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1)
135화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발생한 사건의 여파는 작지 않았다.
제국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보상을 약속했으나 왕국으로선 그들을 신뢰하기 어려웠다.
왕국과 타라니스 가문은 배를 침몰시킨 주범이 누구인지 아직 확정 짓지는 않은 듯 했지만, 한동안 제국과 거리를 두리라는 건 명백했다.
오시리스 백작령과 인접한 바다에서 발생한 사건이니만큼 오시리스 백작은 머리를 싸맨 채 적극적인 조사를 지시했다.
제국의 중앙 조직과 다른 가문들 또한 조사를 지원했는데,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사건이 바다 위에서 벌어진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많은 물리적 증거들이 해류를 타고 더 먼 바다로 밀려나거나, 강력한 마법에 노출된 탓에 가루가 되어 식별이 불가능해졌다.
항구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과 마나의 잔향을 조사해 8서클 섬멸 마법 플레어가 발현되었음은 알게 됐지만 그 이상 조사가 진척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마티아스 후작가는 이번 사건으로 큰 손해를 봤다.
아직 조사가 진행되는 중이었지만, 마티아스 후작가는 배를 침몰시킨 게 포이보스 측 세력이 벌인 일이 아닐까 의심하는 중이었다.
2황자가 사망한 뒤 황제의 방관 아래 황위 다툼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현 황제의 서자인 포이보스가, 다른 황족을 지지하고 있는 마티아스 후작가를 견제할 목적으로 일을 벌였다는 주장은 꽤 그럴듯했다.
이리 가정하면 바다 한가운데 발현됐던 플레어를 비롯한 고위 마법들의 목적이 설명된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고위 마법을 난사한 게 아니라, 경고를 담은 일종의 무력시위를 펼친 것이다.
만약 이런 추측이 신빙성 높다고 판단되면 황위 다툼은 훨씬 위험하고 격렬하게 변할 것이다.
어쨌든, 마티아스 후작가는 공들여 준비한 계획이 전부 꼬여버렸다.
왕국, 그리고 타라니스 가문과의 관계 회복은 아무리 노력해도 한동안 힘들었다.
마티아스 후작은 집무실에서 신경질적으로 값비싼 물건들을 박살냈다.
난장판이 된 집무실에 앉은 마티아스 후작은 자꾸만 갈려대는 이를 멈추기 위해 턱에 힘을 주었다.
왕국과의 일이 꼬인 건 포이보스의 방해공작 탓에 그렇다고 치자.
헌데 그도 모자라 오시리스 백작령에서 가문의 기사들이 엄청난 굴욕을 당하고 왔다.
"이 무능해 빠진 것들. 고작 변방 잡것들에게 그런..."
"..."
해리스 마티아스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마티아스 후작의 눈치를 보았다.
마티아스 후작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충동적으로 필립스 백작가를 폄하했지만, 그들이 과거에 영광을 누렸던 가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마티아스 후작가의 역사 또한 오래된 만큼 과거엔 필립스 백작가와 자주 얽히고는 했다.
이제는 그 위세 천지차이긴 했으나, 필립스 백작가가 과거의 영광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음이 이번 일로 증명됐다.
'헌데 갑자기 이빨을 드러낸 이유가 뭐지?'
필립스 백작이 야심을 가지고 벌인 일은 아닐 확률이 높았다.
변방의 귀족가가 권력 싸움을 하고 싶다면 반드시 선행 혹은 후행되어야할 작업을 필립스 백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혹시 딸의 혼처 때문인가?'
그러고보니 필립스 백작 영애가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다.
과거에 안 좋은 소문도 몇 번 돌았던 여자라서 좋은 상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게 뻔했다.
좀 더 뛰어난 사윗감을 얻기 위해 가문의 위명을 높이려 했다면 이해가 갔다.
"하..."
실소를 흘린 마티아스 후작이 보고서를 다시 살폈다.
변방 귀족가의 사정이야 어찌 됐든 요하나라는 스콰이어는 탐나는 인재였다.
기사들의 증언과 객관적인 성취를 보면 빠른 시일 내에 그래듀에이트에 오를 터였고, 장기적으로는 마스터의 경지를 바라볼 천재였다.
이번 사건 때문에 손해를 잔뜩 봤는데 이거라도 선점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평민 출신의 스콰이어를 영입하기 위해선 일단 사전 조사가 필요했다.
주변 인간관계를 파악해야 했는데, 가까운 곳에서 은밀히 엑스퍼트 급을 감시 가능한 실력자가 필요했다.
고민하던 마티아스 후작이 입을 열었다.
"미네르, 당신이 맡아주어야 할 일이 생겼소."
마티아스 후작의 말을 들은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머리 양옆으로 길게 뻗어나온 귀가 살짝 흔들렸다.
*
레이는 약 열흘간의 치료 끝에 얼굴의 상처를 대부분 회복할 수 있었다.
거울을 바라본 레이가 솔직하게 감탄했다.
"이 정도면 무릎 꿇고 기도 좀 올려볼 만 해."
지구에서라면 치료를 마치고 흉터까지 해결하는 데 몇 년은 걸렸을 것이다.
신성력의 성능이 대단하긴 했다.
물론 현재 레이의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목 아래의 화상은 고스란히 흉터로 남을 예정이었고, 신체 내부의 손상까지 완전히 복구되려면 한참 더 치료를 받아야 했다.
몸에 무리가 가면 안 되기에 레이는 한동안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다.
오랜 만에 병상에서 일어난 레이는 휠체어에 앉은 채 백작을 대면했다.
오시리스 백작령에서의 일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설명한 레이가 다른 얘기를 꺼냈다.
"백작님, 만약을 대비해 비상대피... 그러니까 피난 계획을 새롭게 수립하고 훈련을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백작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레이가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만약을 대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영지민들을 전부 피난시키는 건 어떻게 해도 불가능하네."
"예, 그러니 위험이 닥쳤을 때 우선해서 구해야 할 자들을 등급을 매겨 세분화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잔인한 이야기였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비상 사태가 발생하면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우선순위가 높은 자들을 먼저 챙겨 움직여야 했다.
이를 좀 더 확실히 준비하고 대비하자는 게 레이의 의견이었고, 백작 또한 동의했다.
"계획은 세울 수 있지만, 피난 훈련을 공개적으로 진행하긴 어렵네."
"뭐.... 그렇겠네요. 애초에 비상대피 계획 자체가 남에게 노출되면 안 되니..."
믿을 수 있는 관계자에게만 계획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예 대비를 안 해놓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루비하 왕국과 전면전이 발생하면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대피해야 하나요?"
"더 후방으로 가야하네. 왕국은 우리 영지에 큰 관심이 없을 걸세. 도리어 우선적으로 오시리스 백작령을 점령해 항구를 이용해 물자를 보급하려 하겠지."
"아, 그렇군요."
지도를 보며 레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백작이 지도 위의 시그니 산맥 위로 손가락을 길게 그었다.
"우리가... 시그니 산맥을 넘어가야 하는 일은 없길 바라네."
"..."
백작의 말에 내포된 뜻을 쉽사리 이해한 레이가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리 만들지 않을 겁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레이가 창문을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
"헌데 영주성을 지키는 결계의 형태가 조금 바뀐 것 같네요."
"그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와 계약을 맺었던 마지막 마법사를 내보냈네."
몇 년 전부터 백작은 영주성에 고용했던 마법사들과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거나 파기했다.
대외적인 이유는 로필렌 혼자서도 그들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거짓은 아니었지만, 백작이 굳이 영주성의 모든 마법사들을 내보낸 건 그들의 시선이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필립스 백작령엔 비밀이 너무 많아졌다.
방심했다간 언제 어디서 문제가 생길지 몰랐기에, 리스크는 최대한 줄여야 했다.
"결계는 로필렌과 루나가 새롭게 전개했네. 이전 결계보다 성능이 뛰어나다고 자신하더군."
"아하..."
레이는 루나가 며칠 동안 영주성 안을 거리낌 없이 돌아다닌 이유를 확실히 이해했다.
이후 레이는 백작과 몇 가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 뒤 집무실에서 나왔다.
휠체어를 끌고 나오자 알레시아 축 처진 목소리로 레이를 맞아주었다.
"나의 기사여, 아직도 많이 아픈 것이냐?"
"이제 괜찮아. 휠체어도 오래 탈 건 아니야."
"너무하는구나. 열흘 동안 얼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레이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굳이 그 몰골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줘 동정과 걱정을 받고 싶지는 않았었다.
알레시아가 레이의 오른손을 붙잡으며 눈물을 보였다.
"자꾸 다치지 말거라."
보는 사람마다 듣는 이야기였다.
레이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나의 기사가 다치면 심려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걸 꼭 기억하거라."
알레시아는 그 말을 몇 번이고 강조하며 레이를 끌고 가더니 고급진 나무 상자를 몇 개 보여주었다.
"레이가 맡겼던 물건을 여기에 보관해놨느니라."
레이가 맡겼던 물건이라면 보석 박힌 장신구 밖에 없었다.
알레시아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 레이를 마주 보고 은근히 거리를 좁혔다.
레이는 알레시아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았지만, 지금은 손을 다쳐서 장신구를 제대로 달아줄 수 없었다.
레이는 벨라 몫의 귀걸이가 든 상자만 챙긴 채 양해를 구했다.
"몸 다 나으면 그때 드릴게요."
"으음... 그럼 기다리고 있겠느니라..."
알레시아가 레이의 휠체어를 밀고 영주성 밖으로 향했다.
영주성 건물을 나오니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카렌의 얼굴이었다.
카렌이 무거운 걸음걸이로 다가오더니 울먹이며 레이를 끌어안았다.
"걱정했잖아...!"
카렌은 며칠 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한듯 갈라진 목소리로 훌쩍댔다.
레이는 카렌의 가슴 사이에 얼굴이 완전히 덮여 눌린 탓에 기분이 좀 이상했지만 분위기를 살피고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카렌은 레이를 한참 껴안고 있다가 마음이 좀 진정되자 한발 물러섰다.
"아직 많이 아파?"
"괜찮아, 괜찮아."
뻔한 문답을 나누는 동안 요하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레이의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카렌이 물었다.
"집에 갈 거야?"
"엄마 집에 먼저 들리고. 엄마 얼굴 좀 뵈어야지."
"응, 알겠어."
대답은 카렌이 했고, 휠체어를 끄는 건 요하나였다.
레이가 카렌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요하나는 말없이 휠체어만 끌었다.
미안하긴 미안한데 사과하긴 멋쩍어하는 감정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레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서 요하나의 턱을 쳐다봤다.
"요하나."
"...왜?"
"나중에 좀 더 좋은 검을 구해줄게."
덜컹!
요하나가 신경질적으로 휠체어를 흔들었다.
그렇게 요하나와 카렌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굴리다 보니 금방 벨라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크를 한 후 문을 여니 레아가 가장 먼저 레이를 맞이해 주었다.
"오라버니, 그동안 강녕했어요?"
어디서 이상한 인사말을 주워들은 레아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 얌전한 건 첫마디 뿐이었고, 인사를 끝낸 레아는 두 팔을 들고 방방 뛰며 레이 주위를 돌았다.
"오빠 왔다! 바퀴 의자! 바퀴 의자다!"
"어째 오빠보다 바퀴 의자가 반가운 것 같네."
"나도 바퀴 의자 탈래! 바퀴 의자 재밌어!"
"레아는 바퀴 의자 못 타요. 이건 다리 부러져야 탈 수 있어요."
"다리? 다리 어떻게 부러져?"
레이가 잠깐 고민하더니 레아를 안아 올리며 답해주었다.
"언제 오빠랑 같이 지붕 올라가 보자."
레이가 헛소리를 하는 사이 벨라가 나타났다.
벨라는 레이의 몰골을 보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다친 거야?"
"아들이 사고 치는 게 한두 번입니까?"
레이는 낄낄거린 후 알레시아가 준비해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이거 엄마 선물이야."
"이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아들 건강이나 잘 챙겨."
벨라가 잔소리를 하며 상자를 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귀걸이를 본 벨라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내 나이에 무슨 귀걸이야?"
"됐고 잘 쓰기나 하세요."
바다를 닮은 아름다운 보석인 아쿠아닉스는 제국에서도 쉽게 찾기 힘들었다.
아쿠아닉스와 은장식으로 꾸며진 귀걸이를 보고 웃지 않을 여자는 많지 않았다.
벨라는 반사적으로 올라가는 입 꼬리를 억지로 낮추며 상자를 닫았다.
"고마워, 아들. 잘 쓸게."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서 레아가 마구 두 팔을 휘저었다.
"선물! 내 선물!!"
선물 선물 노래를 부르는 레아를 향해 레이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선물?"
"응! 선물! 레아도 선물 줘!"
"니껀 없는데?"
금방 울상이 된 레아를 향해 레이가 쐐기를 박았다.
"앞으로도 없을 거니까 기대하지 마."
"빼애애애애애애애액!!!!!!!!!!!"