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1)
137화
레이는 한동안 외출할 때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일어나서 돌아다닐 수는 있었지만 굳이 쓸데 없이 무리해서 몸에 하자가 늘어나는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자 했다.
카렌은 레이의 부상을 안타까워하는 한편, 레이가 약해진 기회를 놓치지도 않았다.
"청소해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붕대 갈아줄까?"
"씻을래?"
카렌은 도움을 준다는 핑계로 거의 매일 레이의 집을 드나들었다.
레이도 카렌의 방문이 싫은 것은 아니었기에 카렌을 말리지는 않았다.
물론 상처가 아직 흉측했기에 붕대를 감는 일 같은 건 스스로 했다.
오늘도 찾아온 카렌이 붕대를 갈아주겠다는 둥 씻는 걸 도와두겠다는 둥 작업을 걸자 레이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만 가라."
"붕대 새로 감아줄게!"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도와준다고 하는데도 그래!"
불만을 내비친 카렌이 휠체어에 앉은 레이 뒤에서 귀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꽤 추억이 서린 행위이긴 했지만, 어린시절에 비해선 아무래도 오고 가는 감정이 달랐다.
카렌은 옛날처럼 이빨로 귀를 질겅거리는 대신 촉촉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귀를 자극했다.
레이는 최대한 무심한 척 하려 했지만 귓가를 간지럽히는 카렌의 숨소리를 듣고 있자면 괜히 몸에 힘이 들어갔다.
레이가 그만하라며 한 마디 하려는 순간 카렌의 혀 끝이 레이의 귓바퀴를 쓱 핥고 지나갔다.
온몸에 닭살이 돋게 하는 질척한 자극에 레이가 기겁했다.
"야이씨!! 빨리 나가!"
어깨를 들썩이는 레이를 보고 묘한 웃음을 지은 카렌이 눈을 슬그머니 치켜떴다.
"붕대 감는 것도 내 도움 받으면 편하잖아. 상처 보여주기 싫어서 그래? 아니면..."
레이는 붕대를 감아야할 면적이 워낙 넓어 새롭게 붕대를 감으려면 옷을 거의 다 벗어야했다.
카렌은 레이를 위아래로 살펴보고는 목에 힘을 준 채 요하나의 목소리를 흉내냈다.
"쪼, 쫄려...?"
"이게 이상한 것만 자꾸 열심히 배워."
"악!"
카렌의 턱을 붙잡아 밀어낸 레이가 휠체어에서 일어나 걷더니 침대 위로 털썩 엎드려 누웠다.
레이가 그만 가보라고 연신 타박했지만 카렌은 레이를 따라와 바로 옆에 몸을 뉘었다.
카렌은 눈앞에 보이는 레이의 뒷머리를 익숙하게 쓸어내렸다.
카렌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은 사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레이가 가만히 뒷머리를 내어주고 있자 카렌이 바싹 붙어 레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레이."
"왜?"
"안 덮쳐?"
살짝 몽롱하던 정신이 확 깬 레이가 엎드린 채로 답했다.
"무릎 아파."
"...내가 움직여도 되는데?"
"제발 좀 가라."
재차 귓가를 우물거리기 시작한 카렌을 옆으로 밀어낸 레이가 얇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었다.
카렌은 툴툴대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혹시나 싶어 레이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레이."
"왜?"
"돌아누워 봐."
"...잠깐만."
"...쫄려?"
퍽!
이불 속에서 튀어 나온 손이 카렌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알레시아 찾아오기 전에 그만 가 봐."
이런 타이밍은 귀신 같이 쑤시고 들어오는 알레시아였다. 괜히 이상한 장면을 들켜서 시끄러워지는 건 사양이었다.
카렌은 아려오는 정수리를 싹싹 비빈 후 집 청소를 간단히 마무리 짓고는 소리쳤다.
"내일도 올게!"
"마음 대로 해."
허가를 받은 카렌은 활짝 웃으며 문을 닫고 나갔다.
이렇게 레이의 전반적인 생활을 카렌이 돕고 있다면 외출할 때는 항상 요하나가 휠체어를 밀어주었다.
입술을 자주 삐죽여대긴 했지만 귀찮은 티를 내는 일은 없었다.
좀 멀리 떨어진 대장간을 들릴 일이 생겼을 때는 요하나가 휠체어를 밀며 유난히 자기 몸을 흔들어 댔는데, 레이는 얼마 안 가 요하나의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향수 뿌렸어?"
"왜, 나는 향수 뿌리면 안 돼?"
요하나가 틱틱대면서도 살짝 상기된 얼굴로 레이의 반응을 기다렸다.
향기가 좋다느니 앞으로도 좀 뿌리고 다니라느니 그런 류의 반응을 기대했지만, 상대는 레이였다.
"뭐, 요하나한테는 꿉꿉한 땀 냄새가 좀 더 어울리긴 하지."
그날 레이는 길거리에 버려졌다.
세 시간쯤 지나 결국 요하나가 레이를 회수해가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백작이 레이를 불렀다.
집무실을 찾아가자 로필렌과 루나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백작은 로필렌과 루나가 가져온 서류더미를 보여주었다.
서류의 정체는 일종의 구상안이었는데, 최종 목적은 도시 방위 결계의 전개였다.
레이는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이게 실현 가능한 겁니까?"
백작의 시선이 로필렌을 향했다. 로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해."
"소요되는 예산은?"
"백작령 1년 치 예산 정도."
"결계 유지할 에너지원이 어디 있는데요?"
"시그니 산맥에서 끌어오면 돼."
"아니 뭔 생각으로 이런 결계를 설계했어요?"
구상안에 따르면 결계가 완전 전개될 시 결계 내부 모든 인간 사이즈 생물체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 및 추적이 가능했으며 대규모 침략군을 상정한 요격 기능까지 존재했다.
"주변 영지에 전쟁하자고 시비걸자는 겁니까?"
"루나가 고집을 부려서."
레이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가자 루나가 뚱한 표정을 한 채 눈을 깜박였다.
레이가 자기 미간을 매만진 후 백작에게 양해를 구했다.
"로필렌 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게."
로필렌을 다른 방으로 데려온 레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백작령 전부를 그만한 고성능의 결계로 뒤덮는 게 진짜 가능해?"
"제가 루나를 돕는다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어, 남들이 보면 반역이라도 모의했나 싶겠지만."
로필렌도 레이를 따라 웃음을 흘렸다.
루나가 아예 영지 전체를 마법적인 힘으로 요새화시키겠다고 고집을 부려 백작도 결국 레이까지 부른 것이다.
로필렌은 흥미 충족과 연구 목적으로 루나의 결계 구상과 세부 설계를 지금까지 도왔고 말이다.
"하지만 방위 결계는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on/off 되는 걸로."
항시 전개되는 결계는 무력 시위와 다를 게 없다. 거기다 백작령 전체를 결계로 감싼다?
당장 로얄가드가 상황 파악한다고 몰려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번엔 장난치지 말고 피난 상황에 대비한 성격의 결계로 다시 설계해서 가져와봐."
"알겠습니다."
탐색 기능과 실시간 통신 기능에 치중되어 설계된 결계라면 비상 사태 발생 시 원활히 상황을 파악하고 중요 인물을 챙겨 대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백작과 같이 논의해야 했기에 레이는 다른 궁금한 걸 물었다.
"지금 루나의 마법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 거야?"
추상적인 물음이긴 했다.
'마법 실력'이란 건 개인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정의할 수 있었으니까.
최근에 서클이 늘어 5서클 마법사가 된 로필렌도 마법의 이론 해석과 재설계 측면에선 어지간한 고위 마법사보다 뛰어날 터였다.
로필렌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충분한 지원과 시간만 주신다면..."
"주신다면?"
"루나는 현존하는 마법 대부분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
레이가 뭔 미친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로필렌은 떳떳했다.
루나는 무언가를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루나가 아무리 천재라 해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창조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루나에게 6서클 마법 이론까지만 가르친다면 언젠가는 홀로 대마법을 창조했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허나 루나는 오벨리스크에 기록된 온갖 마법 이론을 전부 배울 수 있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제련된 마법 이론 전부가 루나에게 흡수됐다.
또한 루나는 이제 3서클 마법사였다.
고작 3서클 마법사였지만, 하나의 서클이 지니는 연산 기능이 평범한 마법사들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강제로 연산 속도를 끌어올리면, 루나는 일시적이게나마 하나의 서클로 3서클 마법을 발현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충분한 지원과 시간만 있다면.
"지금도 저 아이는 하늘을 가를 수 있어요."
이건 로필렌이 레이에게 전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였다.
언뜻 루나의 성장은 느려보였지만, 그녀의 성장 속도는 이치를 한참 벗어나 있었고, 시간이 더 지나면 과거의 영광을 전부 되찾은 하르시아라 해도 결코 감당할 수 없었다.
저건 언제든지 멸망이란 개념을 뒤집어 쓸 수 있었다.
제거해야 한다면 하루라도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레이는 잠시 로필렌을 바라보다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레이는 결정을 내렸고, 로필렌은 고개를 숙이며 레이의 결정을 따랐다.
로필렌은 레이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랐다.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을 되돌리기 위해서 필요한 대가는 최소 대륙의 절반이었다.
*
미네르가 본격적으로 임무를 시작했다.
미네르는 필립스 백작령을 관찰하며 이곳이 굉장히 괴상한 영지라는 걸 깨달았다.
필립스 백작 휘하 기사의 숫자는 열 명 내외로 파악됐는데, 그들 전부가 숙련된 엑스퍼트 급 기세를 뿜어냈다.
힘 없는 변방 영지라면 적당히 힘 좋은 사내에게 갑옷을 입혀 놓고 기사라 주장할 것이라 우습게 봤던 미네르는 경악했다.
'이만한 기사 병력을 유지하기 힘들 텐데...?'
거기다 필립스 백작령은 보육원을 운영하며 재능이 있다 싶으면 신분 가리지 않고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분 격차에 대단히 민감한 인간 사회를 겪어왔던 미네르 입장에선 거의 별세계처럼 느껴졌다.
신분 가리지 않고 인재를 키우고 등용한다는 개념은 언뜻 긍정적으로 보였다.
허나 이런 식으로 영지를 운용했다간 신분제를 근간 삼아 돌아가는 체제가 빠르게 붕괴될 게 뻔했다.
영지가 난장판이 되거나, 그전에 주변 귀족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유지 가능한 건 기껏해야 수십 년이었다. 아니면 절대적 강자가 영지의 중심을 지키거나.
백작령 암흑가의 주인이라는 '매튜'라는 인간도 미네르에겐 놀랍게 다가왔다.
매튜는 백작령 기사들에 비해선 조금 모자라 보였지만, 분명 완숙한 엑스퍼트의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암흑가의 주인 '매튜'는 아무래도 '지미'라는 인간을 바지사장으로 앉혀서 활용하는 것 같았다.
'지미'에게는 아무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네르는 '지미'를 갱년기가 온 힘 없는 늙은이라 판단했다.
저런 늙은이를 얼굴마담으로 활용하는 매튜의 치밀함에 미네르는 혀를 내둘렀다.
백작령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요하나'를 영입하려면 정공법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필립스 백작에게 거금을 쥐여준 후 요하나를 영입하는 것이다.
보아하니 몸이 불편한 사내에게 마음이 가 있는듯 했는데 일단 이 정보도 전달하기 위해 기록해 두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미네르는 며칠만 더 머물다 귀환하기로 마음 먹었다.
미네르는 마지막으로 필립스 백작령 구석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육원으로 향했다.
일주일 전에는 먼 거리에서 관찰했지만 오늘은 조금 더 가까이 가 볼 생각이었다.
뿌드득
헌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미네르를 덮쳤다.
팔목에 핏줄이 돋아나며 갑자기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독? 저주 마법?
항마력이 강한 엘프를 이토록 은밀하게 중독시킬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한다고?
뒤틀리기 시작한 팔을 붙잡은 미네르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건 마법에 기반한 저주가 아니다.
엘프의 모든 저항력을 이따위로 뭉개고 들어올 수 있는 저주는...
"세계수..."
대체, 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
보육원, 지금 저 보육원에 대체 어떤 존재가 있는 거야?
공황에 빠진 미네르가 보육원으로 다시 시선을 향하는 순간, 칼이 뽑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넌 누구지?"
매튜가 칼을 겨누며 물었다.
그제야 미네르는 자신의 은신이 풀렸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