비하긴 어려웠다.
고위 마법사에게 몇 개월의 시간이면, 고위 섬멸 마법 하나를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
나라 간 벌어지는 전쟁의 전술 전략의 중심에 항상 마법사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물론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존재한다면 이 균형이 다시 한 번 무너지긴 하지만, 인류 역사상 동시대에 다섯 이상의 마스터가 존재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필립스 백작은, 인간이 행했다기엔 너무도 초월적인 광경을 묵묵히 감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헌데 루나 그 아이가 이제 3서클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아무리 미리 준비했다고 해도 이만한 마법의 위력을 3서클이 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아무리 낮게 잡아도 7서클은 되어야겠지요."
"...레이."
"예."
"제어할 수 있겠는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나는 착하고... 위대한 마법사가 될 테니까요."
그건 레이의 변치 않는 믿음이었다.
무너져 내린 산을 담담하게 바라보던 레이가 본론을 꺼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레시나에 대해서입니다."
입에 담기 민감한 이름이 나오자 백작의 표정이 다시 한 번 굳었다.
만남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