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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등가의 소드마스터-139화 (139/446)

139화

"...?"

디나르 지역에 볼일이 있어 로필렌과 함께 방문했던 루나가 하늘 너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이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는데, 방향을 계산해보니 시그니 산맥으로 향하고 있었다.

루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레이는 몸이 다 낫지 않아 휴식이 필요했다.

요즘은 좀 쌩쌩해지긴 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근데 갑자기 빠른 속도로 시그니 산맥을 향하니 또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됐다.

가만히 있어봤자 어떤 일도 해결되지 않는다.

루나는 곧장 고위 정령 칼가를 실체화시켰다.

칼가의 거대한 몸뚱이 위에 올라탄 루나가 로필렌을 향해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잠깐 다녀올게요."

"응, 일 보고 와."

촤악!

고위 정령은 쉽사리 사람 하나를 태우고 하늘로 비상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을 보며 로필렌은 덤덤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

지미, 매튜, 그리고 기사들은 레이가 인질로 잡히자 매우 당황했다.

저 엘프 년이 사람 보는 눈도 참 지지리 없구나 싶었는데, 이번엔 레이가 헛짓거리를 시작했다.

지미, 매튜, 그리고 기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엘프로부터 한 발자국씩 물러섰다.

레이를 인질로 잡은 미네르는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자 도리어 조금 당황했다.

'정체가 뭐지?'

미네르가 의아한 눈빛으로 레이를 내려봤다.

대체 누구 자식이기에 그래듀에이트와 기사들마저 쉽사리 다가오지 못한단 말인가?

그때 레이가 지미를 향해 외쳤다.

"아버지!"

"...?"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이년을 베어버리십쇼!"

레이의 비장한 외침을 들은 지미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더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대꾸했다.

"아, 아들아...! 너를 잃을 수는 없다...!"

지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누가 보아도 사랑하는 자식을 잃을까 봐 걱정하고 분노하는 아비의 표정이었다.

지미가 가슴을 헤집는 고통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서 미네르는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거였군."

그래듀에이트가 애지중지하는 자식을 붙잡았으니 기사들이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것도 설명이 됐다.

기세등등해진 미네르가 단검을 레이 목에 더욱 가까이 들이대며 소리쳤다.

"허튼짓하면 네놈 아들을 다시는 못 볼 줄 알아라!"

생각보다 괜찮은 제안이었다.

순간 혹했던 지미가 정신을 차리고 연기를 계속했다.

"아, 알겠다. 무엇을 원하지?"

"말을 이쪽으로 보내라."

기사들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었지만 지금 와서 판을 깨기도 애매한 탓에 레이의 연극에 어울려주었다.

기사가 말 두 필을 미네르를 향해 보냈다.

미네르는 레이를 번쩍 들어 말 위에 올렸다.

잠시 고민한 미네르는 레이와 같은 말에 올라탄 후, 남은 말 한 마리는 베어버렸다.

다리를 베인 말이 울음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쫓아오지 마라."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한 미네르가 시그니 산맥을 향해 말을 몰았다.

먼지를 일으키고 사라지는 미네르를 보며 기사들이 착잡한 표정을 했다.

레이가 잡혀간 건 상관 없었지만 말이 다쳐버린 건 꽤나 아까웠다.

기사들이 타는 힘 좋은 말은 쉽사리 구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다.

기사들이 툴툴거리는 사이 매튜가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쫓아는 가봐야하지 않겠습니까?"

"따라가긴 해야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지원 가능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옳았다.

지미와 매튜, 기사들은 엘프와의 거리가 적당히 벌어졌다 싶을 때쯤 땅을 박찼다.

이 세계의 기사들이 말을 타는 이유는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서였지, 말보다 느려서가 결코 아니었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땅을 쿵쿵 찍으며 달려나갔다.

*

레이는 달리는 말 위에서 축 늘어진 채 고민했다.

대체 이 귀쟁이가 필립스 백작령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젠킨슨과 디디에가 깽판쳤던 일 때문에 다른 귀족 가문이 보낸 탐색꾼일 확률이 높아보이긴 했다.

'방심하고 있다가 지미에게 들켰나?'

엘프는 필립스 백작령에 그래듀에이트가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엑스퍼트 수준을 상정하고 은신을 펼쳤다면 지미에게 무조건 들킬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듣고, 일단 엘프를 포획한 후 뒤처리를 어찌할지 백작님과 상의 좀 해봐야겠네.'

레이는 말이 시그니 산맥에 도착하길 느긋하게 기다렸다.

기왕 인질까지 되어주었으니 성과를 좀 얻고 싶었지만, 엘프가 하는 짓을 보니 시그니 산맥에 도착하자마자 인질을 처분하려 들 게 빤히 보였다.

'뭐, 상관 없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인질극이 끝난다고 해도 레이는 아쉬울 게 없었다.

잠깐 인질 역할 즐긴 걸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약간 위험한 놀이긴 했지만, 레이는 납치범인 엘프를 비롯해 공범이 우르르 쏟아진다 해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레이의 생각은 대체로 옳았다.

다만 레이는 시그니 산맥으로 말을 타고 달렸다고 루나가 곧장 바람 정령을 활용해 쫓아올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레이와 미네르가 시그니 산맥 초입에 다다랐을 무렵.

머리 위에 잠깐 그림자가 생겼다가 사라지더니 굉음이 산을 울렸다.

쐐애애액!!!

이변을 눈치 챈 미네르가 반사적으로 말을 세웠다.

하늘에서부터 바람을 품은 강대한 기운이 낙하하고 있었다.

쿠웅!!

거대한 몸집을 지닌 고위 정령 칼가가 시그니 산맥 위에 착지했다.

칼가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대기가 갈라지며 주변의 나무들이 뿌리 째로 뽑혀 나가기 시작했다.

본신의 힘을 전부 끌어낸 고위 정령 칼가는 응축된 태풍과 같은 존재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고위정령의 출현에 미네르가 압도됐다.

미네르의 모든 신경이 칼가를 향해 쏠린 사이 늑대를 닮은 중급 정령이 은밀히 접근했다.

미네르는 뒤늦게 중급 정령의 존재를 눈치챘지만, 이미 늑대를 닮은 중급 정령은 레이를 입에 물고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다.

"쿠뮤."

인질을 잃었다.

미네르는 뒤늦게 자기 실책을 깨닫고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허나 부질 없는 노력이었다.

고위 정령조차 압도하는 재앙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우우웅-!!

순수한 마나의 기류가 하늘을 뒤덮는다.

미네르는 고위 정령을 코앞에 두고도 몸을 피하긴커녕 하늘로 눈을 돌려야 했다.

미네르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마법사 한 명이 허공을 밟고 서있었다.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소녀가, 무감정한 은빛 눈동자로 미네르를 내려봤다.

루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마법을 전개했다.

화르륵!!

아공간에 미리 고정시켜서 응축해놓았던 에너지가 해방된다.

총 다섯 개의 아공간에서 풀려나온 에너지가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했다.

루나는 폭주하려는 에너지 덩어리들을 새로운 아공간을 생성해 하나로 묶었다.

너무나 고밀도로 압축된 에너지 덩어리가 금방이라도 아공간을 찢어버릴 것처럼 요동쳤다.

루나의 손가락이 미네르를 가리켰다.

오목한 형태로 휘어진 아공간이 날뛰는 에너지를 한 점으로 집중시킬 준비를 마쳤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레이가 외쳤다.

"루, 루나야, 죽이지는 말고!"

저걸 정면에서 맞으면 엘프는 살점 하나 남기지 못할 게 뻔했다.

레이의 말을 들은 루나의 손가락이 조금 옆으로 옮겨갔다.

마법을 취소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났으니, 쏘아내긴 해야 했다.

"저지먼트."

쩌엉!!!!!!

새하얀 빛의 기둥이 산 절반을 집어 삼켰다.

아공간에 미리 고정시켜둔 에너지를 모조리 집중시켜 쏘아낸 공간 계열 마법인 만큼 그 위력은 평범한 고위 마법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산 일부가 증발해 평지처럼 내려앉는다.

지진을 동반한 마법의 후폭풍이 산맥을 타고 울려 퍼졌다.

후폭풍에 휩쓸린 미네르는 한참을 굴러간 끝에 간신히 몸을 멈춰 세웠다.

직격은커녕 후폭풍에 휩쓸렸을 뿐인데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크엑...! 크큭...!"

미네르는 피를 토하다말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엑스퍼트에, 그래듀에이트에, 웬 고위 정령이 날뛴다 했더니, 이제는 최상위 섬멸 마법에 비견되는 마법이 삽시간에 전개되어 내리꽂혔다.

마법을 발현하기 위한 준비가 미리 되어있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네르의 상식으론 이만한 마법을 제대로 발현하려면 고위 마법사 여럿은 필요했다.

"여기에 뭐... 제국 반란군 비밀 사령부라도 있냐?"

비틀거리며 헛소리를 지껄인 미네르가 주변을 훑었다.

이 이해 못할 영지를 벗어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기 위해선 인질을 다시 찾아야 했다.

저 마법사가 다짜고짜 섬멸 마법을 쏘아낼 수 있었던 이유도 미네르가 인질을 뺏겼기 때문이었다.

필사적으로 주변을 훑은 끝에 미네르는 중급 바람 정령의 보호를 받고 있는 레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서로의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았다.

미네르가 다가오기 시작하자 레이가 땅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속 해보게?"

츠즉!

레이가 쥔 단검 위로 검기가 발현됐다.

눈을 크게 뜬 미네르가, 이미 한참 전부터 자신이 속고 있었음을 깨닫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비열한 인간 놈들이...!"

"귀쟁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레이가 입 꼬리를 비틀며 미네르의 목에 검기가 서린 단검을 가져다 댔다.

*

"말 두 필, 그리고 산 하나라..."

백작이 시그니 산맥 초입에서 엘프를 잡아 귀환한 레이를 보고 눈으로 욕을 했다.

잠깐 유흥을 즐긴 비용이라기엔 그 손해가 너무 컸다.

기사들이 타야 할 말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망가진 산을 복구하기 위해 필요한 예산도 어마어마했다.

이번에는 레이도 전혀 대꾸할 말이 없었기에 얌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백작은 한숨을 삼키며 이번 일의 관계자들을 불러 모았다.

매튜가 자신이 겪었던 상황을 증언하자 백작은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지미, 매튜 그대들도 '티티'에 대해선 알고 있을 걸세."

지미와 매튜는 티티의 정확한 신분은 몰랐지만, 티티가 세계수의 저주에 걸려 동족인 엘프들에게 쫓겨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백작이 답답한 심정을 숨기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티티의 주변에 동족이 가까이 가면 저주가 전염되네. 그게 그녀가 동족에게 완전히 버림 받은 이유일세."

만약 저주에 전염성이 없었다면 엘프 중 누군가는 티티를 보살폈을 것이다.

허나 세계수의 저주는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았고, 때문에 인간 영웅이 그녀를 맡게 되었다.

필립스 백작가가 이런 변방에 자리 잡게 된 이유도 저주와 연관이 있었다.

티티가 다른 엘프와 접촉할 상황을 최대한 피해야 했기에 엘프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지역을 골랐던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레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세계수란 게 성질 한 번 참 좆 같구나 싶었다.

어쨌든 엘프가 보육원 앞에서 갑자기 은신이 풀린 것도, 정체를 들킨 이후 과민하게 반응한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됐다.

상황은 대충 이해됐으니 이제 감금해놓은 엘프를 심문해야 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보낸 것인지, 동료는 존재하는지 전부 캐내야 했다.

허나 엘프가 얼마나 협조적으로 나오든, 살려서 돌려보내 주긴 어려웠다.

만남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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