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2)
138화
요즘, 안 그래도 필립스 백작령은 외지인을 경계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실력 자랑을 잔뜩 하고 돌아왔으니 다른 귀족가들이 사람을 보내 크고 작은 수작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매튜 또한 상황을 들었기에 최근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다.
헌데 이런 시기에 낯선 자가 보육원 주변을 서성이고 있으니 평소보다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영주민인지 외부인인지 바로 판별하기 어려웠겠지만, 매튜가 발견한 자는 엘프였다.
이 근방에서 엘프는 굉장히 찾아보기 힘들었다.
"넌 누구지?"
매튜가 칼을 겨눴다.
미네르는 그제야 자신의 은신이 풀렸으며, 얼굴을 가려야 할 로브 또한 반쯤 벗겨졌음을 깨달았다.
얼굴이 노출됐다. 거기다 이들이 숨기고 있을 '무언가'에게 영향을 받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미네르는 잠시 침묵한 끝에 매튜를 죽여 입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대체 필립스 백작령이 뭘 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정체가 노출되는 게 특히 더 껄끄러웠다.
미네르가 매튜를 향해 한 발 다가섰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무언가의 '범위'에서 벗어난 탓인지 뒤틀렸던 팔도 본래 상태를 되찾았다.
미네르가 웃음을 머금은 채 자기 가슴 부근을 옆으로 훑었다.
츠즉!
미네르의 모습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네르가 허리춤에 있던 마른 나뭇가지를 손에 쥐었다.
일견 볼품 없어 보였지만 세계수의 나뭇가지였다.
세계수가 뻗어낸 셀 수 없이 많은 가지들중 하나였기에 대단한 힘이 깃들어 있지는 않았으나, 엘프의 손에 쥐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자연스럽게 휘어진 세계수의 나뭇가지 위로 미네르가 화살을 쟀다.
얇은 손가락이 마나를 머금은 화살을 당겼다가 놓았다.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 미지의 힘이 화살을 가속시켰다.
쐐액!!
"!!"
엘프의 모습이 사라진다 했더니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화살을 보고 매튜가 기겁하며 검을 휘둘렀다.
화살의 속도가 너무 빨라 눈으로 확실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매튜는 그동안 갈고 닦은 직감에 의지해 성공적으로 화살을 쳐냈다.
카각!!
검기가 서린 검을 휘둘렀음에도 화살을 양단하지 못했다.
궤적이 뒤틀려 매튜를 지나친 화살이 지면에 박히며 둔중한 소리를 울렸다.
화살이 아닌 폭탄을 맞은 것처럼 땅이 패었다.
매튜는 낭패한 기색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웬 엘프가 영지를 찾아왔나 했는데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제대로 된 엘프 사수였다.
샤프슈터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들은 은신과 저격에 특화되어 있었다.
제대로 완성된 샤프슈터는 기사들조차 두려워했다.
"..."
매튜는 은신한 엘프의 기척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이대로 엘프가 물러났으면 참 행복했겠지만, 이미 선공을 가한 이상 끝을 보려고 할 게 자명했다.
매튜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어떻게 꼴사나운 비명을 질러야 빠르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허나 자신이 서 있는 곳 바로 옆이 보육원이라는 것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가 애들이라도 튀어나오면 같이 죽자는 거였다.
"이런 젠장."
욕설을 내뱉는 찰나 뒤통수에서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황급히 몸을 틀어낸 매튜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까가각!!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온 화살을 쳐냈으나 궤도를 완전히 틀어내는 데 실패해 어깨가 찢어졌다.
매튜는 몇 번 더 화살을 쳐내면서 엘프를 감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완전히 허사였다.
화살이 쏘아지는 순간에나 잠깐 위치를 알 수 있을 뿐 도저히 모습을 지운 엘프를 찾아낼 수 없었다.
매튜는 상대가 샤프슈터라 불리는 이들 중에서도 상당한 강자임을 깨달았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엘프가 소음을 줄이려고 화살 위력을 조절해서 이 정도지 서로 작정하고 싸웠으면 진즉 끝났다.
매튜는 마지막으로 소리를 질러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혼자 죽어버리면 피해자가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괜히 보육원 애들을 우르르 몰려나오게 만들었다가 엘프 손에 죽게 만들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다.
자기 목숨 아까운 건 당연했고 말이다.
매튜의 검 끝이 복잡한 감정 탓에 가늘게 떨렸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너 뭐하냐?"
"?!"
매튜도 놀랐고 활을 쏘던 미네르는 더더욱 놀랐다.
미네르는 만약을 위해 감각을 날카롭게 세워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헌데 지미가 가까이 다가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당황했던 미네르는 상대를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
'갱년기 온 힘 없는 늙은이...'
가진 기운이 워낙 미약해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미네르는 곧장 지미를 향해 활을 겨누었다.
흐물흐물한 늙은이를 죽이는 일이니 화살에 힘을 많이 실을 필요도 없었다.
쇄액!
흐물흐물한 늙은이의 사각에서 쏘아진 화살.
미네르는 흐물흐물한 늙은이의 머리가 곧 박살 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흐물흐물한 늙은이는 화살이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콰악!!
"...?"
흐물흐물한 늙은이의 손이 날아가던 화살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미네르가 흐물흐물한 늙은이의 손에 잡힌 화살을 몇 번이나 다시 보고는 귀를 쫑긋거렸다.
지미의 눈이 천천히 미네르를 향해 돌아간다.
계속해서 귀를 쫑긋거리던 미네르는 지미의 시선이 은신한 자신을 정확히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미네르가 혹시나 싶어 화살을 다시 지미에게 쏘아봤다.
이번엔 제대로 힘을 담은 화살이었다.
쩌엉!!!
지미가 뽑아낸 검의 궤적이 반원을 그림과 동시에 화살이 박살났다.
엘프를 확실히 '적'이라 인식한 지미의 기세가 일변했다.
힘 없이 늘어졌던 기운이 잔잔하고 거대한 기류가 되어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굳었던 어깨가 넓어지고 자글자글 했던 미간의 주름이 사라졌다.
빠졌던 머리털이 다시 나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곳에 서 있는 건 더 이상 '갱년기 온 힘 없고 흐물흐물한 늙은이'가 아니라 강맹한 초인이었다.
파닥이던 미네르의 귀가 뚝 멈췄다.
"쿠뮤..."
엘프들이 쓰는 욕설을 중얼거린 미네르가 한 발자국 물러섰다.
이 정신나간 영지에서 더 이상 활동하는 건 미친짓이었다.
미네르는 도주하려 했지만 지미는 선공을 가한 엘프의 도주를 쉽사리 윤허하지 않았다.
"어허, 어디 가냐?"
쿠웅!!
검강이 서린 지미의 검이 휘둘러지자 궤적에 있던 흙과 바위가 아예 증발했다.
미네르는 자기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재차 확인하고 곧장 땅을 박찼다.
엘프 특유의 은신 기술을 완벽히 전개한 채 달리기 시작했지만 지미의 기감은 미네르를 정확히 잡아냈다.
지미가 미네르를 쫓았고, 매튜가 지미를 쫓아가며 소리쳤다.
"엘프 잡아라!!!!"
미네르는 연거푸 '쿠뮤'를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이런 정신 나간 곳이 존재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필립스 백작령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변방에 위치한 보잘 것 없는 영지라 방심했었다.
헌데 막상 발을 들이니 가는 곳마다 엑스퍼트가 돌아다녔고,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그래듀에이트까지 튀어나왔다.
미네르는 최선을 다해 뛰었다. 허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순찰을 돌던 젠킨슨이 지미를 발견하곤 따라붙은 것이다.
미네르는 화살을 쏘아내며 추격을 뿌리치려 했지만 지미가 검을 휘두르는 족족 화살이 박살났다.
'산맥까지만 간다면...!'
산맥에 들어선다면 지형지물 덕분에 도주가 훨씬 수월해졌다.
허나 아무리 봐도 시그니 산맥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힐 모양새였다.
연락을 받았는지 기사 두 명이 말까지 타고 뒤에 나타났다.
죄다 검기는 우습게 날려대는 실력자였다.
미네르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인질을...'
그래, 인질을 잡아야 했다.
기사들 중에는 평민들이 죽어나가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사들도 많았지만, 미네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필립스 백작령 기사들이 그리 냉혈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아무 평민이나 인질로 붙잡을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권위 있는 집 자제여야 미네르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급히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방향을 튼 미네르가 사방을 훑었다.
다행히도, 마침 괜찮아 보이는 인질 대상이 멀지 않은 거리에 보였다.
갈라지는 인파를 헤집고 나아간 미네르가 단검을 꺼내 인질의 목에 겨눈 후 외쳤다.
"모두 멈춰!!"
추격해오던 지미, 매튜, 그리고 기사들이 제자리서 우뚝 멈췄다.
주변에 남아있던 영주민들은 얼른 멀찍이 도망쳤다.
인질을 잡은 채 숨을 가다듬은 미네르가 긴장을 바싹 끌어올린 채 말했다.
"내게서 물러서!! 지금 당장!! 아니면 이 녀석을 죽이겠다."
날카로운 칼날이 인질의 목을 금방이라도 파고들 것처럼 반짝였다.
휠체어에 탄 채 목에 칼이 겨누어진 레이가 비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기사님들, 전 신경쓰지 마시고...!!"
"넌 닥치고 있어!"
퍽!
단검의 검자루로 어깨를 찍힌 레이가 상체를 부들부들 떨었다.
"크윽, 분하다!"
원통해하는 레이를 구경하던 지미와 젠킨슨이 떫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
몸을 거의 회복한 레이는 이제 휠체어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반납하기 전 장난 삼아 휠체어를 타고 외출한 레이는 바퀴를 손으로 밀며 씽씽 달렸다.
그리 백작령을 산책한 후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갈까 고민하던 도중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은신한 엘프를 지미와 매튜, 기사들이 쫓고 있었는데 레이의 감각에도 당연히 엘프의 존재가 느껴졌다.
레이가 휠체어를 타고 저들 뒤를 쫓아가 볼까 고민하는데 엘프가 방향을 틀었다.
주변 가득한 인파 중 엘프는 레이를 향해 눈을 빛냈다.
제대로 된 휠체어라는 게 대량으로 뽑아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가죽까지 활용해 반듯하게 마감된 휠체어를 사용한다는 건, 레이가 꽤 있는 집 자제라는 걸 뜻했다.
미네르는 레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물론 '레이'라는 스콰이어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긴 했으나, 레이는 지금 휠체어 신세였고 또한 가장 큰 외적 특징이었던 얼굴의 상처 또한 사라져 있었다.
"크윽, 분하다!"
인질로 잡힌 레이는 싱글벙글 웃다가 슬그머니 표정을 고쳤다.
지금 당장 엘프 대가리를 깨버리고 심문할 수도 있었지만 지루하던 차에 찾아온 유희거리를 바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실리적인 측면에서도, 잠깐 인질 역할을 하며 정보를 캐내는 게 도움이 됐다.
만약 주변에 엘프의 공범이 있고, 이대로 끌려가 공범과 접촉할 수 있다면 바로 붙잡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었다.
레이가 한 쪽 눈을 깜박이며 자기 뜻을 전하자 지미가 미간을 쓱쓱 문질렀다.
어느새 지미는 다시 늙어 있었다.
"크윽...! 비겁하구나, 엘프!"
"입 닥치고 물러서!"
"아, 알겠다. 알겠으니까 진정해라, 엘프."
지미가 어색한 연기와 함께 한 발 물러섰다.
인질을 잡은 효과가 있는 것 같자 미네르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레이가 미네르의 시선이 닿지 않는 각도에서 세상 흐뭇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